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승호의 일.고.감] 세계에 오즈·구로사와 알린 '일본 영화의 어머니', 가와키타 가시코

  • 비서로 시작해 세계 명작 1500편 수입…베네치아 석권 이끈 '마담 카와키타'

  • 국립 필름 아카이브 초석 다지고 에키프 드 시네마 주도…한국영상자료원엔 식민지기 사료 지원

전후 일본 영화의 해외 진출을 이끌고 필름 아카이브의 기틀을 다진 가와키타 가시코 1961년 영화 전문지 키네마 준보에 게재된 모습사진위키미디어 커먼즈
전후 일본 영화의 해외 진출을 이끌고 필름 아카이브의 기틀을 다진 가와키타 가시코. 1961년 영화 전문지 '키네마 준보'에 게재된 모습[사진=위키미디어 커먼즈]

세계 영화계에서 '마담 카와키타(Madame Kawakita)'로 불렸던 가와키타 가시코(川喜多かしこ, 1908~1993) 전 가와키타기념영화문화재단 이사장은 일본 영화의 황금기를 세계 무대에 알리고 공공 아카이브의 초석을 다진 전후 일본 영화계의 대표적 인물이다. 그는 남편 가와키타 나가마사와 함께 영화 수입·배급사 도와상사(현 도호도와)를 이끌며 전 세계 명작 1500여 편을 일본에 소개했고, 동시에 구로사와 아키라, 미조구치 겐지, 오즈 야스지로의 대표작들을 유럽 3대 영화제에 선보이며 전후 일본 영화의 국제적 위상을 다졌다. 나아가 일본에 국립 필름 아카이브를 세우는 산파 역할을 도맡았으며, 숨겨진 세계 예술영화를 발굴해 상영하는 '에키프 드 시네마' 운동을 이끌었다. 1993년 여든다섯에 세상을 떠난 뒤에도 그의 이름과 정신은 공익재단법인 가와키타기념영화문화재단과 가와키타상을 통해 이어지고 있다.

1908년 3월 21일 오사카에서 태어난 그는 생후 백일 무렵 아버지를 따라 도쿄로 거처를 옮겼고, 이후 요코하마와 당시 일본의 조차지였던 중국 다롄, 아키타 등을 거치며 자랐다. 1921년 요코하마에 있던 조부의 집으로 돌아와 기독교계 여학교인 페리스여학교(현 페리스여학원)에 입학했다. 1923년 간토대지진으로 아버지를 여의고 잠시 고베로 피난을 떠나기도 했으나 곧 복학해 학업을 마쳤다. 영어에 능통하고 서양 문화에 밝았던 그는 학교를 졸업한 뒤 1929년 1월, 갓 설립된 도와상사에 영어 타이피스트 겸 비서로 입사했다. 당시 결혼 전 본명은 다케우치 가시코였다. 그에게 맡겨진 첫 업무는 사장 나가마사가 유럽 수출을 추진하던 미조구치 겐지 감독의 초기 무성영화 <광련의 여스승>(1926) 시놉시스를 영어로 번역하는 일이었다.

가시코는 회사 설립자인 나가마사와 영화에 대한 열정과 문화적 안목을 공유하며 빠르게 가까워졌다. 1929년 가을에는 결혼을 통해 평생의 영화적 동지가 됐다. 부부의 영화 수입 사업은 1932년 떠난 유럽 출장에서 전환점을 맞았다. 남편 나가마사는 파리와 베를린을 돌며 영화를 둘러보던 중 아내에게 "신혼여행 선물"이라며 마음에 드는 작품 한 편의 구매 권한을 넘겼다. 가시코가 주저 없이 선택한 작품은 독일 여성 감독 레온틴 사간의 데뷔작 <제복의 처녀>(1931)였고 이는 파격적인 소재와 뛰어난 연출로 1933년 일본 개봉 직후 폭발적인 화제를 모았다. 이 작품은 그해 영화 전문지 키네마 준보가 선정한 외국영화 베스트 10 부문 1위에 올랐고, 도와상사의 재정적 기반을 단숨에 다지는 계기가 됐다.

