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기호 칼럼]북미대화 기류 속 '코리아 패싱' 넘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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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기호 아주대 아주통일연구소 교수(연구실장)]

 
 
2019년 2월 28일, 메트로폴 하노이 호텔을 박차고 일어났던 트럼프 대통령이 다시 김정은 위원장에게 손을 내밀고 있다. 그는 8월 19일 백악관에서 “올해 후반 김정은 위원장을 만날 것”이라 밝혔고, 앞서 17일에는 김 위원장으로부터 자신의 대화 제안에 “매우 긍정적인” 답변을 받았다고 말했다. 동시에 이란과의 전쟁에 미온적으로 반응한 한국을 언급하며 예고 없이 한미연합훈련을 대폭 축소했다. 이에 김여정 북한 노동당 총무부장은 미국의 한미연합훈련 축소에 대해 원하는 답은 나오지 않을 거라 일축하면서도 양 지도자 간의 친분을 언급, 미국의 ‘적대시 정책’ 자체가 철회 없이는 대화에 나가지 않을 것임을 역설했다(조선중앙통신 8.20). 이처럼 트럼프의 대화 제의에 북한은 즉각 호응하지 않으면서도 오히려 이번 기회를 미국의 대북정책의 근본적 변화와 다시 찾아오지 않을 핵보유국 인정의 호기로 삼을 태세다.

결국 “시간은 우리에게 더 유리하다”(2025년 9월 최고인민회의)던 김 위원장의 자신감이 허언은 아니었던 셈이다. 이는 당시 러·우전쟁으로 도래한 신냉전 질서를 틈타 대러시아 군사동맹 복원과 전승절 계기 대중국 관계 회복의 성과에 고무된 상태에서 나온 발언이었다. 하노이 노딜 이후 7년 6개월이 지났다. 미국 대통령에 대한 직접적인 비난을 자제하며 큰 기술보다는 샅바싸움에 매진해왔던 북한이 한껏 키운 몸값을 청구하기에 적절한 순간이 다가오고 있다.

핵심은 트럼프 1기 행정부 당시와 지금의 북미대화는 성격이 전혀 다르다는 점이다. 북한은 하노이에서의 쓰라린 경험 이후 핵무기 비축량을 60기 안팎으로 증대시킨 것으로 추측(한국 국방부는 80~120기 추산)되며 영변 핵시설의 재가동과 우라늄 농축 시설 확장을 통해 매년 몇 개 분량의 핵탄두 제조용 핵분열성 물질을 지속해서 축적해왔다. 또한 대륙간탄도미사일인 화성-18, 화성-19형의 시험 개발로 미국 본토 타격 역량을 키웠고, 초대형 방사포(600mm)와 단거리 탄도미사일(SRBM),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등 한국 전역을 사정권으로 두는 다종의 미사일에 전술핵탄두('화산-31' 등)를 탑재하기 위한 소형화·경량화 기술을 진전시키며 미사일 운반수단의 다변화, 고도화에 매진했다. 조건부 선제핵사용 등 핵무력정책법을 채택하여 핵교리를 법제화(2022년 9월 최고인민회의)하였고 군사·경제협력을 비롯한 대중러 관계 밀착으로 대북제재를 버텨내며 전략적 위상변화를 도모하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북한은 미국과의 비핵화 협상보다는 사실상 핵보유국에 준하는 전략적 지위를 확보하기 위한 협상 테이블로 상대를 유인하고자 할 것이다.

여기서 트럼프 외교의 기회와 위험이 동시에 발생한다. 북·미 정상 간 대화 자체는 환영할 일이다. 북한의 핵·미사일 능력이 고도화된 상황에서 양측 정상 간 소통은 우발적 오판과 군사적 충돌 가능성을 낮추는 안전장치가 될 수 있다. 문제는 트럼프 대통령에게 필요한 ‘외교적 성과’가 한국의 국익과 반드시 일치하는가의 여부이다. 8월 17일 백악관 기자회견에서도 한국에 대한 미국의 방위비 부담이 과도하고 호르무즈 해협에 대한 군사적 지원을 한국이 거절한 것을 비난하는 맥락에서, 한미연합훈련 축소와 북·미 대화 제안을 거론했다. 국내 일각에선 한국의 안보여건을 배제하고 미국이 북·미 대화에 임할 수 있다는 ‘코리아 패싱’의 우려가 불거져나왔다. ‘전술핵 재배치’를 통한 한반도 핵균형 주장도 이런 시각과 무관하지 않다. 북·미간 ‘코리아 패싱’… 1994년 북·미 제네바 합의를 전후한 시기 김영삼 정부가 남북대화의 진전 없이 미국 정부가 북·미관계 개선에 속도를 내자 “너무 빠르다”며 당시 한승주 외무장관을 통해 빌 클린턴 대통령에게 구두 메시지를 전했던 상황에서 기시감도 없지 않다.

