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자의 이근안 이야기 | 진리·정의·자유] 큰 사죄 없이는 큰 용서도 없다

  • - 국가폭력의 기억과 문명의 기준

이근안 사진연합뉴스
이근안 [사진=연합뉴스]

한 인간의 죽음 앞에서 우리는 대개 말을 아낀다. 그러나 어떤 죽음은 침묵으로 덮을 수 없다. 그것이 한 개인의 생애를 넘어 한 시대의 어둠과 국가의 책임을 환기시키기 때문이다.
 
‘고문기술자’로 불렸던 이근안의 죽음이 그러하다. 그의 이름은 이미 한국 현대사의 가장 참혹한 장면과 함께 기록되어 있다. 이 죽음은 망자의 공과를 넘어, 국가가 인간을 어떻게 다루어 왔는지, 그리고 우리는 어떤 문명의 기준 위에 미래를 세울 것인지를 묻는다.
 
이근안은 개인의 일탈로만 설명될 수 없는 존재였다. 그는 박정희, 전두환 시기의 권위주의 체제 속에서 작동한 국가폭력의 실무자였다. 당시 국가는 안보와 반공, 질서와 발전이라는 거대한 명분을 앞세웠고, 그 과정에서 개인의 존엄과 생명은 쉽게 후순위로 밀려났다. 경제는 성장했고 산업은 확대되었지만, 그 이면에서는 인간이 수단으로 취급되는 일이 반복됐다. 인명경시와 생명경시는 우연한 부작용이 아니라, 인간보다 체제를 앞세운 사고가 낳은 필연적 결과였다.
 
우리는 흔히 그 시대를 평가할 때 경제적 성과와 정치적 억압을 나누어 말한다. 그러나 둘은 완전히 분리될 수 없다. 국가가 성장과 효율만을 절대선으로 삼는 순간, 인간의 고통은 통계 속으로 사라진다. 자유 없는 번영은 번영이 아니며, 인권 없는 발전은 발전이 아니다. 국가는 국민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는 가장 단순한 원칙이 무너질 때, 국가는 외형만 남은 기계로 전락한다.
 
이근안이 자행한 고문은 단순한 범죄가 아니었다. 그것은 체제의 이름으로 이루어진 조직적 폭력이었다. 전기고문, 구타, 수면 박탈, 공포를 통한 자백 강요는 수사가 아니라 인간 파괴였다. 고문은 한 사람의 몸을 해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의 존엄을 무너뜨리고, 가족의 삶을 파괴하며, 사회 전체의 도덕적 기반을 흔든다. 고문이 허용된 국가는 법치국가가 아니라 공포국가다.
 
이 사건의 본질을 가장 또렷하게 드러낸 것은 피해자들의 증언이다. 민병두 전 의원은 오랜 세월이 지난 뒤 “개인적인 원한은 없고 연민은 있다”고 했다. 그러나 동시에 “진심 어린 사과가 있었더라면 더 편하게 생을 마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말은 단순한 감상이 아니다. 그것은 피해자가 도달한 문명의 언어다. 원한은 시간이 지나면 희미해질 수 있다. 그러나 진실 없는 화해는 결코 성립하지 않는다.
 
그는 또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을 당시 재판부가 “과거를 대신해 사과한다”고 했을 때 마음이 녹았다고 말했다. 이 고백은 국가폭력 청산의 핵심을 보여준다. 피해자는 단지 처벌을 원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당한 일이 잘못이었다는 공적 인정, 그리고 진심 어린 사죄를 원한다. 인간은 모욕당한 채로는 회복될 수 없다. 존엄이 다시 세워질 때 비로소 상처는 치유되기 시작한다.
 
문학진 전 의원의 지적도 분명하다. 그는 “국가를 위해서 했다고 하지만 사람에게 해서는 안 될 짓을 했다”고 했다. 이 한 문장은 국가 권력의 한계를 명확히 규정한다. 국가라는 이름은 언제나 양날의 칼이다. 공동체를 보호하는 장치가 될 수도 있지만, 인간을 억압하는 도구가 될 수도 있다. 문제는 언제나 그 기준이 어디에 있느냐이다. 그 기준이 인간이 아니라 체제에 있을 때, 국가는 반드시 폭력으로 기울어진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고전의 지혜를 다시 불러내야 한다. 성경은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고 말한다. 진실을 외면한 화해는 화해가 아니다. 진실을 밝히는 것, 그것이 자유의 출발점이다. 불경은 “원한은 원한으로써 풀리지 않고, 자비로써 풀린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그 자비는 잘못을 덮는 것이 아니라, 잘못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된다.
 
