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토 다다오(佐藤忠男, 1930~2022)는 대학 문턱도 밟지 않고 철공소와 공장에서 일하며 영화잡지에 글을 보내다 일본을 대표하는 영화평론가가 된 인물이다. 1995년 전 4권으로 된 <일본영화사>를 썼고, 일본영화학교 교장과 일본영화대학 학장으로 후학을 길렀으며, 아시아포커스·후쿠오카국제영화제를 이끌며 임권택 등 한국영화를 일본에 소개했다. 150권이 넘는 책을 냈고, 2019년에는 영화평론가로는 처음으로 일본 정부의 문화공로자에 뽑혔다. 2022년 3월 담낭암으로 91세에 숨졌다.
1930년 10월 6일 니가타시에서 9남매의 막내로 태어난 그의 본명은 이이리 다다오(飯利忠男)다. 아버지는 고기잡이·선박 용품을 파는 가게를 했지만 사토가 세 살 때 세상을 떴고, 가게는 어머니가 꾸렸다. 그는 어릴 때부터 책을 좋아해 소년잡지를 즐겨 읽었다. 소학교 고등과를 마친 뒤 중학교 입시에 떨어졌고, 1년 뒤 해군 소년비행병에 지원해 입대했지만 반년여 만에 패전을 맞았다. 패전 뒤 고향의 철공소에서 일하다 1949년 철도 직원 양성학교를 마치고 일본국유철도(현 JR의 전신)에 들어갔지만 몇 달 만에 해고됐고, 일본전신전화공사 공장에서 일하며 야간 고등학교를 다녀 1952년 니가타시립공업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같은 직장에서 만난 히사코에게 네 번 청혼해 모두 실패했다고 하나, 두 사람은 훗날 결혼했다. 그는 일하는 틈틈이 책을 읽고 영화를 보며 영화잡지에 글을 투고했다.
2012년 인터뷰에서 사토는 영화평론가가 된 계기로 패전 직후 본 미국영화 <봄의 서곡>(1943)을 꼽았다. 그는 대단한 영화는 아니었다고 평하면서도 이를 보고 미국을 '적'으로만 여기던 생각이 흔들렸고, 미국을 알려면 영화가 가장 재미있는 수단이겠다고 판단했다. 당시는 감독이 되려면 일류대학을 나와야 한다는 인식이 당연시되던 때라 대학을 나오지 않은 그는 영화를 만드는 대신 글쓰기를 택했다. 사토는 후에 평론가가 된 이유를 "그저 쓰고 싶었을 뿐"이라 설명했다. 그는 독학과 배움을 다룬 책도 여러 권 냈다. <어떻게 배울 것인가: 새로운 독학의 사상과 방법>(1973), <영화관이 학교였다>(1980), <독학이어서 좋았다: 독서와 나의 인생>(2007) 등이 있다. 또한 전시에 군국소년이었던 자신을 돌아보며 <전쟁은 왜 일어나는가>(1974)와 <풀뿌리 군국주의>(2007)도 썼다.
그가 평론가로 이름을 알린 글은 1954년 8월 철학자 쓰루미 슌스케가 참여한 잡지 <사상의 과학>에 실은 대중영화론 「협객에 대하여」다. 당시 지식인들은 야쿠자 영화에 열광하는 대중을 한탄했지만, 사토는 대중이 협객 같은 인물을 사랑하고 싶어 하기 때문이라고 반박했다. 서민이 고독한 협객에게 반항을 맡기고 책임까지 떠넘기는 데서 뿌리 깊은 허무주의를 읽어낸 그는 대중영화를 저속하다고 내칠 것이 아니라 대중의 무의식적 요구를 읽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영화 내용과 보는 동안 자신에게 일어난 감정을 나란히 적는 글을 썼고, 사토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찍은 데라사키 미즈호 감독은 이에 대해 “동세대 평론가 가운데 영화를 보면서 느낀 감정을 글에 적은 사람은 사토가 처음이었다”고 말했다. 이는 사토 자신이 밝힌 비평관과도 일치한다. 그는 2012년 인터뷰에서 글을 쓸 때는 거의 자신의 생각과 느낌만 쓴다고 했고, 비평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아무도 미리 알아채지 못한 점을 발견하는 일이라고 말했다. 그러려면 선입견을 버리고 감독이 어디 소속이었는지, 영화 밖에서 무엇을 했는지에 얽매이지 말아야 한다고 덧붙였다.