문제는 한국을 배제한 북·미대화 자체보다는, 북·미가 한국의 안보이익과 직결된 사안을 사전 조율 없이 정치적으로 거래하는 행태일 것이다. 따라서 한국의 전략은 어렵사리 마련된 북·미대화가 조악한 합의로 귀결되지 않도록 준비단계에 관여하는 것이어야 한다.

첫째, 북·미 정상회담이 열린다면 한·미 간 사전 조율을 제도화해야 한다. 비핵화, 제재, 평화체제는 물론 주한미군, 확장억제, 한미연합방위태세와 관련된 사항은 한국의 동의 없이 북·미 간 거래 대상이 될 수 없다. 8월 24일 한·미 외교장관 통화에서 양국이 “굳건한 한미 연합방위태세”를 유지하면서 북핵 문제와 한반도 평화를 위해 긴밀한 공조를 이어가기로 한 것은 다행스러운 지점이다. 둘째, 한·미간 현실적으로 추진해야 할 것은 ‘비핵화를 포기하지 않되 비핵화만을 기다리지 않는 협상’이다. 핵·미사일 시험 중단, 핵물질 생산 동결, 핵시설 신고·검증, 장거리미사일 제한 등 단계적 조치를 통해 북한의 핵능력 추가 고도화를 막고, 이를 제재완화와 안전보장, 관계정상화와 연계하는 방식이다. 단기적으로 핵개발을 동결하고, 이후 핵물질 감축과 신뢰 구축을 거쳐 장기적으로 비핵화로 나아가는 현 정부의 단계적 접근과도 일치한다. 셋째, 한국이 중재자를 넘어 당사자이자 공동 설계자로 나설 필요가 있다. 이 대통령은 지난 6월 G7 회의 계기 트럼프 대통령에게 북한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주도해 달라고 요청했고, 트럼프 대통령은 노력하겠다고 답했다. 8월 24일 한·미 외교장관 통화에서도 서울은 트럼프 대통령의 최근 메시지가 북·미대화와 한반도 평화로 이어지도록 노력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북한이 조롱하는 ‘가긍한 처지의 서울’의 입지에 머물러서는 남북관계 개선도 요원하다.

향후 최대의 외교적 계기는 11월 중국 선전 APEC이 될 전망이다. 월스트리트저널은 8월 18일 트럼프 행정부가 가을 김정은과의 정상회담 방안을 검토하고 있으며, 11월 선전 APEC을 계기로 만나는 방안도 거론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한국 언론 역시 이를 주요 시나리오로 다루기에 9월 시진핑 주석의 방미 계기 미·중 정상 간 한반도 의제가 다뤄질 수 있도록 외교적 물밑 노력이 필요하다. 다만 북한은 APEC 회원국이 아니므로 실제 회동이 성사된다면 APEC 공식회의가 아니라 별도의 북·미 정상 접촉 형식이 될 가능성이 높다.

미국 중간선거 역시 변수다. 트럼프 대통령에게 김정은과의 정상회담은 복잡한 대외정책 환경에서 보여줄 수 있는 상징적인 외교 성과가 될 수 있다. 따라서 11월은 북한에도, 미국에도 협상의 시간표를 앞당길 유인이 존재한다. 따라서 우리 정부가 주목할 것은 회담 개최 자체가 아닌 합의 내용이다. 자칫 거래를 위한 북·미대화가 성사될 경우 한미연합훈련, 대북제재, 핵문제, 평화체제 등이 하나의 패키지로 묶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기에, 한반도 평화와 한국의 안보이익을 반영한 ‘관리된 거래’를 관철시키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즉 단기적으로는 군사적 긴장을 낮추고 북한의 핵능력 추가 증강을 억제하되, 장기적인 완전한 비핵화 목표를 유지하고, 동시에 한미동맹과 확장억제의 신뢰성을 훼손하지 않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결과적으로 하노이 노딜은 3차 북·미정상회담의 문턱을 대폭 높여 놓았다. 결국 지금 한국에 필요한 전략은 ‘코리아 패싱을 막아달라’는 수동적 외교가 아닌 북한이 요구하는 조건과 미국이 제공할 수 있는 인센티브 사이에 한국의 국익을 심어 넣는 능동적 외교가 되어야 한다.
 
한기호 필자 주요 이력
 
▷아주대 아주통일연구소 교수(연구실장) ▷연세대 통일학 박사 ▷통일부 과장(서기관) ▷(사)북한연구학회 대외협력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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