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열리는 아카데미 시상식이 비록 세계적으로 가장 관심을 끄는 영화 시상식인 것만은 사실이지만 누구 말대로 '로컬 영화제'에 불과하므로 필자는 올해도 이 시상식에 그다지 큰 관심은 없었다. 영화 '씨너스: 죄인들(이하 '씨너스')'이 아카데미 사상 최다인 16개 부문 후보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기 전까지는 말이다.
워낙에 출중했던 영화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의 독주를 누구나 예상하고 있었는데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씨너스'가 이렇게 갑자기 도드라진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출연으로 우리나라에서 그래도 50만명이 넘게 본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에 비하면 재개봉 전에는 8만명이 채 안되는 관객수를 기록한 '씨너스'의 한국 성적은 초라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러나 '씨너스'가 비록 한국에서는 외면 받았지만 북미 극장 수익이 월드와이드 전체 수익의 약 76%(출처:IMDB)를 차지할 정도로 자국 내 흥행은 대성공이었다. 허나 그런 점을 감안하더라도 흑인 감독과 흑인 배우들이 과거 흑인들이 차별 받던 시절의 흑인 음악 블루스를 다룬 영화가 미국 간판 시상식에서 역대 최다 부문 후보에 올랐다는 것은 그 자체로 놀라운 일이다.
결론만 이야기하자면 '씨너스'는 16개 부문 중 4개의 트로피를 가져왔고 대부분의 주요 부문은 예상대로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가 수상했다. 결과적으로 '씨너스'의 출발은 놀라웠으나 할리우드의 판을 전복시키지는 못했다.
큰 잡음 없이 비교적 얌전하게 아카데미 시상식은 마무리됐으나 이번 '씨너스'의 성취는 한번쯤 되돌아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전세계를 향해 최후통첩을 남발하는 동안 미국의 위상이 하루가 다르게 곤두박질 치고 있는 요즘에는 특히 그렇다.
필자는 아카데미가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에 이어 '씨너스'를 주목한 이유는 바닥을 알 수 없이 그 명성이 땅에 떨어진 미국이라는 제국의 위상을 어떻게든 끌어올리려는 절박함에서 비롯되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씨너스'가 유독 미국에서 뜨겁게 흥행한 이유는 이 영화가 흑인의 이야기를 다루면서도, 동시에 미국이라는 나라의 근본을 시청각적으로 빼어나게 표현해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 표현의 효과는 미국인이 아닌 사람뿐 아니라 미국인조차 스스로 잘 몰랐던 자국의 근본을 새삼 자각하게 했다.
'씨너스'가 '짐 크로우 법'(공공장소 흑인 분리 강제법)이 한창인 시절을 그린 시대극이었다가 음악이 비중 있게 더해지더니 결국 오컬트마저 합쳐지는 복잡한 플롯의 영화긴 하지만 어쨌든 이 영화의 정수(精髓)는 의심 없이 '블루스'다.
미국이 심지어 외계인으로부터도 전지구적 안정을 도모하고 평화를 수호하는 막중한 임무를 도맡아 수행(그것이 블록버스터 영화 속에서 일어난 일이라 할지라도)한다 해서 '세계의 경찰'이라는 이미지를 오랜 세월 독점했다.
그러나 정작 미국이 전세계에 실질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쳤다면 그것은 '문화', 더 정확하게 말하면 '대중문화' 분야에서 압도적이다. 전세계 음악 차트와 영화 차트를 미국의 콘텐츠가 뒤덮은 세월이 유구하다. 다른 건 몰라도 미국의 문화 콘텐츠가 전세계를 지배한 것은 의심할 여지없는 사실이다. 그리고 미국이 내뿜은 문화의 힘의 근본을 찾아 들어가면 거기에 흑인의 블루스가 있다.
'씨너스'는 그러한 블루스를 경외하는 영화다. 영화 속에서 천재적인 블루스 플레이어인 새미는, 타지에서 깡패 짓 하다 고향으로 돌아온 스모크·스택 쌍둥이 형제가 주점을 오픈하는 날, 드디어 무대다운 무대에 선다.
이때 새미가 'I Lied to you'라는 자작곡을 기가 막히게 한 곡조 뽑아내는데 이때부터 펼쳐지는 시퀀스는 이역만리 떨어진 대한민국의 거의 텅 비다시피 했던 극장 구석에 앉아 있던 보통의 관객인 필자의 심장마저 두근두근하게 만들 정도로 경이로운 것이었다.
1932년에 새미가 이 노래를 부르고 연주하는 동안 누구는 일렉트로닉 기타를 연주하고 어떤 이는 디제잉을 하다가 랩을 하고 또 누구는 브레이킹 댄스를 추고 트월킹을 춘다. 그러다가 누군가가 힙합을 하고 있으면 그 옆에서 또 어떤 이는 중국의 전통 악극인 '경극'을 펼친다.
생과 사의 경계를 허물고 과거와 현재, 미래까지도 한 자리에 모일 수 있게 만드는 블루스의 신성하고 거대한 마법. 영화가 표현한 블루스의 위대함은 'I Lied to you' 시퀀스에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실감나게 그려졌다.
그 장면을 보고 있을 지금의 미국 관객들의 심정이 어떨까. 전세계를 아우르는 내 조국의 힘을 절절하게 느꼈을까. 아카데미는 그 절절함으로 '씨너스'를 16개 부문에 후보로 올리며 오스카 사상 역대 최다 노미니라는 영광을 주었다. 필자는 제국으로서의 위상을 회복하고 싶은 미국 문화계의 '절박함'을 그 지점에서 본다.
어디에서 막혔는지는 몰라도 그 절박한 시도는 16개 부문 중 4개 부문을 수상함으로써 일단락 되었다. 저항의 음악 '블루스'만으로 몰락하는 제국의 미래를 구해내는 것은 역시 요원한 일이었을 것이다. 자, 이제 미국 시민들이 기다리는 이 다음 제국의 구원자는 무엇일까. 그 구원자는 밖이 아닌 이미 자신 안에 들어 있을 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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