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 글로벌 반도체 생산·연구개발(R&D) 거점으로 재부상하고 있다. 소재·부품·장비와 후공정 생태계가 지진 위험을 감수할 만큼 강한 유인으로 작용한다는 분석이 나온다.
9일 업계에 따르면 삼성전자는 일본 요코하마 미나토미라이에 차세대 반도체 패키징 연구 거점 문을 열었다. 2028년까지 400억엔(약 3292억원)을 투자하며 이 가운데 200억엔을 일본 정부가 지원한다. 한국과 일본 연구원 95명이 근무하며 현지 소재·장비업체, 연구기관과 공동 개발을 확대할 계획이다.
SK하이닉스도 일본 공장 설립 가능성이 거론된다. 현지 매체들은 올해 2월에 이어 지난달에도 일본 내 메모리 생산거점 구축 가능성을 다뤘다. SK하이닉스는 2월에는 검토설을 부인했지만 지난달 일본 동북부 미야기현 건립설이 나왔을 때는 추가 생산거점 확보를 포함해 다양한 방안을 검토 중이며 아직 확정된 사안은 없다고 밝혔다. 최태원 SK그룹 회장도 일본 내 여러 후보지를 살펴보고 있다는 취지로 언급해 일본 투자가 단순한 풍문은 아니라는 관측이 나온다.
일각에서는 일본이 잦은 지진 위험 등으로 반도체 공장 입지로는 적합하지 않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지난 7월 28일에는 구마모토에서 규모 7.1 지진이 발생해 TSMC 자회사인 JASM 공장을 비롯해 소니와 르네사스 생산시설 등이 가동을 멈추거나 생산을 축소하기도 했다.
다만 지진 리스크를 관리 가능한 비용으로 보는 시각도 많다. TSMC 구마모토 공장은 장비 점검을 거쳐 지난달 3일 정상 생산으로 복귀했다. 소니도 2016년 지진 당시 3개월 넘게 걸렸던 복구 기간을 이번에는 크게 단축했다. 내진 보강과 반복 훈련 등 지난 재난 경험에 대한 대응이 축적된 결과라는 평가다.
특히 일본의 반도체 소·부·장(소재·부품·장비) 경쟁력은 외면하기 어려운 장점이다. 일본 경제산업성이 공개한 자료를 보면 일본 기업은 세계 반도체 제조장비 시장의 31%, 주요 소재 시장의 48%를 차지하고 있다. 신에쓰화학과 섬코(SUMCO)는 실리콘웨이퍼 세계 1·2위권이고, 도쿄오카공업은 포토레지스트 강자다. 첨단 패키지 기판 절연재인 ABF도 일본 아지노모토 계열사가 세계 시장의 약 95%를 공급한다고 밝히고 있다.
AI 반도체 시대에는 이런 '옆자리 효과'가 더 중요해졌다는 분석이 나온다. 미세 공정 고도화만으로 성능을 높이기 어려워지면서 고대역폭메모리(HBM)와 여러 칩을 묶는 첨단 패키징의 효용성이 커졌다. 칩 업체와 소재·장비업체가 개발 초기부터 재료 특성과 공정을 함께 맞춰야 하는 일이 늘면서 공급사와 가까운 연구거점의 가치도 높아졌다는 것이다. 삼성전자가 일본에 생산라인보다 패키징 R&D 거점을 먼저 확대한 배경으로도 이 같은 산업 변화가 거론된다.
일본 정부의 지원도 무시하기 어렵다. 삼성 요코하마 연구거점은 투자액의 절반을 정부가 지원한다. 일본은 TSMC 구마모토 제2공장에 최대 7320억엔 지원을 책정했고 2030년까지 AI·반도체 분야에 10조엔 이상의 공적 지원을 투입한다는 계획이다. 해외 기업을 끌어들여 자국 소부장과 연결하고 다시 관련 투자를 부르는 생태계를 만들겠다는 전략으로 해석된다.
2019년 일본의 반도체 소재 수출 규제로 불거졌던 한·일 공급망 갈등도 현재는 국면이 달라졌다. 양국은 2023년 관련 규제를 정상화했다. 공급망을 한 국가에 집중하는 위험은 남아 있지만 AI 경쟁이 빨라질수록 필요한 소재·장비업체와 공동 개발하는 속도 역시 중요해졌다는 게 업계의 시각이다.
김양팽 산업연구원 전문연구원은 "반도체산업은 과거와 달리 한 국가에서 모든 공정을 처리하기에는 한계가 있다"며 "일본과의 협력을 통한 성장 방안도 모색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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