1956년 12월 첫 평론집 <일본의 영화>를 내 키네마 준보상을 받았고, 이듬해 도쿄로 올라가 <영화평론> 편집부에서 일했다. 이후 <영화평론> 편집장을 지냈고, <사상의 과학> 편집에도 참여하며 평론 활동을 이어 갔다. 이 시기 그는 이마무라 쇼헤이, 오시마 나기사, 마스무라 야스조, 하니 스스무 등 새로운 영화를 내놓은 일본 누벨바그 세대 감독들을 평론으로 지지했다. 반면 구로사와 아키라와 미조구치 겐지, 오즈 야스지로는 누가 더 위대한지 따지지 않고 각자 무엇을 그렸는지를 짚었다. 구로사와는 계급사회 속 사무라이를, 미조구치는 상인 문화와 여성의 아름다움을, 오즈는 소시민 문화를 그렸다는 것이다.
1973년부터는 아내 사토 히사코와 개인잡지 <영화사연구>를 펴냈고, 1995년 낸 <일본영화사> 전 4권으로 마이니치출판문화상과 문부대신상(문부대신은 한국의 교육부 장관에 해당)을 받았다. 출판사 소개문에 따르면 이 책은 독자적인 사회사와 대중문화론에 바탕을 둔 첫 일본영화 통사다. 2006~2007년 낸 증보판에는 식민지와 점령지까지 다룬 서술과 1990년 이후의 동향이 보태졌다. 또한 <구로사와 아키라의 세계>(1969), <오즈 야스지로의 예술>(1971), <오시마 나기사의 세계>(1973), <미조구치 겐지의 세계>(1982) 등 감독론도 썼다. 그러나 영어로 번역된 책은 미조구치론 등 소수에 그쳤다.
그는 평론 활동과 함께 영화 관련 단체를 만들고 운영하는 일에도 참여했다. 1959년 쓰루미 등과 함께 대중예술을 연구하는 대중예술연구회를 만들었다. 1969년부터는 영화 평론·보도·출판·제작 종사자들의 단체인 일본영화펜클럽의 대표간사를 1992년까지 맡았고, 일본 국립영화 아카이브의 전신인 도쿄국립근대미술관 필름센터의 운영위원도 2001년까지 지냈다. 1974년에는 영상을 학문으로 연구하는 일본영상학회 창립에 참여했다.
또한 영화 교육에도 관심을 갖고 참여했다. 1975년 이마무라 쇼헤이가 세운 2년제 요코하마방송영화전문학원에 이마무라의 권유로 합류했고, 이 학교는 1985년 3년제 일본영화학교가 돼 가와사키시로 옮겼다. 1996년 4월에는 각본가 이시도 도시로에 이어 일본영화학교 교장이 됐다. 학교에서는 촬영·조명·녹음·미술·편집 현장 전문가들이 실습 중심으로 가르쳤고, 시노다 마사히로와 우라야마 기리오, 구로키 가즈오 같은 감독들이 강단에 섰다. 사토는 영화사 수업을 맡아 대형 스크린으로 명작을 함께 보며 설명했다. 졸업생으로는 미이케 다카시, 모토히로 가쓰유키, 아베 가즈시게 감독 등이 있고, 한국 출신으로는 배우 김응수 등이 있다. 2011년 4월 학교가 4년제 일본영화대학이 되자 그는 초대 학장에 취임해 2017년 3월까지 재직했다.
사토는 아시아 영화에도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는 1991년 문을 연 제1회 아시아포커스·후쿠오카국제영화제의 디렉터를 맡아 2006년 제16회까지 이끌었다. 영화제에서는 일본에 소개되지 않은 아시아 영화와 고전 영화를 소개했고, 한국영화를 일본에 알리는 창구 역할도 했다. 도쿄국제영화제에서는 1989년 국제경쟁 부문 심사위원, 1998년 아시아영화상 심사위원장을 지냈다. 같은 1989년에는 가와키타 가시코를 기리는 가와키타상(영화를 통한 국제교류 공헌에 주는 상)을 아내와 함께 받았다. 아시아 영화를 다룬 책으로는 <아시아영화>(1993)와 <중국영화의 100년>(2006)이 있다.