그리고 노자의 ‘도덕경’은 “천망회회 소이불실(天網恢恢 疎而不失)”이라 하여, 하늘의 그물은 넓고 성글어 보이지만 결코 빠뜨리지 않는다고 했다. 인간의 법과 권력은 때로 진실을 가릴 수 있지만, 도(道)의 질서는 결국 모든 것을 드러낸다.
 
또한 ‘도덕경’은 “상선약수(上善若水)”라 하여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고 했다. 물은 낮은 곳으로 흐르며 만물을 이롭게 하고 다투지 않는다. 권력도 그래야 한다. 높은 자리에서 힘을 과시하는 것이 아니라, 낮은 곳에서 사람을 살리는 것이 정치의 도다. 그러나 권위주의 시대의 권력은 물이 아니라 돌처럼 작동했다. 내려가지 않고 눌렀고, 살리지 않고 억눌렀다. 그 결과가 바로 고문이라는 이름의 국가폭력이었다.
 
이근안 개인의 삶에는 뒤늦은 후회와 끝내 버리지 못한 자기정당화가 공존했다. 한때는 자신의 행위를 반성하는 듯한 말을 했지만, 또 다른 자리에서는 그것을 애국으로 정당화했다. 이 모순은 참회가 무엇인지를 다시 묻게 한다. 참회는 말이 아니라 태도다. 자기 행위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용기 없이 사과는 완성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 문제는 개인의 도덕성에만 머물지 않는다. 그를 만들고, 보호하고, 활용했던 국가 시스템 전체가 성찰의 대상이다. 고문기술자는 혼자 태어나지 않는다. 권력의 묵인, 조직의 침묵, 사회의 두려움이 결합할 때 등장한다. 진정한 역사 청산은 개인 처벌을 넘어, 그러한 구조가 다시는 작동하지 않도록 하는 데 있다.
 
박정희·전두환 시대의 경제적 성과는 분명 존재한다. 그러나 그것이 인권 침해를 정당화할 수는 없다. 성경은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생명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냐”고 묻는다. 이 질문은 국가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국가가 부유해졌더라도 국민의 존엄이 훼손되었다면, 그것은 완전한 성공이 아니다.
 
결국 우리는 하나의 원칙으로 돌아가야 한다. 큰 사죄 없이는 큰 용서도 없다. 이것은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문명의 원칙이다. 깊은 상처에는 깊은 인정이 필요하다. 모호한 유감 표명으로는 공동체의 상처를 치유할 수 없다. 진실을 인정하고, 책임을 분명히 하고, 피해자의 고통을 공적으로 수용하는 데서 비로소 사죄는 완성된다.
 
불경은 참회를 통해 업이 소멸된다고 말한다. 도덕경은 억지로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바로 서는 것이 도라고 말한다. 성경은 진실이 자유를 가져온다고 말한다. 이 세 전통은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지만 하나의 방향을 가리킨다. 인간을 존중하라는 것이다. 인간의 존엄을 해치는 권력은 결국 스스로 무너진다는 것이다.
 
인간·문화·자연을 사랑하는 것이 인류의 좌표라면, 국가폭력은 그 좌표를 잃은 상태다. 인간을 사랑하지 않는 국가는 문화도 제대로 꽃피울 수 없고, 자연도 제대로 지킬 수 없다. 인간의 존엄을 지키는 일은 정치의 일부가 아니라 문명의 기초다.
 
이근안의 죽음은 끝이 아니라 질문이다. 국가는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발전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우리는 어떤 기준 위에 공동체를 세울 것인가. 답은 분명하다. 인간이 먼저다. 진리가 먼저고, 정의가 그 위에 서며, 자유는 그 결과로 따라온다. 사람에게 해서는 안 될 일은 어떤 시대에도 해서는 안 된다. 국가는 잘못을 분명히 사죄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큰 사죄 없는 큰 용서는 없다는 이 단순한 원칙이야말로, 진리와 정의와 자유를 지키는 가장 확실한 길이라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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