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수 한양대 문화인류학과 명예교수]
이번 주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이 국빈 방한했다. 한국과 튀르키예 양국은 오랜 역사적 교류와 문화적 친근성, 특히 한국전쟁 시 대규모 파병이라는 현대사의 특수성을 바탕으로 지구촌에서 가장 가까운 우방으로 자리매김해 왔다. 그런 끈끈한 역사-문화적 유대는 상호이해 부족과 지리적 공백으로 인해 실질적인 협력의 수준에는 미치지 못한 측면이 강했다. 그런데 이번 에르도안 대통령의 통상 5번째 방한(총리 시절 포함)과 8년 만의 국빈 방문으로 양국관계에 획기적인 전환기를 맞이하고 있다.
튀르키예가 한국과의 관계에서 가장 중점적으로 추진하고 중요하게 여기는 협력 어젠다는 원전 프로젝트 협력, 방위산업의 공동 개발 및 제3국 공동 진출, 그리고 FTA협정의 개정을 통한 양국 무역 불균형 해소와 이를 위한 제조업 및 첨단기술 투자의 유치로 요약할 수 있다. 단순한 상품 수출입이나 기술 구매를 넘어 기술 이전, 현지 공동 생산, 전략적 동반자 관계 활성화를 통한 상호보완적 실리를 얻는 것이 양국의 공통 관심사다.
첫째는 총 사업비 300억 달러(약 40조원) 규모의 1400MW급 한국형 원자로 4기를 건설하는 튀르키예 시노프 제2 원전 사업을 한국과 협력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역대 최대 규모의 초대형 원전 수주가 될 전망이다.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력과 안전성을 인정받은 결과이고, 아랍에미리트 바라카 원전시설 완공 이후 시노프 원전을 통해 글로벌 원전 시장의 선두주자로 우뚝 서는 계기가 될 것이다. 이번 회담의 의미있는 협력 방향은 단순 기술 이전이나 제품 구매가 아니라, 양국의 경험과 시장 네트워크, 상호보완적인 전략적 파트너십 구축과 현지 공동 생산을 통해 제3국 시장에 공동으로 진출한다는 목표를 들 수 있다.
둘째는 방산 협력 분야다. 사실상 튀르키예는 그동안 한국 방위산업의 형성과 성장에 핵심적 교두보 역할을 해왔다. 한국의 방산이 해외 시장에 최초로 진출한 나라가 튀르키예였고, 오늘날까지 가장 모범적인 방산협력의 모델이 되어 왔다. 2001년 튀르키예는 한국의 K-9 자주포 기술을 이전받아 튀르키예 군의 핵심 전략자산인 T-155 프르트나(Firtina)를 개발하는 데 성공했고, K-2 흑표전차를 기반으로 튀르키예 차세대 주력전차인 알타이 전차를 실전 배치했다. 이제 튀르키예는 세계 9위 규모의 군사력과 세계 3위권의 군사용 드론 기술 보유국이다. 바이락타르(Bayraktar) TB2, 아큰즈(Akıncı) 등 세계적인 무인기 운용 실전 경험과 제조 기술을 지닌 튀르키예와 한국의 우수한 통신·감시정찰(ISR) 센서 및 반도체·전자제어 기술의 결합과 협력, 나아가 튀르키예의 5세대 전투기 개발 프로젝트인 KAAN과 한국의 KF-21 사업 간 장비보완과 레이더 기술 교류, 항공 엔진 및 기술 정비 분야도 효율적인 협력 분야다. 이에 머물지 않고 단단한 혈맹과 역사적 오랜 친근성을 토대로 양국의 기술-군사적 협력은 중동·중앙아시아·아프리카 등 새로운 글로벌 시장에 공동 진출할 수 있고, 상호보완적 공동 마케팅에 메가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을 것이다. 이번 정상 회담의 또 다른 미래지향적 협력 비전의 설정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미국-이란 전쟁 장기화로 고통받는 우리 입장에서 외교협력 분야도 절실한 과제다. 에너지 의존도가 절대적이고 대규모 첨단 산업 진출의 전략 시장인 중동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고 전쟁의 조기 종식을 위한 평화와 중재 이니셔티브에 이 지역의 맹주로서 오랜 역사적 경험과 단단한 인적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있는 튀르키예와의 공동 대응과 전략적 파트너십 구상도 바람직한 방향이 될 것이다.