한국영화와의 인연은 1980년대 초 마닐라영화제에서 임권택의 <만다라>(1981)를 보며 시작됐다. 이듬해 임권택을 만났고, 평론가 이영일을 통해 고전 한국영화를 접했다. 이영일과 함께 <한국영화입문>(1990)을, 임권택론으로 <한국영화의 정신>(2000)을 냈으며, 임권택 영화가 한(恨)을 예(禮)로 끌어올렸다고 평가했다. 김기영 감독의 <하녀>(1960)가 일본에 처음 소개된 것은 1996년 국제교류기금이 마련한 상영회였다. 2012년 인터뷰에 따르면 사토는 <하녀>를 보고 일본에서 김기영 회고전을 열자고 제안했다. 김기영은 처음에는 상영을 허락했다가 일본 유학 시절 차별받은 기억이 떠올랐다며 거부했지만, 사토가 도쿄에서 직접 만나 설득했다. 도쿄 상영 때 김기영은 영화 이야기를 하는 대신 관객 사인회를 열었다.
일본 안팎의 평가도 이어졌다. 1986년 야마지 후미코 영화문화상을 받았고, 1996년 학술·예술 공로자에게 주는 자수포장을, 2002년 일본 정부의 훈4등 욱일소수장을 받았다. 같은 해 한국 정부로부터는 문화훈장을 받았다. 프랑스 정부는 2003년 예술문화훈장 슈발리에를 수여했고, 2010년에는 국제교류기금상을, 2016년에는 국제영화TV학교연맹(CILECT)이 주는 '베스트 티칭 어워드'를 받았다.
사토는 2017년 3월 학장에서 물러난 뒤 일본영화대학 명예학장으로 있었다. 2022년 2월에는 일본 영화 전문지 <키네마 준보>의 특별상을 받았고, 같은 해 3월 17일 병환 끝에 숨졌다. 장례는 고인의 뜻에 따라 가족과 가까운 친지만 모여 치렀고, 12월에는 유고 <영화는 아이들을 어떻게 그려 왔나>(2022)가 이와나미서점에서 나왔다.
지난해 10월에는 그의 삶을 다룬 다큐멘터리 <사토 다다오, 영화의 여행>(2025)이 도쿄국제영화제에서 세계 최초로 공개됐고, 11월 일본 극장에서 개봉했다. 사토의 제자이기도 한 데라사키 감독이 2019년부터 2024년 9월까지 찍은 이 영화는 사토가 가장 좋아한 영화로 꼽았던 인도 케랄라주 영화 <쿠마티>(1979)의 흔적을 좇아 한국과 인도를 찾아간다. <쿠마티>는 말라얄람어로 만든 아동영화로, 2021년 마틴 스코세이지의 필름 파운데이션이 복원했다. 데라사키 감독은 영화 공식 소개에서 사토에게 깊은 흥미를 느꼈다며, 사토가 평생 지닌 반골 정신과 열정, 호기심, 담력이 그 힘의 원천이었다고 밝혔다. 한국에서는 사토가 일본에 소개해 온 임권택 감독과 부산국제영화제 초대 집행위원장이자 이사장을 지낸 김동호도 인터뷰했다. 올해는 가와사키시와 일본영화대학이 공동 주최하는 제32회 가와사키 신유리 영화제(10월 24일~11월 3일)에서도 상영된다. 24일 오후 4시 45분 상영 뒤에는 일본영화대학 후지타 나오야 부교수의 영화 비평 강좌가, 11월 1일 상영 뒤에는 데라사키 감독과의 대화가 마련된다.
국내에서는 <일본영화이야기>(1993), <우리시대의 10대에게>(1998), <한국영화와 임권택>(2000), <일본대중문화의 원상>(2004), <소년병, 평화의 길을 열다>(2007) 등 사토의 책이 번역·출간됐다. 이 가운데 <소년병, 평화의 길을 열다>는 앞서 소개한 <전쟁은 왜 일어나는가>의 한국어판으로, 소년병으로 패전을 맞은 경험을 바탕으로 전쟁의 원인을 짚었다. 사토의 글이 실린 공저 <오시마 나기사의 세계>(2003)도 나와 있다.
※ 기사 내용 중 등장하는 사토 다다오 인터뷰는 네이버 블로그 홍준호의 '바라본다!!!!!' 중 佐藤 忠男 X 洪晙豪 : 영화평론가 사토 타다오와의 인터뷰 Pt.1, 2를 인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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