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목 대구가톨릭대학교 영어학과 교수]
창세기 11장에는 잘 알려진 바벨탑 이야기가 있다. 인간은 하늘에 닿는 탑을 쌓으려 했다. 신의 영역에 도전하려는 인간의 교만을 막기 위해 신은 인간의 언어를 서로 다르게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그 결과 사람들은 서로의 말을 이해할 수 없게 되었고, 결국 함께 쌓던 탑도 무너지고 말았다. 이 이야기는 인간의 수많은 언어 분열을 상징적으로 설명하는 신화로 자주 언급된다. 물론 인류의 언어가 실제로 한순간에 갈라졌다고 볼 수는 없지만 서로 다른 언어가 인간 사회에 얼마나 큰 장벽을 만들어 왔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서로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은 단순히 의사소통의 불편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언어는 비단 소통 수단만이 아니라 문화와 제도, 역사와 사고방식을 담고 있는 체계이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사회가 만난다는 것은 곧 서로 다른 문화와 제도, 그리고 사고방식이 충돌하거나 조정되는 과정을 동반한다. 이러한 장벽을 넘기 위해 인류가 선택한 방법은 번역이다. 번역은 단순히 한 언어의 단어를 다른 언어의 단어로 바꾸는 작업이 아니다. 한 언어 속에 담긴 의미와 의도를 다른 언어의 체계 속에서 다시 구성하는 작업이다. 특히 법률과 행정의 영역에서는 이러한 번역의 어려움이 더욱 크게 나타난다. 법률 문서는 단어 하나의 차이로도 권리와 의무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국제 교류가 확대되면서 이러한 번역의 중요성은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커지고 있다. 유학, 이민, 국제결혼, 해외 취업, 기업 설립, 국제계약 등 수많은 법률적 상황에서 외국어 문서와 번역문서는 필수적인 역할을 한다.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인간 사회에서 번역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적인 사회적 수단이 되었다. 특히 여러 언어가 공존하는 국제 공동체에서는 번역의 필요성이 극단적으로 드러난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유럽연합(European Union)이다. 유럽연합은 현재 27개 회원국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24개의 공식 언어를 사용한다. 이는 유럽연합(EU)의 핵심 운영 원칙인 다언어주의(Multilingualism)를 보여준다. 이는 단순한 행정 편의의 문제가 아니라 민주주의의 원칙과 직결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유럽 시민들은 자신이 사용하는 언어로 법률과 정책을 이해할 권리를 가진다. 이 과정에서 유럽연합은 세계에서 가장 큰 번역 조직을 운영하고 있으며 전문 번역가와 통역사 수천 명이 유럽연합의 행정과 입법을 지원하고 있다. 그에 따라 번역 비용 역시 막대한 규모에 이른다. 유럽연합이 매년 번역과 통역에 사용하는 비용은 수천억 원에서 조 단위에 이르는 수준으로 알려져 있다.
