세계가 ‘우아한 위선의 시대’에서 ‘정직한 야만의 시대’로 변하고 있다는 유행어가 있다. 더 이상 틀리기도 어려운 비전문가의 관찰이다. 과거가 우아했다는 묘사도 지금의 야만이 정직하다는 서술도 초현실적인 언사일 뿐이다. 국제정치는 단 한 번도 우아했던 적이 없고 정직했던 적은 더더욱 없다. 국제정치에서는 위선과 야만이 따로 움직이지 않는다. 둘은 언제나 함께 작동한다. 지금 우리가 목격하는 것은 시대의 본질적인 전환이 아니다. 낡은 질서의 민낯이 예전보다 더 선명하게 드러나고 있을 뿐이다.
국제정치 학자 아이켄베리(John Ikenberry)는 전후 자유주의 국제질서론을 주창한 사람으로 유명하다. 그는 자유주의 국제질서를 개방성, 느슨한 규칙 기반의 관계, 그리고 진보적 사회 목적을 가진 체제로 정의했다. 실제로 전후 미국이 주도한 질서가 제도와 규범, 동맹과 시장을 결합해 어느 정도 예측 가능한 협력의 틀을 제공한 것은 부인하기 어렵다. 아이켄베리의 ‘규칙 기반 국제질서’라는 말이 오랫동안 힘을 얻었던 이유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규칙의 존재 여부가 아니라 그 규칙을 과연 누가 누구에게 어떤 방식으로 적용하였느냐에 있다.
여기서 규칙 기반 질서란 허구에 불과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미어샤이머(John Mearsheimer)는 자유주의 국제질서란 단극 체제의 압도적 힘에 기대어 세워진 특수한 구조일 뿐이라고 설파한다. 강대국 간 경쟁이 시작되면 곧바로 무너지는 구조라는 것이다. 아차리아(Amitav Acharya)는 자유주의 질서가 애초부터 보편적인 세계질서였던 적이 없다고 비판한다. 그가 보기에 세계는 하나의 질서로 통합된 곳이 아니라 여러 질서가 복잡하게 뒤섞인 ‘복합적 세계’다. 결국 규칙 기반 질서란 강대국의 논리를 ‘규칙’이라는 언어로 포장한 것이다.
트럼프는 ‘규칙’이라는 언어가 얼마나 위선적인지를 난폭하게 증명해 보인 인물이다. 베네수엘라를 침공해 최고지도자를 납치하는가 하면 “이곳은 우리의 반구”라고 일방적으로 선언한 데 이어 그린란드를 무력으로라도 탈취하겠다고 협박하는 장면은 규칙보다 총칼이 우선이라는 본심을 더는 숨기지 않는 것이다. 한국을 향해서도 미군이 주둔하고 있는 땅의 소유권을 언급하며 압박하기까지 했다. 규범과 동맹, 법이라는 언어는 껍데기만 남았고 그 밑바닥에서는 적나라한 힘의 논리만 활개치고 있는 형국이다.
그렇다고 해서 트럼프를 ‘정직’하다고 평가하는 것은 생뚱맞은 얘기다. 그는 솔직한 것이 아니라 폭력의 논점을 거침없이 드러내고 있을 뿐이다. 강도가 자신의 속내를 숨기지 않았다고 해서 솔직한 사람이라는 식으로 존중받을 이유는 없다. 최근 이란 관련한 발언만 봐도 트럼프는 경제 지표나 전쟁 성과, 상대의 상태를 두고 끊임없이 허위와 과장을 일삼았다. 그는 정직한 야만인이 아니라 야만과 위선과 거짓을 동시에 휘두르는 조직범죄의 일원에 불과하다.
트럼프 이전의 세계가 우아했다고 미화할 필요도 없다. 나폴레옹 전쟁 후 진행된 빈 회의 시절 “회의는 춤춘다. 그러나 나아가지는 않는다”던 비아냥거림은 외교의 본질을 일찌감치 꿰뚫고 있었다. 1차 대전 후 베르사유 회의장은 문명과 원칙의 전당이 아니라 승전국들의 계산과 응징이 충돌한 전쟁터였다. 외교는 겉으로는 품위와 절차를 중시하는 척하지만 물밑에서는 이해관계의 살벌한 다툼이 벌어지는 장이다. 과거의 위선이 좀 더 고급스러운 문장으로 기록되었다고 해서 그것이 우아함이 될 수는 없다. 오늘의 야만이 더 거친 입담으로 표현된다고 해서 새삼 타락한 것도 아니다. 국제정치는 늘 위선적이고 동시에 야만적이다.
달라진 것은 본질이 아니라 표현 방식이다. 예전의 패권은 절차와 외교의 수사 속에 폭력을 숨겼고, 지금의 패권은 그 폭력을 숨길 필요조차 느끼지 않을 만큼 오만해졌을 뿐이다. 과거에는 회의장 문서와 공동성명 뒤에 칼이 감춰져 있었다면 이제는 칼을 흔들면서도 여전히 질서와 안보를 말한다. 품위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위장막이 얇아진 것이다. 트럼프는 단절이 아니라 연속선 위의 인물이며, 미국 패권의 속내를 지나치게 큰 소리로 떠들고 있을 뿐이다.
