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북한군 포로 송환 문제를 둘러싼 한국 정부의 대응은 생각해 볼 대목을 제공한다. 한국 정부와 우크라이나 정부 사이에 비공개로 유지하기로 했던 사안이 외부에 공개되자 정부는 현지 대사를 송환하는 강경한 외교적 대응에 나섰다. 국가 간 신뢰를 저버린 행위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 것 자체는 정당하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되짚어봐야 할 점은 외교적 기준의 일관성이다. 만약 상대가 미국이나 중국이었다면 우리는 과연 동일한 수준의 강경하고 당당한 태도를 보였을까. 혹여 미국이나 중국에는 지나치게 조심스럽고 우크라이나에는 과감하다면 그것은 주체적 외교가 아니라 상대의 힘에 따라 태도를 달리하는 외교에 불과하다.
자주외교란 특정 국가에 대한 적대나 거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강대국이든 아니든 한국의 국익이라는 동일한 기준으로 관계를 설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최근 이재명 대통령은 국무회의에서 "국가 간 관계에 있어 굴종적 태도나 사대적 태도를 지양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대한민국의 외교 방침은 실용적 국익 외교"라고 밝혔다. 또한 "한·미 동맹은 매우 중요하며 외교의 축"이지만 동시에 주변 강국들과의 관계 관리 역시 중요하다고 언급했다. 이 발언은 현재 대한민국이 직면한 외교적 과제를 정확하게 보여준다. 한·미 동맹은 대한민국 안보의 핵심 축이며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발전시켜야 할 대상이다. 그러나 동맹을 중시하는 것과 외교적 자율성을 포기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동맹이 국익을 위한 수단이라면 국익은 결코 동맹 자체에 종속될 수 없다. 진정한 동맹은 자신의 의견과 국익을 분명히 말할 수 있을 때 더욱 건강해진다.
돌이켜보면 우리 역사는 한반도의 방향을 스스로 결정하지 못했던 역사이기도 하다. 조선 말기 열강의 각축 속에서 국권을 상실했고, 광복 이후에는 강대국들의 이해관계 속에서 분단이 결정되었다. 한국전쟁의 휴전 역시 우리 스스로 결정하지 못했다. 한반도의 운명이 논의되는 동안 정작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의 의사는 뒷전으로 밀려난 경우가 적지 않았다. 지난 30년을 돌아보아도 크게 다르지 않다. 1994년 제네바 합의에서부터 2005년 9·19 공동성명, 그리고 2018년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에 이르기까지 한반도의 중대한 국면마다 우리는 핵심 당사자였지만 언제나 협상의 중심에 서 있지 못했다. 한반도를 둘러싼 작금의 국제 정세 또한 한국의 위치와 역할에 대한 근본적 질문을 새롭게 던지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에 대해 강경한 압박을 유지하면서도 대화 가능성을 열어두려는 신호를 보내고 있다. 북한은 미사일 발사와 핵능력 고도화를 통해 협상력을 높이며 미국과의 직접 대화를 모색하고 있다. 문제는 북·미 대화가 재개될 경우 그 과정에서 한국의 공간이 얼마나 남아 있는가 하는 점이다. 김정은 정권은 이미 '적대적 두 국가' 노선을 천명했다. 새로운 북·미 대화가 시작된다면 북한은 더욱 노골적으로 한국을 배제하려 할 가능성이 크다. 한반도의 운명을 논의하는 자리에서 한국은 왜 항상 중심에 있지 못하는가. 또다시 결과만 기다리는 처지가 되어야만 하는가. 반복되는 '코리아 패싱' 우려를 결코 가볍게 보아서는 안 된다.