튀르키예 대통령은 왜 5번이나 방한하면서 핵심 산업의 협력 파트너로 한국을 선택했을까. 그것은 양국이 갖는 오랜 역사적 인연과 문화적 교류, 혈맹을 뛰어넘는 진정한 형제애를 빼놓고 설명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튀르키예 국민 누구에게도 ‘Kore(한국)’에서 왔다고 하면 제일 먼저 ‘칸카르데시(Kan kardesh)‘라는 표현부터 쓴다. ’피를 나눈 형제‘라는 뜻이다. 튀르키예에서 공부하고 오래 살아보고, 200회 이상 이 나라를 방문하면서도 나는 한번도 내가 외국인이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언어 소통이 가능한 장점도 있었지만, ’Koreli(한국인)‘라고 하면 눈빛과 표정이 달라진다. 공항 입국심사대에 긴 줄이 있을 때, 자국민 줄에 서도 별로 따지지 않고 씩 웃고는 입국 심사를 쉽게 해준다. 아마 지구촌에서 한국인들이 일등국민 받는 유일한 나라가 튀르키예가 아닐까 싶다.
첫째 배경은 당연히 한국전쟁일 것이다. 이 전쟁에 1만5000명의 젊은 군인들을 파병해서 3000여명의 사상자를 내면서 우리를 지켜주었다. 내가 만난 모든 튀르키예 국민들은 자신들이 흘린 피와 희생의 대가로 오늘의 대한민국이 세계적인 선도국가가 된 것을 자신의 일처럼 반가워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어떤 노병은 부산 유엔공원에 묻혀있는 460여명의 영령들이 대한민국을 영원히 지켜줄 것이라며 나에게 오히려 든든한 위로를 보낸다. 그리고는 '한반도에 전쟁이 일어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지만, 만약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녹슨 총을 들고라도 다시 한국을 도우러 나설 것'이라는 결연한 표정을 짓는다. 6·25 행사로 방한한 참전 노병의 공식인사에서도 같은 결의를 확인할 수 있었다. 최근 튀르키예 국방부와 외교부가 관리하던 한국전쟁 관련 5300여건의 관련 문서가 국가기록원으로 통합관리되면서 연구자들에게 공개되었다. 주로 미국과 영국 등의 자료에 의존하던 한국전쟁의 과정과 실체가 맹방인 튀르키예 군사-외교문서들을 보완함으로써 많은 새로운 사실들이 밝혀지고 있다. 무엇보다 전쟁 직후 참담한 상황에서도 튀르키예 군인들은 자기 월급을 갹출하여 ‘앙카라 고아원과 학교’를 지어 전쟁고아를 헌신적으로 보살피면서 체계적인 교육까지 시켜준 사실은 오늘날까지도 많은 한국인들에게 대민봉사의 전형으로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약 200명의 고아들은 서로 형제처럼 지내며 지금 80대가 되어 우리 사회의 각 분야에서 소중한 역할을 다하고 있다.
