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보다 더 된 것 같아요. 제가 국민학교 5학년 때 일어난 일인데, 그 당시 부모님도 그렇고 온 나라가 슬픔에 젖었던 기억이 있어요. 그 묘한 슬픔이 계속 제 안에 각인돼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이 이야기를 한번 영화로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죠."
실제 사건을 영화로 옮기는 데에는 방대한 자료 조사가 뒤따랐다. 이미 방송과 다큐멘터리, 각종 콘텐츠를 통해 여러 차례 다뤄진 사건인 만큼 허 감독 역시 다양한 기록을 찾아보며 이야기를 구축해갔다.
"방송에서도 오랫동안 다뤄왔던 이야기이고 다큐멘터리를 본 사람들도 여러 의문을 품었던 사건이잖아요. 유튜브에서도 계속 재생산됐고요. 저도 시나리오를 본 뒤 자료 화면들을 많이 찾아봤고 일본에서 나온 자료들도 보면서 조금씩 이야기를 만들어갔어요. 책이나 사건을 다룬 논문들도 많이 봤고요. 너무 오래된 이야기라 직접 취재를 하기에는 한계가 있었어요."
"실제 있었던 사건을 모티브로 영화화하려면 영화적인 장치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형사 철구와 기자 재환, 영일 같은 인물들을 두고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해보면 어떨까 했어요. 70년대는 굉장히 억압된 시기였고, 제가 어른이 돼서 돌아봤을 때도 사회적인 폭력이 지배했던 시기라고 느꼈어요. 그런 부분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던 것 같아요."
영화는 사건의 진실을 하나의 결론으로 규정하기보다 그것을 좇는 사람들에게 시선을 둔다. 감독 역시 자신이 가진 자료만으로 사건의 실체를 단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이 이야기는 태생부터 제가 결론을 낼 수 있는 이야기는 아니었던 것 같아요. 자료나 사실을 보면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는 지점은 많았지만, 그것만으로 '무엇이다'라고 결론을 내릴 수는 없었어요. 그런 한계를 가지고 시작했죠. 그렇다면 이 이야기를 왜 해야 하나 생각했을 때 그 시대를 정말 뜨겁게 살았던 각각의 사람들을 이야기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과정에서 '암살자(들)'은 허진호 감독의 전작들보다 한층 뜨거운 감정으로 치닫는다. 거대한 압력 앞에서 동료들과 함께 저항하는 인물들의 모습은 감독 자신에게도 다소 낯선 온도였다.
"상황이 그렇게 만든 게 아닐까 싶어요. 같이 일하는 동료들과 거대한 외부의 압력에 저항하는 모습에서는 온도가 뜨거워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어요. 찍으면서도 '이렇게까지 뜨겁게 찍어야 하나' 싶은 장면들이 있었고 저한테는 낯선 부분이었어요. 그런 감정을 표현하는 데 익숙한 편은 아니었지만 그 시기의 뜨거움을 표현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작품을 관통하는 단어는 결국 '진실'이다. 다만 허 감독에게 진실은 하나의 답을 제시하는 개념이라기보다, 각자의 위치에서 의문을 품고 끝내 확인하려 움직이는 사람들의 태도에 가까웠다.
"철구와 재환, 영일이 각각 자기 자리에서 진실을 찾는 이야기라고 생각했어요. 철구는 국가 공무원이고 국가에 대한 충성심이 높은 사람이지만 사건 안에서 불합리함과 의문을 마주하죠. 기자들은 또 자기 직업 안에서 다른 방식으로 움직이고요. 진실이라는 건 굉장히 어려운 단어지만, 몇 가지 주어진 기본적인 사실은 있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그것까지 은폐하려고 할 때 이 사람들이 뜨겁게 움직이는 거고요. 그런 시대정신이 지금에는 어떤 질문을 던질까 생각했어요."
50여 년 전의 사건을 지금 다시 꺼낸 이유도 여기에 있다. 무엇을 진실로 받아들일 것인지는 시대가 달라져도 여전히 유효한 질문이라고 봤다.
"지금도 어떤 일이 있을 때 사람들이 그것을 대하는 방식에서 '무엇이 진실인가'라는 질문은 유효하다고 생각해요. 누구나 자기가 가진 선입견이나 속한 집단에 따라서 편향될 수밖에 없잖아요. 그럼에도 어떤 진실은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그 시대 사람들이 진실을 찾으려고 했던 모습이 지금 또 다른 질문을 만들 수 있다고 봤어요."
실제 역사와 영화적 상상력이 만나는 작품인 만큼 어디까지 사실이고 어디부터 허구인지를 구분하는 문제도 중요했다. 허 감독은 자신이 정답을 제시하기보다 영화가 던진 사실과 기록을 관객이 직접 비교하고 판단하기를 바랐다.