가시코의 뛰어난 작품 선별 안목은 이후에도 이어졌다. 르네 클레르 감독의 풍자 희극 <자유를 우리에게>(1931)를 비롯해 줄리앙 뒤비비에 감독이 연출하고 장 가뱅이 주연한 프랑스 영화 <망향>(1937), 장 르누아르 감독이 막심 고리키의 희곡을 영화화한 <밑바닥>(1936), 베를린 올림픽의 역동성을 담아낸 레니 리펜슈탈의 다큐멘터리 <민족의 제전>(1938) 등 유럽 명작들이 그의 손을 거쳐 1930년대 일본 관객과 만났다. 전쟁이 끝난 뒤인 1953년, 15년 만에 다시 유럽을 방문한 자리에서도 그는 르네 클레망 감독의 반전 영화 <금지된 장난>(1952)을 들여왔다. 전쟁의 참상을 두 아이의 순수한 시선으로 포착한 이 작품 역시 1953년 키네마 준보 외국영화 부문 1위를 차지하며 전후 일본 사회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가와키타 가시코의 적극적인 해외 소통과 지원에 힘입어 1951년 베네치아국제영화제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영화 라쇼몽1950의 한 장면사진위키미디어 커먼즈
가와키타 가시코의 적극적인 해외 소통과 지원에 힘입어 1951년 베네치아국제영화제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영화 <라쇼몽>(1950)의 한 장면.[사진=위키미디어 커먼즈]

또한 그는 패전 이후 국제사회에서 고립돼 있던 일본의 영화와 예술가들을 해외 무대의 중심으로 이끌어냈다. 구로사와 아키라의 <라쇼몽>(1950)이 1951년 베네치아국제영화제에 출품돼 최고상인 황금사자상을 수상하는 과정에서 그는 해외 영화 관계자들과의 소통을 도맡았고, 이는 전후 일본 영화가 세계의 주목을 받는 결정적 신호탄이 됐다. 이어 미조구치 겐지의 <오하루의 일생>(1952)과 <우게쓰 이야기>(1953), <산쇼다유>(1954)가 베네치아에서 3년 연속 은사자상과 국제영화비평가연맹상을 잇달아 거머쥐는 데도 가시코의 국제적 네트워크가 든든한 뒷받침이 됐다. 아울러 프랑스 영화비평가들과 시네마테크 관계자들에게 오즈 야스지로의 정갈한 미학을 끈질기게 소개해 '세계적인 거장 오즈'의 재발견을 이끌어낸 것도 그였다.

국제 영화제에 참석할 때마다 보라색 기모노를 즐겨 입었던 그는 프랑스어와 영어, 독일어를 자유롭게 구사하며 칸, 베네치아, 베를린 등 세계 유수 영화제의 심사위원으로 활약했다. 프랑스 시네마테크 프랑세즈를 세운 전설적 아카비스트 앙리 랑글루아를 비롯해 프랑수아 트뤼포, 장뤼크 고다르 등 누벨바그 감독들과도 깊은 친분을 맺었다. 세계 영화인들은 그를 '마담 카와키타'라 부르며 일본 영화계의 공식 대표이자 훌륭한 조언자로 예우했다. 

가시코는 일 년에 300편이 넘는 영화를 꾸준히 보았으며, 자신의 개인 시사실에 무명의 젊은 감독이나 신진 영화 연구자들을 초대해 해외 최신 영화와 고전 필름을 무료로 관람하고 토론할 수 있도록 아낌없이 지원했다. 1960년대에 접어들며 그의 시선은 영화 배급을 넘어 필름의 보존과 아카이브 구축이라는 공적 영역으로 확장됐다. 당시 일본은 세계적인 영화 강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제작사들이 흥행이 끝난 필름을 폐기하거나 방치해 대부분이 소실될 위기에 놓여 있었다. 이에 그는 1960년 영화계 인사들을 규합해 필름 아카이브 설립 지원을 위한 '필름 라이브러리 조성협의회'를 결성했다. 당시 일본영화제작자연맹 회장이자 영화사 다이에이의 사장이었던 나가타 마사이치를 설득해 협의회 회장으로 앉히고, 본인은 실무를 총괄하는 전무이사를 맡아 정부와 국회를 상대로 국립 필름 아카이브 설립의 필요성을 끈질기게 설득했다.