이제는 우리가 답할 차례다. 그것은 단순한 우방과의 경제적 협력 이상의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한국과 튀르키예는 9000㎞나 떨어져 살면서 유라시아의 동쪽 끝과 서쪽 끝에서 서로 다른 문화와 역사를 이어갔지만, 오랜 역사를 통해 두 민족은 중앙아시아와 동북아에서 같은 알타이 문화의 뿌리로 이웃해서 함께 살았다. 튀르크 민족사는 그들의 조상들인 흉노-돌궐-위구르 제국 시대, 고조선-고구려-발해와 접경하면서 교류했던 역사적 동질감을 강조한다. 특히 고구려-돌궐 관계는 매우 가까운 사이였다. 양국 교류를 확실하게 알려주는 가장 소중한 기록은 다름 아닌 돌궐시대 오르혼 비문이다. 732년에 돌궐 카간 퀼테긴(Kul Tegin)과 그의 후임 빌게 카간(Bilge Kagan)의 치적을 기록한 비문에 의하면 돌궐 카간의 장례식에 고구려에서도 조문 사절이 당도했음을 알리는 내용이 담겨있다. 돌궐을 이어받은 위구르 튀르크인들도 13세기 후반 몽골 지배 시기에 대거 한반도로 이주해 왔다. 이미 이슬람화 된 위구르 튀르크인들은 고려말 한반도에 정착해 살면서 종교적 전통은 물론 조선초 세종대왕 시기까지 이슬람 천문학과 과학 분야에서 크게 기여했다.
튀르크어와 한국어 사이에도 근원적으로 놀랄만한 언어적 근친구조가 존재한다는 것이 학계의 다수 견해이다. 단순한 단어의 유사성에 그치지 않고 문장구성, 음운구조, 언어적 사고, 발성 등에서 많은 친근성을 보여주고 있다. 일찍이 20세기초 핀란드 언어학자 람스테드(Ramstedt)는 한국어와 튀르크어 사이에 2000단어 이상이 같은 뿌리에서 출발했다는 연구결과를 밝혔고, 두 언어의 친근감을 보여주는 비교언어 사전까지 편찬한 적이 있었다. 이러한 문화적 동질성이 오랜 시간과 지리적 공백에도 불구하고 두 민족을 형제로 맺어주고 지구상에서 가장 가까운 협력적 파트너로 만들어주는 배경일 것이다.
‘한-튀 혈맹’이라는 지구상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상호 문화적 친근성과 역사적 협력관계는 이제 두 나라와 민족들에게 새로운 인식과 접근태도를 필요로 한다. 단순한 정치-경제적 이해관계를 뛰어넘어 어떤 경우에도 흔들리지 않는 단단한 문화적 하부구조를 구축해야 한다. 이는 상호 문화 이해에서 출발한다. 아직도 두 민족은 상대의 역사와 문화, 삶의 방식, 종교 등에 대해 서로 잘 모르는 상태다. 단편적인 한류행사나 일회성 문화공연 등을 넘어, 역사적 유대감의 재조명과 문화콘텐츠화, 실크로드 문화 공유와 알타이 인문벨트 구축을 위한 중장기 공동연구, 아나톨리아 반도 문화유산의 공동발굴과 디지털 협력, 양국 관계 근현대 아카이브 발굴과 해독, 양국기록 문화유산과 무형문화유산의 공동연구와 협력 사업, 양국 문화원 개원, 미래세대(학문후속세대) 육성을 위한 연구자-학생 교류 등의 방향으로 심화-발전시켜 나가야 한다.
금번 에르도안 대통령의 방한을 계기로 양국관계가 전통적인 경제협력과 문화교류를 뛰어넘어 급변하는 21세기 최첨단 글로벌 분야에서 새로운 기술 협력과 미래 산업의 공동 창출이라는 새 단계로 격상하는 문호가 활짝 열리기를 기대한다. 내년이면 6·25 발발 77주년이고, 한국-튀르키예 수교 70년을 맞이한다. 가슴속으로만 품어왔던 두 민족의 사랑과 신뢰가 이제 무한 경쟁의 국제관계와 각자도생의 글로벌 환경 속에서 서로 윈-윈하는 진정한 협력의 모델을 만들어 갈 때다.
필자 주요이력
▷한국외대 ▷터키 이스탄불대학 역사학 박사 ▷한양대 문화인류학과 명예교수 ▷한국튀르키예친선협회 사무총장 ▷중앙아시아연구원(UNESCO-IICAS) 학술위원(한국대표) ▷성공회대 석좌교수 ▷이슬람문화연구소 소장 ▷국내외 저서 90여 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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