이란 전쟁은 야만과 위선이라는 오래된 진실을 지극히 노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전쟁은 늘 고상한 명분으로 시작되지만 끝내 드러나는 것은 길목과 자원, 통제권과 돈의 문제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전쟁의 참화를 지나 겨우 휴전에 이르렀을 때 트럼프의 입에서 제일 먼저 흘러나온 말은 호르무즈 해협 통항료를 둘러싼 ‘사업 구상’이었다. 그것은 외교의 실패를 넘어 국제정치의 추악한 본능을 드러낸 것이다. 미국과 이란이 무슨 장사 동업자라도 되는 것처럼 통항료와 이익 배분을 입에 올리는 발상은 우습기 이전에 비열한 것이다.
원래 전쟁은 파괴인 동시에 분배다. 누군가는 도시를 잃고 삶을 잃지만 누군가는 유가와 무기와 기지와 재건 계약, 항로 통제와 제재 체계 속에서 이익을 챙긴다. 그래서 전쟁은 끝난 뒤에도 끝나지 않는다. 하지만 전쟁으로 인한 분배는 늘 강자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이루어질 뿐이다. 총성이 멎고 나서 남는 청구서는 대개 약한 동맹국과 주변국들에 돌아간다. 전쟁이 거래로 이어지고 거래가 다시 종속으로 굳어지게 되면 외교의 언어는 협력이 아니라 상납의 체계로 재구성되는 것이다.
지금 한·미 동맹의 현실도 이와 다르지 않다. 동맹은 가치와 신뢰의 언어로 포장되지만 실제 작동 방식은 훨씬 거칠고 지저분하다. 방위비에서 시작된 요구는 기지, 무기, 시장, 기술, 외교적 선택으로 확산되고 심지어 상대의 주권적 공간까지 흥정의 대상으로 삼으려 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동맹은 협력이라기보다 수탈의 구조가 된다. 동맹을 신앙으로 떠받든다면 이런 현실은 보이지 않게 되고 보이지 않는 현실은 틀림없이 더 큰 청구서가 되어 돌아온다. 동맹이란 호혜적 약속이 아니라 약탈적 거래라는 사실을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있는가.
한국에 필요한 것은 막연한 반미도 맹목적인 친미도 아니다. 필요한 것은 거래의 구조를 직시하고 어디까지 협력하고 어디서부터 거절할 것인지 선을 긋는 능력이다. 당분간 동맹을 유지한다면 비용 전가와 주권 침해는 막아야 하고, 안보는 챙기되 공포를 빌미로 한 무한 청구서에는 제동을 걸어야 한다. 외교의 핵심은 감정이 아니라 이성이고 맹종이 아니라 협상이다. 스스로 선택지를 넓히지 못하는 나라는 끝내 가장 비싼 값으로 종속을 사게 될 것이다.
국제정치의 위선과 야만의 본질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한국이 취해야 할 태도는 명확하다. 한·미 동맹을 포함한 모든 대외관계를 감상과 충성의 대상이 아니라 국익을 위한 도구로 다뤄야 한다. 동맹을 신성시하는 나라는 결국 더 비싸게 대가를 치른다. 필요한 것은 환상을 버리는 용기, 추한 현실을 정확히 보는 눈, 그리고 그 현실 속에서도 국익을 최대화할 수단을 끝까지 계산하는 냉정함이다. 외교에서는 신뢰가 중요하지만 결국 마지막 기준은 냉철한 판단이어야 한다. 지금 한국에 절실한 것도 바로 그 판단의 용기와 지혜다.
필자 소개
직업 외교관으로 일했다. 1985년에 외무부에 처음 들어간 이후 약 15년 이상을 해외에서 지냈다. 보스턴, 파리, 텔아비브, 하노이, 워싱턴, 비슈케크(키르기스스탄), 바르샤바, 루안다(앙골라)가 그의 활동 공간이었다. 1962년에 태어난 저자는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후에 곧바로 외무부에 입부했다. 자연히 외무부 내 경력도 경제외교 분야에 집중되었다. 코이카 창설, 우리나라의 OECD 가입, 한·미 FTA 협상 과정에 관여했다. 아울러 한·미 원자력협정을 협상했고, 보건복지부에서 국제협력 업무를 총괄했으며, 2014년부터 2년간 앙골라에서 대사로 일했다. 이후 2018년 6월 외무부를 퇴직하고 국제기구인 세계스마트시티기구(WeGO) 사무총장으로 행복도시를 창조하는 도시외교를 추진했다. 2021년 6월 말로 지난 36년간 공직을 모두 마친 저자는 지금은 이창천이라는 필명으로 시, 소설, 에세이, 칼럼, 인류문명 비평서 등을 쓰는 작가로서 삶을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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