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유가 상승으로 석유화학의 핵심 원재료인 나프타 가격이 다시 상승세를 그리는 가운데 국내 석화 업계가 담합 의혹에 따른 검찰 수사라는 암초에 부딪쳤다. 대내외적 악재가 지속되면서 국내 주요 석화 기업들이 스페셜티(고부가 제품) 전환 원동력을 상실하고 생존을 위한 골든타임마저 놓치게 될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21일 업계에 따르면 석화 핵심 원자재인 나프타의 가격은 9월 넷째 주 기준 t당 927달러로 전달 대비 17%가량 높아진 가격에 거래되고 있다. 미국·이란과 사우디아라비아·예멘 후티반군의 분쟁이 확대되면서 국제 유가가 상승한 게 그대로 반영된 것이다.
올 상반기 정부는 석화 공급망 안정화를 위해 나프타 수입단가 보조금 정책을 펼쳤지만 시장 상황이 안정됨에 따라 6월 말 연장 없이 종료했다. 높은 에틸렌 정제마진과 보조금 덕에 1분기 흑자전환과 2분기 안정적인 흑자 기조를 이어가던 석화 업체들이지만 3분기 흑자 폭 감소나 적자 전환은 불가피하다는 평가다.
이런 상황에서 PKC·OCI·LG화학·한화솔루션·애경케미칼·롯데정밀화학·유니드 등 국내 주요 석화 업체들은 대규모 가격 담합 의혹으로 검찰 수사를 받고 있다. 현재 서울중앙지검은 이들 7개 업체가 수년간 폴리염화비닐(PVC)과 가소제, 가성소다, 염산 등 8개 석유화학제품의 가격 인상 시기와 폭을 사전에 협의한 것으로 보고 수사를 진행하고 있다. 지난 18일 전·현직 경영진 8명에 대한 구속영장을 신청했고 법원이 이 가운데 2명에 대한 구속영장을 발부했다.
검찰이 15조원 규모로 추산한 이번 담합 사건에서 가장 주목하는 제품은 PVC와 가성소다다. 국내 PVC 시장은 한화솔루션과 LG화학이 양분하고 있고, 가성소다는 한화솔루션, LG화학, 롯데정밀화학, PKC, OCI 등이 관련 사업을 전개하고 있다. 석화 구조조정에 대규모 자원을 투입하는 한화솔루션과 LG화학 입장에선 이번 수사가 큰 부담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
이덕환 서강대 화학과 명예교수는 "불법을 저질렀으면 수사를 받아야 하는 것은 맞지만 현재 석화 산업이 처한 상황이 너무 어렵다"며 "공정거래법의 잣대를 엄격하게 들이밀면 정부가 구상한 석화 산업재편과 구조조정도 불가능해질 우려가 큰 만큼 일본의 사례를 벤치마킹해 석화 구조조정 시에는 법의 엄격한 잣대를 느슨하게 풀어줄 필요성이 있다"고 말했다.
석화 업계에선 상품 차별화가 어려운 범용 석화 제품의 특성상 경쟁사의 가격 변동에 민감하게 반응한 것이지 구체적인 담합 행위로 보기 어렵다는 지적도 나온다. 석화 시장은 대규모 설비투자가 필요해 신규 업체 진입이 어려운 과점시장인 만큼 경쟁사 추종에 따른 묵시적 담합이 일어날 공산이 크다. 업체 간 명시적 합의나 의사 연락을 입증하는 데 상당한 어려움이 따를 것이란 분석이다.
현행 공정거래법은 담합이 인정될 경우 관련 매출액의 최대 20%까지 과징금으로 부과할 수 있다. 석화 업체들이 중국·중동발 공급과잉에 대응하기 위해 적자 상황 속에서도 설비 감축과 사업 재편 스페셜티 전환에 대규모 자금을 투입할 계획이지만, 정부의 조 단위 과징금이 부과되면 관련 행보가 사실상 올스톱될 위기에 처하게 된다.
한국신용평가는 국내 주요 석화업체 8곳의 스페셜티 전환 수준을 평가한 결과 5점 만점에 약 2.1점을 받아 업계 전반의 대응이 아직 미흡하다고 평가했다. LG화학만이 유일하게 스페셜티 매출 비중이 50%에 근접하며 양호한 수준을 보였다.
이에 재계에선 정부의 압박과 실적 악화를 견디지 못한 석화 업체들이 스페셜티 전환을 포기하고 사업부 매각과 같은 출구(엑시트) 전략으로 선회할 가능성에 대해 우려하고 있다. 유럽 석화 업체를 잇달아 인수한 중국과 중동 정유사·석화 업체들이 한국 석화 업체 인수에도 나설 수 있다는 분석이다.
재계 관계자는 "이미 다수의 기업 집단이 석화 사업에 대한 출구 전략을 수립한 것으로 안다"며 "신규 투자를 중단하고 인적·물적 자원이 노후화돼 자연 은퇴를 유도한 후 부동산 개발과 같은 신사업으로 주력 사업을 변경한다는 구상"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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