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관세정책이 또다시 변곡점을 맞았다. 미 연방대법원 판결로 국가별 상호관세에 제동이 걸리자 트럼프 행정부는 무역법 301조를 새로운 관세 수단으로 꺼내 들었다. 한국에는 강제노동 생산품의 수입 차단이 미흡하다는 이유로 12.5% 추가 관세가 예고됐다. 여기에 구조적 과잉생산을 이유로 한 관세까지 더해지면 한·미가 합의한 15%를 넘어설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한국은 지난해 3500억 달러 규모의 대미 투자를 약속하는 대신 상호관세를 25%에서 15%로 낮췄다. 정부와 기업은 이를 대미 수출의 불확실성을 줄이는 안전판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미국이 관세의 법적 근거를 바꿔 새로운 관세를 덧붙인다면 어렵게 만든 합의는 사실상 무력화된다. 투자 약속은 남고 관세 혜택은 사라지는 최악의 상황도 벌어질 수 있다.
무역법 301조는 미국이 교역 상대국의 불공정 행위를 조사하고 보복 조치를 취할 수 있도록 한 법이다. 국가 전체에 일률적으로 관세를 부과했던 상호관세와 달리 특정 정책과 산업, 품목을 겨냥할 수 있다. 관세율뿐 아니라 적용 대상도 미국의 판단에 따라 달라질 수 있어 기업 입장에서는 대응하기가 더 어렵다. 강제노동과 과잉생산에 이어 디지털 규제나 보조금, 환율까지 조사 명분으로 활용될 가능성도 있다.
정부의 최우선 목표는 15%를 실질적인 총관세 상한으로 확정하는 것이어야 한다. 관세의 이름과 법적 근거가 달라져도 한국산 제품에 적용되는 추가 관세가 15%를 넘지 않도록 미국 측의 명문화된 확인을 받아내야 한다. 기존 합의에 따라 추진되는 대미 투자도 관세 면제·감축과 연동해야 한다. 투자부터 집행하고 관세 문제는 나중에 논의하는 방식으로는 협상력을 지키기 어렵다.
과잉생산 조사에는 산업별 자료로 맞서야 한다. 미국은 한국의 철강과 석유화학, 배터리 등 일부 산업을 정부 지원에 의존한 과잉생산 구조로 볼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모든 생산 증가를 불공정 행위로 규정할 수는 없다. 정부와 업계가 공동으로 생산능력과 보조금, 시장가격, 대미 투자와 현지 고용 효과를 정밀하게 입증해야 한다. 미국 공급망 안정에 기여하는 한국산 소재와 부품은 관세 대상에서 제외하도록 품목별 협상도 병행해야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경쟁국보다 불리한 대우를 받지 않는 것이다. 관세가 완전히 사라지기 어려운 상황이라면 최소한 일본과 유럽연합, 대만 등 경쟁국보다 높은 세율을 적용받는 일은 막아야 한다. 같은 제품에 한국만 높은 관세가 붙으면 수출 감소를 넘어 미국 시장의 거래처 자체를 잃을 수 있다. 관세율보다 상대적인 가격 경쟁력이 더 중요한 이유다.
국내 피해 대책도 미리 준비해야 한다. 석유화학과 철강, 배터리, 일반기계 등 취약 업종을 중심으로 품목별 관세 영향을 점검하고 수출금융과 무역보험을 확대해야 한다. 다만 모든 기업에 보조금을 나눠주는 방식은 피해야 한다. 경쟁력이 있지만 일시적 충격을 받는 기업과 구조조정이 필요한 기업을 구분해 지원해야 한다. 수출시장 다변화와 고부가가치 제품 전환도 함께 추진해야 한다.
미국의 관세 압박은 한 차례 협상으로 끝날 사안이 아니다. 법적 근거와 명분을 바꾸며 반복될 장기전이다. 정부는 15% 합의를 지키는 데 머물지 말고 추가 관세의 빌미를 줄이는 제도 개선과 품목별 협상, 산업 경쟁력 강화까지 하나의 전략으로 묶어야 한다. 통상에서 약속은 저절로 지켜지지 않는다. 한국이 가진 투자와 공급망의 가치를 협상 지렛대로 활용할 때 관세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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