한국은 어떤 선택을 해야 하나. 첫째, 향후 북·미 대화가 재개될 경우 한국은 단순한 관찰자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북한이 한국과의 대화를 거부한다고 해서 한국까지 스스로 역할을 포기할 이유는 없다. 평화 체제 구축이든, 군사적 긴장 완화든 한국이 스스로 의제를 개발하고 국제사회에 제시해야 한다. 한반도의 미래에 대한 청사진을 가장 먼저 제시할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둘째, 북한의 '적대적 두 국가' 노선을 냉철한 현실로 받아들여야 한다. 감정도 이념도 아닌 철저한 국익의 관점에서 북한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 국익 중심의 대북정책은 북한에 대한 무조건적 양보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무조건적 적대도 아니다. 군사적 억제력을 유지하는 동시에 대화의 통로를 열어두고, 협력할 때 협력하면서도 필요한 경우 단호하게 대응하는 실용주의가 요구된다. 북한의 노선 변화가 대한민국의 대북정책 포기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인도적 지원, 재난 협력, 이산가족 문제, 환경 협력 등 교류와 협력의 가능성을 꾸준히 모색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북한의 태도 변화만 기다리는 수동적 접근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셋째, 주변국과 균형 있는 관계 관리가 필요하다. 현재 한반도 정세는 한·미·일 대 북·중·러의 대립 구도로 설명되는 경향이 강하다. 그러나 지정학적으로 한국은 특정 진영에만 자신을 가둘 수 없는 나라다. 미국과 동맹을 강화하면서도 중국·러시아와 소통하는 공간 역시 유지해야 한다. 그래야 한반도 문제에서 외교적 선택지가 넓어진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우리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이 필요하다. 세계 10위권의 경제력과 세계 상위권의 군사력을 가진 나라가 외교에서 늘 누군가의 결정만 기다리는 수동적 존재로 남아 있을 이유가 없다. 한국은 미국과 협력하고 중국·러시아와 소통하며 일본과도 경쟁과 협력을 병행할 수 있는 충분한 역량을 갖고 있다. 중요한 것은 어느 한 나라의 입장에 자신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국익을 중심에 놓고 관계를 재설정하는 일이다. 국익 중심의 자주외교는 외교 영역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국가 주권과 직결된 안보 문제에도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한다.
최근 브런슨 주한미군사령관은 전시작전통제권 전환과 관련해 안보 환경 변화와 계획 변경을 언급했다. 그러나 북한의 군사적 위협과 안보 환경의 불확실성은 전작권 전환 논의가 처음 시작될 때부터 존재했던 조건이었다. 안보 환경 변화를 이유로 전환을 계속 연기한다면 전작권 전환은 사실상 무기한 미뤄질 수밖에 없다. 정부는 어떤 압력이 오더라도 현재 기조를 지켜 국가 주권의 관점에서 전작권 환수 의지에 흔들림이 없어야 한다. 자주외교의 진정한 기준은 상대의 힘이 아니라 우리의 국익이다. 상대가 강대국이든 중소국이든 대한민국의 이익과 원칙에 따라 당당하게 말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한반도 문제의 진정한 주체가 될 수 있다. 주변 강국들의 이해관계가 아무리 복잡하게 얽혀 있더라도 대한민국이 스스로 방향을 정하지 못한다면 한반도의 미래 역시 남이 결정하게 될 것이다. 조수석에 앉아서는 목적지에 도달할 수 없다.
미국과 거리를 두자는 주장이 아니다. 동맹은 존중하되 국가 주권과 핵심 국익이 걸린 문제에서는 당당하게 우리의 입장을 관철하자는 것이다. 동맹의 중요성과 외교적 종속은 결코 같은 의미가 아니다. 진정한 동맹은 상대방의 입장에 일방적으로 따라가는 관계가 아니라 서로의 국익을 존중하는 관계다. 국익에 따라 협력할 것은 협력하고 필요하면 다른 의견도 제시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자주외교의 출발점이며, 실용외교의 완성이다. 한반도의 주인은 대한민국이다.
필진 주요 이력
▷독일 브레멘대학 세계경제연구소 연구원 ▷통일연구원 북한경제연구센터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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