바로 여기에서 ‘구조적인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번역공증이라는 말을 들으면 대부분 사람들은 번역된 내용이 공적으로 검증되었다고 생각한다. 공증이라는 단어가 주는 일반적인 인식 때문이다. 번역공증은 일반적으로 원문, 번역문, 그리고 번역자의 진술서로 구성된 문서에 대해 이루어진다. 공증법 체계에서 보면 이러한 번역공증은 ‘사서증서’의 인증에 해당한다. 이때 공증인이 확인하는 것은 번역의 정확성 자체가 아니라 번역자가 공증인 앞에서 해당 문서에 서명하였고 그 번역이 원문과 동일하다는 취지의 진술을 하였다는 사실이다. 즉 공증인은 번역문의 내용이나 번역의 정확성을 직접 검토하거나 검증하지 않는다. 이러한 구조적 공백을 그대로 두는 것은 문서 번역의 신뢰성을 제도적으로 방치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문제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현행 ‘번역문 인증 지침’에 따르면 번역공증에 필요한 번역을 할 수 있는 번역인의 범위는 매우 넓게 인정되고 있다. 외국어번역행정사뿐 아니라 외국어 전공 학위자, 외국 대학 학위 취득자, 일정 수준 이상의 공인어학시험 점수 취득자 등을 그 인정 범위에 포함하고 있다. 이처럼 번역인의 범위가 폭넓게 인정되는 상황에서 번역공증이 번역내용 자체를 검증하지 않는다면 어떤 결과가 발생할까? 번역문서의 정확성은 사실상 개인의 능력과 양심에 맡길 수밖에 없다. 특히 번역공증의 대상이 되는 문서는 대부분 법률적 효력을 가진 문서들이다. 계약서, 판결문, 기업서류, 각종 행정문서 등은 번역의 정확성에 따라 법적 결과가 달라질 수 있다. 법률번역은 단순한 언어 변환이 아니라 법적 의미와 효력을 다른 언어 체계 속에서 동일하게 재구성하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번역의 정확성은 단순한 언어 서비스의 문제가 아니라 법적 권리와 행정 절차의 신뢰성과 직결된 공공 인프라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 것인가? 답은 이미 제도 안에 존재한다. 외국어번역행정사 제도이다. 행정사법 제20조에 따라 외국어번역행정사는 자신이 번역한 번역문에 대하여 번역확인증명서를 발급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다. 이 번역확인증명서는 해당 번역문이 번역행정사에 의해 작성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증명으로서 각종 행정기관에 제출하는 번역문의 신뢰성을 확인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현실에서 외국어번역행정사의 역할과 위상은 그 취지에 비해 충분히 제도화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외국어번역행정사의 역할을 제도적으로 강화하고 번역확인증명서의 공신력을 높일 필요가 있다. 그 방안으로서 행정기관 제출 서류에서 번역확인증명서의 인정 범위를 확대하여야 한다. 외국어 문서 제출 시 관행적으로 요구되는 번역공증 대신 일정 범위의 행정 제출 문서에 대해서는 외국어번역행정사의 번역확인증명서를 공식적으로 수용하도록 관련 지침과 내부 규정을 정비하여야 할 것이다. 이러한 제도 개선은 특정 직역의 이익을 위한 요구가 아니다. 문서 번역의 정확성과 신뢰성을 확보하기 위한 제도적 보완이다.
번역공증 제도와 외국어번역행정사 제도를 함께 놓고 보면 하나의 역설적인 구조가 나타난다. 번역공증이라는 제도는 존재하지만 번역내용은 공증되지 않는다. 반면 번역내용에 대해 책임을 질 수 있는 제도적 직역은 존재하지만 그 권한은 충분히 활용되지 못하고 있다. 이제 그 역설을 풀어야 한다. 번역내용에 대한 검증 없이 번역자의 진술만을 인증하는 현재의 번역공증 구조는 제도적으로 재검토될 필요가 있다. 단팥빵이라는 이름을 붙였으면 그 안에 팥이 있어야 한다. 번역공증이라는 이름 아래 번역의 검증과 책임이 빠져 있다면 그것은 결국 내용 없는 제도를 이름으로만 유지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름은 단팥빵인데 속은 비어 있는 공갈빵이라면 그 제도는 이제 다시 생각해 볼 때가 됐다.
인공지능 번역이 범용화되는 시대에는 번역을 만드는 기술만큼이나 번역을 검증하는 제도도 중요해진다. 따라서 번역 결과를 검증하고 책임을 확인하는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 외국어번역행정사 제도는 AI 번역 결과의 ‘오류’와 ‘환각’을 점검하고 책임 있는 번역을 확인하는 사회적 장치로서, 미래 지식 산업 시대에 필요한 새로운 제도적 인프라가 될 수 있다. AI가 번역을 만드는 시대라면 번역의 책임을 확인하는 제도 역시 함께 발전해야 한다.
필자 주요 이력
▷부산대 번역학 박사 ▷미국 University of Dayton School of Law 졸업 ▷대구가톨릭대 영어학과 교수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르포] 중력 6배에 짓눌려 기절 직전…전투기 조종사 비행환경 적응훈련(영상)](https://image.ajunews.com/content/image/2024/02/29/20240229181518601151_258_161.jp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