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철학자 토머스 쿤은 '과학혁명의 구조'에서 기존의 틀로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가 축적되면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전면적인 패러다임 전환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지금 우리 산업 R&D가 처한 현실이 바로 그렇다. 세계 최고 수준의 정부 R&D 투자에도 불구하고 산업 현장의 생산성은 정체돼 있고 양적 성장 역시 한계에 부딪혔다.
파편화된 소규모 과제의 일상화, 복잡한 행정 절차로 인한 인력 낭비, 성공만을 염두에 둔 평이한 목표 설정이 파괴적 혁신을 가로막는다는 지적이 반복된다. 관행대로 진행돼 온 R&D 지원 방식이 연구의 창의성과 실질적인 성과 창출을 제약하는 ‘가짜 일’로 작동해 온 셈이다.
이러한 문제의식 속에서 산업통상부는 지난 1월 ‘산업 R&D 혁신 방안’을 발표했다. 이번 방안의 핵심은 일부 제도의 보완이 아니라 관행의 탈을 벗어던지는 패러다임의 대전환이다.
첫째, 소규모·분절형 과제에서 ‘대형 R&D 프로젝트’ 중심 체제로 전환한다. 100억원 이상 대형 과제 비중을 2030년까지 30% 이상으로 확대해 행정 관리와 단편적 기술에 소모되던 연구 역량을 기술 완성도와 성과 창출에 집중하도록 사업구조를 바꾼다. 이는 ‘관리하기 쉬운 과제’가 아니라 ‘파급력 있는 기술 개발’에 역점을 두겠다는 정책적 결단이다.
셋째, 기업별·공정별 지원 체제를 ‘M.AX(제조 AI) 얼라이언스’ 중심으로 재편한다. AI 기반 산업 R&D로 공정과 제품의 혁신을 도모하되 M.AX 얼라이언스가 산업과 AI 융합의 구심점 역할을 한다. 업종별 제조 AI 모델을 공동 개발하고 이를 산업 전반으로 확산하는 협력 구조를 구축한다. 이를 통해 제조업 전반에 AI를 기본 인프라로 활용해 생산성을 30% 이상 끌어올린다는 목표다.
이 같은 패러다임 전환을 통해 산업 R&D는 서랍 속 서류에 머무르지 않고 시장에서 작동하는 ‘진짜 성과’를 창출하게 된다. 글로벌 수요 앵커기업과 소부장 협력사가 함께 프로젝트를 설계하고 실증까지 책임지는 ‘수요자 주도형 프로젝트’가 본격화되면 우리 산업의 대도약을 이끌 수 있다. 정부는 규제 완화와 인프라 지원을 패키지로 제공해 기술의 조기 상용화에 힘을 더할 계획이다.
아울러 연구 현장에서 ‘가짜 일’은 확연히 줄어들 것으로 기대된다. 연구자율성 제도를 확대하고 회계·정산 등 행정 업무는 AI가 처리한다. 과제의 중단과 변경을 보다 유연하게 허용해 반 토막 성공이 아니라 최종 사업화에 집중하도록 유도한다. 실패를 용인하는 시스템이 도입되면 고위험·고수익 연구에 도전할 수 있는 환경도 마련된다.
산업 R&D 패러다임 대전환은 기술패권 시대의 생존 전략이다. 붉은 말의 해를 맞아 힘차게 비상하는 ‘적토마’처럼 R&D 혁신방안이 산업 현장을 달려야 한다. 낡은 제도를 혁파하고 새로운 제도와 관행을 안착시켜 산업 R&D가 다시 한국 경제의 심장으로 힘차게 뛰도록 해야 한다. 이제 그 성과를 연구 현장에서 입증해야 할 시간이다.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르포] 중력 6배에 짓눌려 기절 직전…전투기 조종사 비행환경 적응훈련(영상)](https://image.ajunews.com/content/image/2024/02/29/20240229181518601151_258_161.jp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