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는 '왜 숏폼인가'라는 질문 자체가 저를 조금 구속하는 느낌이 있었어요. 숏폼이든 영화든 시리즈든, 저는 결국 같은 이야기를 다른 방식으로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거든요. 형식과 포맷이 세로냐 가로냐는 외형적인 형식에 가까운 것이고, 그 안에 어떤 내용을 담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봤어요. 결국 '아버지의 집밥'은 우리 삶의 가장 기초 단위인 가족, 그 뻔한 관계에서 나오는 아주 익숙한 감정의 총합이에요. 나이 든 부부의 성숙기, 그 안에 있는 아들, 며느리, 손녀가 밥을 매개로 진심을 나누는 이야기죠. 그것이 세로 화면일 뿐이지, 세로 자체가 본질은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아버지의 집밥'이 처음부터 숏폼으로 기획된 것은 아니었다. 준비하던 시리즈와 영화가 투자 문제로 미뤄지는 과정에서, 이 감독은 숏폼이라는 새로운 형식을 통해서라도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이어가기로 했다.
"우여곡절 끝에 여기까지 온 거예요. 시리즈도 준비했는데 투자를 못 받아서 미뤄졌고, 영화 시나리오도 썼지만 투자 문제로 미뤄졌어요. 그렇게 현실 조건이 잘 맞지 않는 상황에서 숏폼이라는 새로운 형식으로라도 이야기의 배고픔을 채우게 된 거예요. 숏폼이 좋아서 혹은 기존 영화나 시리즈가 싫어서 한 게 아니라 '여기서라도 내가 할 이야기를 하자'는 마음이 컸어요."
후배 창작자들의 권유도 영향을 줬다. 영화계가 침체되고 신인 창작자들의 데뷔 진입장벽이 높아지는 상황에서, 이 감독은 숏폼이 또 다른 표현의 장이 될 수 있다고 봤다.
"떠밀린 면도 있어요. 후배들이 '감독님은 왜 안 하세요'라고 계속 얘기했거든요. 제가 예전에 같이했던 조감독, 연출부 친구들이 이제는 자기 작품을 해야 할 나이가 됐는데, 영화계가 침체되면서 데뷔의 진입장벽은 점점 높아지고 있잖아요. 그런 상황에서 숏폼은 적은 예산과 작은 규모라도 상업 자본 안에서 창작자가 자기 이야기를 주도적으로 해볼 수 있는 장이 될 수 있어요. 그 기회를 자기 능력의 표현의 장으로 쓰는 건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고, 저도 그 흐름을 응원하는 마음이 있었어요."
그가 숏폼을 선택하며 더 중요하게 본 것은 형식이 아니라 소재였다. 이준익 감독이 숏폼을 했다는 사실보다, 무엇을 가지고 숏폼을 하느냐가 핵심이라는 판단이었다.
"맞아요. 이준익 감독이 숏폼을 했다는 건 1차적인 선택이고, 더 중요한 건 무엇으로 숏폼을 하느냐였어요. 저는 '하우(how)'보다 '왓(what)'이 중요하다고 봤어요. 지금 숏폼 시장은 아직 초창기라 자극적인 내러티브가 경쟁력으로 남아 있는 부분이 있어요. 넷플릭스도 처음에는 자극적인 콘텐츠들이 두드러지다가 유저가 확대되는 과정에서 역사극이나 가족 드라마 같은 양질의 콘텐츠로 넓어졌잖아요. 숏폼도 폭넓은 유저를 확보하려면 소재가 확장돼야 한다고 봤어요. 그래서 나이 든 사람들도 자기 나이와 삶에 맞는 콘텐츠로 접근할 수 있게 하는 소재, 즉 '집밥'과 가족 이야기를 선택한 거예요."
이 감독은 요즘 극장과 OTT에서 현대 가족 드라마를 보기 어려워졌다는 점도 짚었다. 그는 숏폼이라는 새로운 생태계 안에, 한때 영화 안에 존재했던 이야기의 카테고리를 옮겨 심는다는 생각으로 '아버지의 집밥'을 바라봤다.
"요즘 극장이나 OTT에서 이런 현대 가족 드라마를 본 적이 많지 않잖아요. 예전에는 극장 안에도 그런 이야기들이 있었는데, 어느 순간 자취를 감췄어요. 투자사 입장에서는 상업성이 없다고 판단하기 쉬운 소재이기도 하고요. 그래서 저는 숏폼이라는 새로운 생태계 안에, 과거 영화 안에 있었던 어떤 이야기의 카테고리를 옮겨 심는다는 생각을 했어요. 숏폼이라서 개봉한 것이 아니라, 숏폼일지라도 이런 이야기에 대한 니즈가 있다고 본 거죠."
'아버지의 집밥'은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상영을 시작으로 극장 상영까지 이어졌다. 처음부터 극장 상영까지 계획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관객들의 뜨거운 반응으로 롯데시네마에서 단독 상영하는 기회도 얻었다.
