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무장지대 인근 작은 항구마을 호포항. 출장소장 범석(황정민 분)은 논길 한가운데서 처참하게 죽은 소를 발견하고 마을 청년들은 이를 호랑이의 소행이라 짐작한 채 숲으로 향한다. 지원 인력은 산불을 끄러 떠났고 통신마저 두절된 상황. 비상이 걸린 범석은 마을을 지키기 위해 분주히 움직이지만, 그가 마주한 것은 상상을 훨씬 넘어서는 참혹한 현실이다. 파괴된 마을과 널브러진 시신들, 정체를 알 수 없는 괴성까지 뒤엉킨 생지옥 속에서 범석과 호포항 순경 성애(정호연 분)는 노인들뿐인 마을을 지키기 위해 사투를 벌인다.
한편 호랑이의 흔적을 쫓아 숲속으로 향한 성기(조인성 분)와 청년들 역시 순식간에 사냥감이 된다. 성기 일행이 마주한 건 호랑이가 아닌 괴생명체. 무지가 빚어낸 불행의 씨앗은 입장의 차이를 거쳐 온 우주의 비극으로 번지고, '호프'는 작은 항구마을의 재난을 넘어 인간과 인간이 아닌 존재가 충돌하는 가장 낯선 재난의 한복판으로 관객을 밀어 넣는다.
극 중 범석은 관객들의 '눈'과 같은 존재다. 출장소장으로서 마을을 지키려 분주히 움직이지만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는 참혹한 풍경 속에서 관객과 마찬가지로 속수무책으로 당할 뿐이다. 어떤 설명이나 배경 지식 없이 범석을 재난의 한가운데에 놓아둠으로써 관객은 정체를 알 수 없는 미지의 대상 앞에 범석과 함께 맨몸으로 서게 된다.
영화 중후반부 성기와 무리들로 시선이 옮겨지며 영화의 온도도 달라진다. 놈의 흔적을 쫓아 실체에 맹렬하게 다가가는 이들의 시점은 앞선 당혹감을 장르적 쾌감으로 치환한다. 숲이라는 고립된 공간이 주는 원초적 두려움과 실체에 맞닥뜨리는 과정이 교차하며 밀도를 높인다. '곡성'에 이어 나 감독과 또 한 번 호흡을 맞춘 홍경표 촬영 감독은 깊은 숲과 광활한 들판을 유려하게 훑으며 날 것의 야생적인 에너지를 스크린 가득 채운다.
각자의 사투를 벌이던 인물들이 한데 모여 맹렬하게 도로를 질주하는 후반부 시퀀스는 그간 응축해 온 에너지를 여과 없이 폭발시킨다. 경상남도 합천 일대에서 촬영된 이 자동차 추격전을 비롯해 극 전반을 지배하는 영상미는 관객의 시각적 감각을 쉴 틈 없이 자극한다. 한국 영화 특유의 스릴러적 긴장을 바탕으로 거친 서부극의 리듬, SF의 이질감이 한데 뒤섞여 펄떡인다. 전혀 다른 장르들을 충돌시켜 기어이 낯선 파괴력을 만들어내는 솜씨가 탁월하다.
영화 속 액션은 인물들의 감정을 말하는 확실한 언어다. 어떤 설명보다도 인물들이 펼치는 핏빛 사투가 절박하게 각자의 입장을 전달한다. 현장에서 직접 부딪히며 완성한 액션들은 강력한 타격감을 안겨주고 관객들마저 그 현장에 내동댕이쳐진 듯한 몰입감을 준다. 치열한 액션 사투와 미지의 존재에 대한 공포감이 교차하는 와중 불쑥불쑥 등장하는 예기치 못한 유머는 긴장의 맥을 탁 풀며 팽팽한 서스펜스에 숨통을 틔워준다. 이 기묘한 리듬은 방해라기보다 극의 입체감을 살리는 정교한 장치로 작동한다.
아득한 재난의 한복판에서 극의 밀도를 채우는 건 배우들의 호흡이다. 범석 역의 황정민은 미지의 공포와 책임감 사이에서 붕괴해 가는 인물을 그려내며 영화의 중심을 든든하게 잡는다. 극도의 판타지적 상황 속에서도 그가 뿜어내는 생활감은 영화를 현실의 토대 위에 단단히 발붙이게 한다. 성기 역의 조인성은 나홍진의 세계관에 완벽하게 스며들어 고난도 액션을 직접 소화하며 처절한 생존자의 얼굴을 구현해 낸다. 성애 역의 정호연 또한 강렬한 기세로 영화 속 거친 사투를 온몸으로 받아내며 자신만의 궤적을 그려낸다.
이토록 강렬한 체험을 끝까지 밀어붙이는 영화지만 정작 관객이 마주하는 결말은 질문을 던지는 데서 멈춘다. 나홍진 감독은 "이야기가 훌륭하지 않을지라도 완결성을 가지고 있다"는 확신을 드러냈지만 극장을 나서는 관객에게는 해답 대신 해소되지 않은 물음표들이 남는다. "모든 비극의 원인은 입장에 있다"는 주제 의식 아래 이야기를 뚝심 있게 밀어붙였음에도 서사의 빈 공간들이 명쾌하게 봉합되지 못한 채 끝내 '여백'으로 남는다는 점은 관객에 따라 분명한 호불호의 요소가 될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79회 칸영화제 경쟁 부문에 공식 초청된 이 작품이 선사하는 압도적인 영화적 체험의 여운은 아직도 생생하다. 내수 시장의 한계와 투자 위축으로 침체기에 빠진 한국 영화계에서 막대한 제작비의 압박을 뚫고 타협 없이 완성해 낸 이 거대한 프로젝트는 무모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지독하게 밀어붙인 시네마틱한 체험은 관객이 기어이 극장을 찾아야 할 이유를 증명해 낸다. 모두를 만족시키는 영화는 아닐지 몰라도 관객을 쥐고 흔드는 악력만큼은 과연 압도적이다. 이 악력이 기어이 한국 영화의 새로운 '호프(HOPE)'로 당도할 수 있을지 지켜볼 일이다. 오는 7월 15일 개봉. 러닝타임은 156분, 관람등급은 15세 이상 관람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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