"다큐멘터리나 책, 논문을 기반으로 가져간 부분이 있는 건 맞아요. 거기에 영화적 상상력을 더한 부분도 있고요. 무엇이 정확히 '이것이다'라고 제가 말할 수 있는 영역은 아닌 것 같아요. 사실들을 던져놓고 실제 역사적 사실과 비교하면서 판단하는 건 관객의 몫이라고 생각해요. 영화를 보고 다시 당시 다큐멘터리나 자료를 찾아보시면 더 재미있게 보실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역사적 사실을 다룰 때 허 감독이 가장 먼저 세우는 원칙 역시 '충분히 아는 것'이다. 상상력으로 채울 수 있는 영역에도 결국 근거가 필요하다는 생각에서다.
"역사적 사실을 다룰 때는 많이 고민하게 되는 것 같아요. 우선 알아야겠죠. 사실을 충분히 알고 나서 그것을 어떻게 영화화할지를 고민해야 해요. 모든 것을 상상력만으로 만들 수는 없잖아요. 상상력에도 베이스가 되는 자료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그런 것들을 많이 찾으려고 했어요. 이 작품이 오래 걸린 데에는 그런 어려움도 있었던 것 같아요."
철구와 재환, 영일까지 세 인물의 캐스팅에는 각 배우의 이미지와 성격이 맞닿아 있었다. 허 감독은 유해진의 틀에 갇히지 않는 연기에서 철구의 뜨거움을, 박해일의 과묵함과 신뢰감에서는 재환의 모습을 봤고, 이민호에게서는 신입 기자 영일의 열정과 현실적인 얼굴을 기대했다.
"유해진 배우는 어떤 틀에 갇히지 않고 현장에서 자기 감정을 가지고 연기하는 점이 철구의 열정적인 모습과 접점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박해일 배우는 과묵함과 디테일, 논리적이고 신뢰를 주는 모습이 재환과 잘 맞았고요. 영일은 신입 기자의 열정과 좌충우돌하는 면, 자기 신념에 대한 강한 믿음이 필요한 인물이었는데 이민호 배우가 조금 더 현실적인 모습으로 표현됐을 때 재미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영화에는 엄태웅, 배성우, 오달수, 정우성, 박성훈 등 사회적 논란을 겪었던 배우들이 조·단역으로 대거 등장한다. 캐스팅을 둘러싼 우려와 시선 역시 피하기 어려운 지점이었다.
"굉장히 많이 고민했어요. 영화의 캐릭터와 작품 안에서 어떤 인물이 필요할지를 두고 고민한 결과였어요. 그런 캐스팅에 대한 비판이나 우려가 있을 수 있다는 점도 저희가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신이 많지 않은 역할을 맡은 배우들과도 두세 차례 만나서 캐릭터에 대해 이야기했어요. 그냥 흘러 지나갈 수 없는 인물들이 나와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 과정에서 여러 고민을 했습니다."
익숙한 배우들이 연이어 등장하면서 관객의 시선이 이야기보다 배우 자체에 머물 수 있다는 점도 염두에 뒀다. 그럼에도 짧은 등장만으로 작품의 무게를 잡아야 하는 역할에는 그만한 힘을 가진 배우가 필요했다고 봤다.
"저도 영화를 볼 때 카메오가 나오면 그 인물에게 집중하느라 이야기를 놓치는 경우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어떤 역할은 영화 안에서 무게 중심이 될 수 있는 배우가 필요하다고 봤고요. 예상보다 많은 배우들이 참여해주셔서 저도 놀랐어요. 첫 기술 시사를 볼 때는 개인적으로 '배우들 보는 맛이 있네'라는 생각도 했습니다."
'암살자(들)'을 완성한 뒤 허진호 감독의 관심은 다시 일상의 이야기로 향하고 있다. 과거 자신의 작품을 답습하기보다 지금 자신이 바라보는 세상과 맞닿은 이야기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다.
"예전에 제가 만들었던 영화가 왜 좋은 평가를 받았을까 다시 보고 그대로 한번 만들어보자고 해서 답이 나오지는 않는다고 생각해요. 저도 변했을 거고 지금 제가 세상을 보는 시선이 지금의 저라고 생각해요. 물론 완전히 변하지 않은 부분도 있겠죠. 그래서 예전에 만들었던 영화들처럼 조금 더 일상적인 이야기도 만들어보고 싶어요. 요즘 관객들과 어떤 접점이 생길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대본도 준비하고 있습니다."
허 감독은 '암살자(들)'을 통해 하나의 명확한 메시지를 전달하기보다 관객에게 질문을 남기고 싶었다.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을 바라보고, 그들이 무엇을 좇았는지를 생각해보는 것만으로도 영화가 할 수 있는 역할은 충분하다고 봤다.
"제가 언제나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영화를 만드는 건 아니에요. 이번 영화도 질문을 던졌다고 생각해요. 이 시기에 이 영화를 보고 어떤 메시지를 느낄지는 관객의 몫이라고 봐요. 관객들이 영화를 본 뒤 '그 시대는 이랬고, 저 시대에 저런 사람들이 있었구나'라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영화가 할 수 있는 몫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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