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기고] 기상 재해의 청구서는 그해 가을에만 오지 않는다

  • 종자는 지난해의 날씨를 기억한다

김병석 국립식량과학원장
[김병석 국립식량과학원장]

“올해는 과연 싹이 제대로 틀까.”

올봄 못자리 앞에 선 농업인의 걱정은 기우가 아니었다. 국립종자원과 농촌진흥청의 공동 조사에서 정부 보급종은 평균 발아율 85% 이상으로 대체로 양호했다. 그러나 일부 품종과 농가 자가채종 종자는 싹트는 속도가 예년보다 하루이틀 늦었고 발아율도 떨어졌다. 농업인에게 ‘언제 싹이 트느냐’는 한 해 농사의 출발을 가르는 문제다.

우리는 흔히 농사가 봄 논밭에서 시작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올봄의 더딘 싹은 이미 지난해 가을부터 시작된 문제다.

수확기 들녘은 고온과 잦은 강우로 유난히 힘겨웠다. 긴 장마가 이어지며 수확을 앞둔 벼가 쓰러지고, 이삭에서 싹이 트는 수발아 피해가 확산됐다. 깨씨무늬병 발생 면적은 3만6000헥타르(㏊)로 전년보다 두 배 이상 늘었다. 올여름에는 경남 양산의 기온이 섭씨 42도를 넘어서며 국내 기상관측 이래 최고기온을 기록했다. 이처럼 폭우와 폭염이 번갈아 찾아오는 기후는 이제 농업이 감당해야 할 새로운 조건이 되고 있다.

더 큰 문제는 기상재해 청구서가 그해 수확량 감소에서 끝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종자는 지난 계절의 날씨를 기억한다. 등숙기의 고온과 잦은 강우는 종자가 충분히 여무는 과정을 방해하고, 그 영향은 이듬해 봄 발아 지연과 활력 저하로 이어질 수 있다. 한 해의 이상기상이 다음 해 농사의 출발선까지 흔드는 것이다. 기후변화가 농업에 남기는 가장 조용하지만 오래가는 흔적이 종자에 새겨진다.

국립식량과학원의 연구에서도 이삭에서 싹이 트는 수발아 피해를 받은 벼 종자는 발아율과 활력이 낮아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문제는 벼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밀 역시 수확기 고온과 잦은 비가 이어지며 이삭에서 싹이 트는 피해가 늘었다. 콩과 씨감자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특히 정부 보급종 공급이 충분하지 않아 자가채종 의존도가 높은 작물일수록 종자 품질 저하의 영향이 이듬해 영농까지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기후위기의 영향은 밭에서 자라는 작물에 그치지 않고 다음 계절을 기다리는 씨앗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제는 수확량뿐 아니라 ‘다음 농사를 시작할 수 있는 힘’까지 함께 살펴야 한다.

그동안 우리의 연구는 더 좋은 품종을 만들고 안정적인 재배기술을 개발·보급하는 데 집중해 왔다. 모두 필요한 일이었고 성과도 분명했다. 다만 기후위기가 일상화된 지금은 연구의 시야를 ‘심은 뒤’에서 ‘심기 전’까지 넓혀야 한다. 아무리 우수한 품종이라도 종자가 건강하지 않으면 가진 잠재력을 제대로 발휘하기 어렵다. 

이제는 좋은 품종을 만드는 데서 나아가 그 잠재력을 온전히 발휘할 수 있는 건강한 종자를 안정적으로 확보하는 기술까지 갖춰야 한다. 국립식량과학원은 이를 하나의 연구 로드맵으로 풀어가고자 한다.

첫째, 토종 유전자원에서 답을 찾아 미래 육종의 자산으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 폭염과 장마를 견뎌온 재래종과 야생 근연종은 그 자체가 내성의 저장고다. 벼·밀·보리·콩·감자 유전자원에서 등숙기 고온 적응성, 내수발아성, 종자 활력 등 재해 대응 형질을 찾아내고, 유전체 분석과 디지털 육종기술을 활용해 새로운 품종 개발을 위한 기반으로 연결하는 연구가 중요하다. 관련 성과를 지식재산으로 축적하는 일도 미래 육종 경쟁력을 높이는 밑거름이 될 것이다.

둘째, 이렇게 확보한 유용 유전자가 품종과 종자 생산기술을 거쳐 현장까지 이어지는 연결고리를 강화해야 한다. 재해에 강한 형질을 실제 품종 개발에 적용하는 동시에 채종부터 건조·저장까지 종자 생산 전 과정의 기후위험 관리기술도 고도화할 필요가 있다. 발아율 예측과 활력 진단 기술을 강화하고, 국립종자원과 도·시군 농업기술기관 등 관계기관과 협력해 연구 성과가 농업인의 못자리와 밭까지 이어지는 종자 안전망도 함께 갖춰가야 한다.

농업은 씨앗을 뿌리는 순간부터 시작되지 않는다. 좋은 종자를 준비하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기후가 아무리 변해도 농업의 출발만큼은 흔들려서는 안 된다. 농업인이 해마다 봄이면 '씨가 제대로 싹틀까'를 걱정하지 않도록 하는 것, 그것이 기후위기 시대 국가 농업연구기관인 국립식량과학원의 책무다.

앞으로 국립식량과학원은 예측할 수 없는 미래 기후 환경 속에서도 국민들의 건강한 식탁을 든든하게 책임지는 역할을 다하기 위해 건강한 종자와 이를 뒷받침하는 유전자원, 안정적인 생산·관리 기술을 갖추는 데 더욱 노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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