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파이더맨' 시리즈를 관통하는 이 오랜 명제는 공교롭게도 현재 마블 스튜디오가 처한 현실과 겹쳐진다. 극장가를 호령하던 마블은 무한히 확장된 세계관만큼 묵직해진 대중의 기대를 감당해야 하는 시험대에 섰다. 잇따른 흥행 부진과 서사적 피로감 속에 '마블 위기론'이 기정사실화된 가운데 5년 만에 돌아온 '스파이더맨: 브랜드 뉴 데이'가 짊어진 무게 역시 결코 가볍지 않다.
흥미로운 건 이 현실의 짐이 극 중 피터 파커(톰 홀랜드 분)의 상황과 기묘하게 맞물린다는 점이다. '노 웨이 홈'의 비극 이후 세상 모두의 기억에서 지워진 그는 소중한 이들을 떠나보낸 채 고립의 세계에 남겨졌다. 답을 알려줄 멘토도, 실수를 수습해 줄 구명줄도 없다. 유쾌했던 '우리의 다정한 이웃'은 이제 모든 것을 홀로 감당해야 하는 낯선 출발선에 다시 섰다. '브랜드 뉴 데이'는 잊힌 영웅과 홀로 남겨진 청년이 '책임'의 의미를 새롭게 증명해가는 서사다.
정체가 들통난 피터는 소중한 이들을 지키기 위해 닥터 스트레인지(베네딕트 컴버배치 분)에게 사람들의 기억에서 자신을 지워달라 부탁한다. 그렇게 '스파이더맨'은 존재하지만 '피터 파커'는 사라진 세상이 열린다. MJ(젠데이아 콜먼)와 네드(제이콥 배덜런)는 피터 없이 평범한 대학 생활을 이어가고, 피터는 멀리서 지켜볼 뿐 다가서지 못한다. 사랑하는 이들의 부재와 토니의 지원이 사라진 상황은 오히려 그를 임무에 몰아붙이고 몸을 혹사하면서까지 뉴욕을 지키려는 그의 모습에서 상실을 봉합하려는 절박함이 읽힌다.
그러던 어느 날 자신을 지운 채 살아가는 MJ와 네드를 우연히 맞닥뜨린 피터의 내면에 균열이 일고, 그 균열은 '피터 파커'라는 정체성마저 스스로 지워버리는 통제 불능 상태로 번진다. 억눌러온 '거미 유전자'가 거세지자 그는 브루스 배너(마크 러팔로 분) 교수를 찾아가 해법을 구한다.
한편 모두에게 잊힌 피터를 유일하게 기억하는 정체불명의 인물이 등장, 그의 소중한 이들을 위협한다. 자신을 기억하는 단 하나의 존재가 오히려 위협이 되는 아이러니 속에서 피터는 사랑하는 이들을 지키기 위해 다시 한번 스파이더맨으로서의 싸움에 나선다.
'브랜드 뉴 데이'는 '홈커밍'(2017), '파 프롬 홈'(2019), '노 웨이 홈'(2021)에 이은 톰 홀랜드의 네 번째 '스파이더맨'이다.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을 연출한 데스틴 대니얼 크리턴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다.
그간 원작 팬들은 MCU의 스파이더맨이 토니 스타크라는 조력자 아래 성장해온 방식에 아쉬움을 표해왔다. 가난한 고학생으로 홀로 힘을 감당하며 다정한 이웃으로 거듭났던 원작과는 결이 달랐다는 것이다. '브랜드 뉴 데이'는 그 지적에 답하듯 '젠지 세대' 피터에게서 모든 것을 앗아가고 철저히 원점으로 돌려세운다. 바닥까지 추락한 스파이디가 정체성을 되찾고 영웅으로서의 자아를 다시 세우는 과정이야말로 이 영화가 진짜 하려는 이야기다. '피터'와 '스파이더맨' 사이에서 흔들리는 혼란을 설득력 있게 그려낸 데는 10년간 쌓아 올린 톰 홀랜드만의 '스파이디'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 과정에서 영화는 블랙 위도우, 브루스 배너는 물론 '엑스맨' 시리즈의 진 그레이까지 자연스럽게 엮어내며 세계관 확장에 대한 기대를 키운다.
다만 밝고 경쾌했던 '어린' 스파이디를 기대했다면 다소 낯설 수 있다. 통통 튀는 유머와 다정한 이웃의 친근함으로 사랑받던 얼굴 대신 모든 것을 잃은 뒤에도 다시 삶을 선택해야 하는 청년 피터가 있을 뿐이다. 최근 MCU 전반이 짊어진 무거운 공기가 그의 어깨 위에 얹힌 듯한 순간도 있지만, 그 무게는 이 캐릭터가 지나온 시간과 맞물리며 나름의 설득력을 얻는다. 반면 액션은 여전히 스파이더맨답게 날렵하다. 빌딩 숲을 가르며 수직으로 치솟고 추락하는 고공 액션은 이 시리즈만의 쾌감을 제대로 살리고 스콜피온을 비롯해 저마다 다른 능력을 지닌 빌런들이 연이어 등장하며 액션의 리듬도 끊임없이 변주된다. 깊어진 감정선과 가장 '스파이더맨다운' 육체적 쾌감이 교차하는 순간들이 영화의 활력을 붙든다.
특히 눈여겨볼 인물은 진 그레이(세이디 싱크 분)다. '엑스맨' 속 익숙한 캐릭터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그는 강력한 힘 때문에 오히려 세상과 멀어진 존재로, 자신조차 통제하기 어려운 능력과 그로 인한 고립은 모두에게 잊힌 채 살아가야 하는 피터의 처지와 묘하게 겹쳐진다. 서로를 경계하던 두 사람이 각자의 외로움을 알아보는 과정은 영화의 중요한 감정축이다. 피터가 진 그레이를 이해하고 위로하는 순간은 그가 얼마나 성장했는지를 보여준다. 이전의 피터였다면 자신의 혼란만으로도 벅찼겠지만, 이제 그는 타인의 두려움을 들여다보고 손을 내밀 줄 안다.
자신을 지운 채 홀로 서야 하는 고독과, 그 안에서도 놓지 않는 책임감을 오가는 톰 홀랜드의 얼굴은 이번 시리즈에서 가장 깊어진 얼굴이다. 젠데이아 콜먼과 제이콥 배덜런 역시 10년 가까이 다져온 호흡으로 극의 정서를 단단히 받쳐주는데, 실제 이들의 오랜 우정이 극 중 피터·MJ·네드의 관계와 자연스레 겹쳐지며 몰입도를 한층 끌어올린다. 다음 이야기를 예고하는 쿠키 영상도 놓치지 말 것을 권한다.
'스파이더맨: 브랜드 뉴 데이'는 29일 국내 개봉한다. 러닝타임은 144분, 관람등급은 12세 이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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