그의 노력은 1963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대규모 일본영화 회고전으로 결실을 맺었다.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와 공동으로 주최한 이 회고전에서 일본 고전 명작들이 대대적으로 상영됐고, 행사가 끝난 뒤 회고전에 쓰였던 131편의 35mm 프린트 필름은 도쿄국립근대미술관에 통째로 기증됐다. 이 기증 필름들은 훗날 도쿄국립근대미술관 필름센터(현 국립영화아카이브)가 탄생하는 모태이자 핵심 소장품이 됐다.

1970년대에는 도쿄 진보초에 위치한 복합 문화공간 이와나미홀의 총지배인 다카노 에쓰코와 손을 잡았다. 당시 대형 상업영화 배급망에 밀려 일반 극장에 걸리지 못하던 세계 각국의 우수한 예술영화와 독립영화를 소개하기 위해 1974년 비영리 영화 상영 운동체인 '에키프 드 시네마(영화의 동료들)'를 출범시켰다. 인도, 아시아, 동유럽, 중남미, 아프리카 등 변방의 걸작들을 발굴해 장기 상영하며 일본 내 예술영화 전용관 문화의 효시를 열었다. 인도 사티야지트 레이 감독의 <아푸 3부작>을 비롯해 평소 접하기 어려웠던 제3세계 영화들이 이 운동을 통해 일본 관객들에게 선보였다.

1981년 5월 평생의 동반자였던 남편 나가마사가 일흔여덟을 일기로 세상을 떠나자, 가시코는 남편의 유지를 받들어 1982년 사재를 출연해 공익재단법인 가와키타기념영화문화재단을 설립했다. 초대 이사장에 취임한 그는 일본 영화 예술 발전에 큰 족적을 남긴 영화인과 연구자, 해외 단체를 기리고자 '가와키타상'을 제정했다. 오늘날 이 상은 일본 영화계에서 가장 명예로운 문화상 중 하나로 꼽힌다. 
 
가와키타 가시코·나가마사 부부가 살았던 옛 가마쿠라 저택 터와 기증 자료를 바탕으로 2010년 개관한 가마쿠라시 가와키타 영화기념관 전경사진위키미디어 커먼즈
가와키타 가시코·나가마사 부부가 살았던 옛 가마쿠라 저택 터와 기증 자료를 바탕으로 2010년 개관한 가마쿠라시 가와키타 영화기념관 전경[사진=위키미디어 커먼즈]

1993년 7월 27일 가시코가 세상을 떠나자, 유족들은 부부가 살았던 가나가와현 가마쿠라의 저택 터와 방대한 영화 자료들을 가마쿠라시에 기증했다. 탄생 100주년을 맞은 2008년 도쿄국립근대미술관 필름센터에서 대규모 기념 특별전 '가와키타 가시코전'이 열렸다. 2010년에는 기증된 옛 저택 터에 '가마쿠라시 가와키타 영화기념관'이 정식 개관했다. 기념관은 부부가 남긴 귀중한 영화 사료 기획전과 고전 명작 상영회, 영화 문화 강좌 등을 꾸준히 열며 영화 애호가와 시민들의 발길을 모으고 있다.

가와키타기념영화문화재단은 한국 영화의 잃어버린 사료를 복원하는 과정에서도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930~40년대 식민지 조선의 극영화들은 해방과 한국전쟁을 거치며 필름과 관련 기록 대부분이 유실된 상태였다. 흩어진 역사의 조각을 맞추던 한국영상자료원에 선뜻 손을 내민 곳이 바로 가와키타재단이었다. 재단은 소장 중이던 <수업료>(1940), <집없는 천사>(1941), <복지만리>(1941) 등의 희귀 원본 포스터와 촬영 스틸 사진을 무상으로 복제해 제공하며 초기 사료 발굴의 든든한 밑거름을 놓아주었다. 나아가 한국 영화를 세계에 알려 온 영국 평론가 토니 레인즈가 2004년 제22회 가와키타상을 수상하는 등, 재단은 오늘날까지도 한국 영화계와 뜻깊은 인연을 이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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