"처음에는 그냥 숏폼으로 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섹션을 만들어 극장에서 상영하자고 하더라고요. 가로 스크린에서 세로 화면을 상영하는 방식이었죠. 처음 극장 상영을 준비할 때는 2분씩 잘라서 중간에 암전이 들어가는 형태였어요. 그런데 그 과정에서 기사도 나고 반응도 생기면서 '극장에서도 한 번 해볼까' 하는 흐름으로 이어졌어요. 제가 처음부터 모든 걸 계획한 게 아니에요. 인생이 계획대로 되는 게 아니잖아요. 오히려 떠밀려서 된다는 건, 거기에 시장의 니즈가 있다는 뜻으로도 볼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61화 분량의 숏폼을 이어 붙였을 때도 관객이 지루하지 않게 따라갈 수 있었던 힘은 이야기 구조에 있었다. 이 감독은 잔잔한 이야기 안에도 반전의 형태가 설계돼 있었기 때문에 긴 호흡이 가능했다고 봤다.
"잔잔한 이야기가 반전의 형태로 시나리오 안에 들어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봐요. 1화부터 61화까지 각각의 화가 있고, 그 화와 화 사이를 붙였는데도 2시간 반 가까운 시간을 지루하지 않게 본다는 건 굉장히 어려운 일이거든요. 주변에서 모니터링한 분들도 처음에는 중간에 끊고 보려고 했다가 결국 한 번에 다 봤다고 하더라고요. 자극적인 이야기는 반복되면 피로도가 쌓이고 뻔해 보이는데, 이 작품은 뻔한 관계와 뻔한 이야기를 다루면서도 계속 보게 만드는 구조를 찾은 것 같아요."
세로 화면은 관객의 감상 방식에도 영향을 줬다. 가로 화면에서는 관객이 시선의 대상을 어느 정도 선택할 수 있지만, 세로 화면은 한 인물의 얼굴과 감정을 더 직접적으로 마주하게 한다.
"그렇죠. 가로 영화에서는 투샷이 있으면 관객이 누구를 볼지 선택할 수 있잖아요. 그런데 세로 화면에서는 그 선택이 강요돼요. 지금 이 인물을 봐야 하고, 다음엔 저 인물을 봐야 하는 식이죠. 그래서 오히려 감상 위치에 따른 차이도 줄어들고, 관객이 받는 밀도가 균질해지는 면이 있다고 봤어요. 가로 화면이었다면 가족이 밥 먹고 이야기하는 풍경을 관객이 바라보는 느낌이 됐을 텐데, 세로 화면에서는 한 사람이 나를 보고 이야기하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거든요."
모바일로 숏폼을 보는 환경 역시 감상의 차이를 만들었다. 이 감독은 편집실 모니터로 볼 때는 미처 알 수 없었던 디바이스와 관람 형태의 차이를 이번 작업을 통해 새롭게 체감했다.
"편집할 때는 잘 몰랐어요. 편집실 모니터로 보니까 극장에서 보거나 실제 이용자가 보는 환경과 다르잖아요. 그런데 보통 숏폼을 많이 보는 시간이 밤 10시, 11시쯤이라고 하더라고요. 침대에 누워서 보는 거죠. 그렇게 본다고 생각하면 화면 속 인물과 관객이 거의 1대1로 마주하게 돼요. 남의 이야기를 엿보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의 내면에 내가 개입하는 느낌이 생기는 거죠. 디바이스의 형식과 관람 형태의 차이가 감상의 차이까지 지배한다는 걸 이번에 느꼈어요."
배우들의 참여는 이 감독에게도 큰 의미였다. 큰 제작비의 작품이 아닌 상황에서도 배우들이 함께한 것은, '아버지의 집밥'이라는 이야기가 가진 의미와 가치에 동의했기 때문이라고 봤다.
"나름 헌신이라고 봐요. 제작비가 큰 작품이 아니고, 배우들도 평소에 받는 것과 비교하면 말도 안 되는 조건으로 참여했을 거예요. 그런데도 하는 이유는 이 이야기에 의미와 가치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정진영, 이정은, 변요한 배우를 비롯해 각자 가진 이름과 위치가 있는데, 그 사람들이 단순히 자극적인 콘텐츠였다면 이렇게 참여했을까 싶어요. '아버지의 집밥'이라는 이야기에 담긴 의미와 가치에 동의했기 때문에 가능한 결과였다고 봅니다."
숏폼 시장의 확장 가능성도 긍정적으로 바라봤다. 이 감독은 국내 시장 안에 갇힌 고정관념만으로는 이미 해외에서 성장 중인 숏폼 시장의 흐름을 놓칠 수 있다고 말했다.
"국내 시장 안에 갇힌 고정관념으로 보면 지금 벌어지는 현상을 놓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숏폼 시장은 이미 해외에서 큰 규모로 성장하고 있고, 앞으로 한국에서도 가능성을 빨리 만들어야 한다고 봐요. 극장 영화는 해외에서 동시에 수익을 내기가 쉽지 않지만, 숏폼 플랫폼은 한국뿐 아니라 아시아, 일본, 대만 등으로 확장될 수 있잖아요. 전 세계 실시간 스트리밍의 1등이 넷플릭스라면, 거기에 대응할 수 있는 새로운 미래 시장의 가능성을 조금이라도 빨리 만들어야 한다고 봤어요. '아버지의 집밥'이 그런 흐름에 조금이라도 기여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숏폼이라는 새로운 무대를 경험한 뒤 이준익 감독은 다시 극장 영화로 향한다. 차기작 '반딧불이'는 촬영과 후반 작업을 거쳐 관객과 만날 준비를 이어갈 예정이다.
"3주 뒤쯤 들어가서 12월 말까지 하고, 후반 작업을 거치면 내년에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어요. 다만 일정은 제작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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