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체결된 이 조약은 양국의 핵탄두와 운반 수단을 제한하고, 상호 사찰을 통해 투명성을 유지해왔다. 완전한 제도는 아니었지만, 오판과 우발적 충돌을 막는 현실적 장치였다. 이제 그 장치가 사라지면서 핵 경쟁은 다시 ‘규칙 없는 영역’으로 들어섰다.
군축 체제가 유지되던 시기에도 미·러는 핵무기를 포기하지 않았다. 대신 규모와 속도를 관리했다. 관리된 경쟁은 불완전했지만, 무제한 경쟁보다는 훨씬 안정적이었다.
조약 만료 이후의 상황은 다르다. 미국은 잠수함과 미사일 전력 증강을 추진하고 있고, 러시아는 신형 전략무기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중국 역시 핵 전력 확대를 공식 전략으로 삼았다.
미국은 기존 조약이 시대 변화에 맞지 않는다며 새로운 협정을 주장해왔다. 중국을 포함한 다자 틀이 필요하다는 점도 사실이다. 극초음속 무기, 우주 무기, 사이버 영역은 기존 군축 체제의 사각지대였다.
그러나 문제는 순서였다. 개편 없이 해체부터 이뤄졌다. 대안 없는 종료는 협상력을 키우지 못하고 공백만 남긴다. 외교에서 공백은 곧 군비로 채워진다. 오늘의 불안정은 구조적 필연이 아니라 정책 선택의 결과다.
군축 붕괴는 동맹국들에게 직접적인 압박으로 작용한다. 미국의 전략 우선순위가 미·중·러 경쟁에 집중될수록, 동맹 방위에 대한 신뢰는 상대적으로 약해질 수밖에 없다.
이미 유럽과 동아시아에서는 자체 억제력 강화 논의가 확산되고 있다. 이는 단순한 정치적 수사가 아니라 전략 환경 변화에 대한 반응이다. 핵 비확산 체제를 떠받치던 심리적 장벽이 약해지고 있다.
이번 조약 만료는 한국의 안보 환경을 세 가지 방향에서 바꾼다.
첫째, 확장억제의 실질성이 시험대에 올랐다. 선언적 약속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공동 기획, 정보 공유, 위기 대응 시나리오가 제도적으로 작동해야 한다. 한미 간 핵 협의 구조를 정례화·구조화하는 작업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가 됐다.
둘째, 북핵 관리의 국제 공조 기반이 약화될 가능성이 크다. 강대국들이 군축 규범을 무너뜨리는 상황에서 북한에만 규범 준수를 요구하는 외교는 설득력을 잃는다. 대북 압박과 협상의 균형 전략 역시 재설계가 필요하다.
셋째, 국내 핵무장 논의의 정책 의제화 가능성이 커졌다. 이는 단순한 여론 문제가 아니다. 국제 금융·무역·기술 협력에 직결되는 국가 전략의 문제다. 핵무장은 선택이 아니라 체제 변경에 가깝다. 충분한 비용 분석과 외교적 계산 없이 접근할 사안이 아니다.
지금 한국에 필요한 것은 명확한 전략 로드맵이다.
우선, 확장억제를 ‘정책 선언’이 아니라 운영 체계로 만들어야 한다. 공동 훈련, 공동 대응 매뉴얼, 핵·미사일 통합 운용 체계를 구체화해야 한다. 정치적 언어를 넘어 군사 시스템으로 내재화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동시에 중견국 외교를 적극 활용해야 한다. 비확산과 군비 통제를 지지하는 국가들과 협력해 새로운 다자 협상 환경 조성에 참여해야 한다. 수동적 수혜국에서 벗어나 규범 형성자로 역할을 확대할 필요가 있다.
국내적으로는 핵과 안보를 둘러싼 정책 토론의 수준을 끌어올려야 한다. 감정적 찬반 구도가 아니라, 비용·효과·대안이 체계적으로 검증되는 공론 구조가 필요하다.
안보는 선택이 아니라 관리의 문제다.
핵무기는 억제 수단이지만, 동시에 최대의 위험 요소다. 지난 수십 년간 핵전쟁을 막아온 힘은 무기 자체가 아니라 관리 체계였다.
이번 군축 붕괴는 그 관리 시스템이 흔들리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고 손 놓고 불안을 받아들일 수는 없다. 오히려 이런 시기일수록 중견국의 전략적 판단은 더 중요해진다.
한국은 불안정의 피해자가 아니라 안정의 설계자가 돼야 한다. 감정이 아니라 제도, 구호가 아니라 시스템으로 대응해야 할 때다.
핵 없는 세상은 멀어졌을지 모른다. 그러나 통제 없는 핵 경쟁은 어떤 국가에도 이익이 되지 않는다. 지금 필요한 것은 냉정한 계산과 치밀한 정책 대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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