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전 실패한 쿠데타, 유럽과 아시아 잇는 튀르키예를 만들다

2016년 7월 19일 이스탄불 바으츨라르 지역에서 시민들이 튀르키예 국기를 흔들며 민주주의 집회에 참가하고 있다 실패한 쿠데타 시도 나흘 뒤의 모습이다 Maurice Flesier  Wikimedia Commons  CC BY-SA 40
2016년 7월 19일 이스탄불 바으츨라르 지역에서 시민들이 튀르키예 국기를 흔들며 민주주의 집회에 참가하고 있다. 실패한 쿠데타 시도 나흘 뒤의 모습이다. Maurice Flesier / Wikimedia Commons / CC BY-SA 4.0


이달 초 앙카라에 32개국 정상이 모여들었다. 나토가 튀르키예 수도에서 연 사상 첫 정상회의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주최국 정상을 한껏 추어올리며 제재 해제까지 약속했고, 회의와 함께 열린 방산 포럼은 나토 역사상 최대 규모를 기록했다.

그런데 그 회의장에서 몇 킬로미터만 가면 튀르키예 의회가 나온다. 꼭 10년 전인 2016년 7월 15일 밤, 자국 전투기의 폭격을 맞았던 바로 그 건물이다.

그날 밤 이스탄불 보스포루스 다리에는 탱크가 올라섰고, 하룻밤에 나라를 뒤엎겠다는 군사 쿠데타가 시작됐다. 그러나 결과는 정반대로 흘러갔다. 시민들이 맨몸으로 거리에 쏟아져 나와 탱크 앞을 막아선 것이다. 최소 251명이 숨지고 2000명 넘게 다치는 대가를 치렀지만, 쿠데타는 동이 트기도 전에 주저앉았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지금, 폭격당한 의회 옆에서 두 대륙의 방위가 논의되고 전쟁 중인 강대국들이 너나없이 중재를 청하는 나라가 됐다. 오늘의 튀르키예다.

이 10년의 거리를 만든 것은 무엇인가. 답을 찾으려면 그날 밤으로 돌아가야 한다.

쿠데타의 역사에서 7·15 같은 장면은 좀처럼 찾기 어렵다. 쿠데타의 승패란 대개 권력 내부에서 갈리는 법이고, 국민은 아침 뉴스로 결과를 통보받는 존재에 그친다. 튀르키예는 달랐다. 승부처가 거리였기 때문이다.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이 방송 앵커의 휴대전화 영상통화로 국민에게 저항을 호소하자 이스탄불과 앙카라의 시민들이 군 병력을 에워쌌고, 그중에는 탱크에 기어오르다 총에 맞은 이들도 있었다. 그날 광장에는 세속주의자와 신앙인이, 좌와 우가, 여와 야가 나란히 서 있었다. 군홧발이 통치자를 정할 수는 없다는 단 하나의 원칙이 그 모두를 묶어낸 것이다.

국민의 힘으로 쿠데타를 꺾어본 나라는 웬만한 나라가 평생 얻지 못할 답을 손에 쥐게 된다. 이 나라의 주인이 누구냐는 물음의 답이다. 그리고 그 확신은 곧 국력이 됐다. 앙카라는 지난 10년에 걸쳐 그것을 착실히 현금화해 왔다.

배후로 지목된 것은 페툴라 귈렌의 조직이었다. 귈렌은 1999년 미국 펜실베이니아로 건너가 2024년 10월 숨질 때까지 사실상의 망명 생활을 이어간 이슬람 성직자로, 한때는 에르도안의 동지이기도 했다. 그의 조직은 수십 개국에서 학교와 언론사, 기업을 굴렸고, 추종자들은 수십 년에 걸쳐 사법부와 경찰, 군의 요직을 파고들었다. 두 사람이 갈라선 것은 2013년이었고, 쿠데타 직후 정부는 이 조직에 '페툴라 테러조직', 페토(FETÖ)라는 이름을 붙여 테러단체로 지정했다. 귈렌 본인은 죽는 날까지 혐의를 부인했다. 뒤이어 군인과 판사, 검사, 교사, 공무원 수만 명이 옷을 벗거나 수감되는 공화국 역사상 최대의 숙청이 이어졌고, 서방은 그 규모를 문제 삼았다.

그러나 7·15가 남긴 것은 숙청만이 아니었다. 안보를 남의 손에 맡기지 않겠다는 결심이 함께 남았다. 그 결심으로 방위산업을 키운 결과, 무기를 수입에 기대던 튀르키예는 어느새 세계 유수의 수출국으로 올라섰고, 튀르키예산 드론은 북아프리카에서 우크라이나까지 전장을 누비고 있다. 외교 역시 제 갈 길을 갔다. 동맹이 등 돌린 상대와도 대화의 끈을 놓지 않았고, 러시아산 방공체계를 들여오다 미국의 제재를 맞고도 물러서지 않았다. 안이 단단한 나라는 진영에 몸을 맡기는 대신 진영 사이에 설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2020년대의 혼돈은 그 계산서에 도장을 찍어주고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5년째로 접어들었고, 미국·이스라엘과 이란의 전쟁은 중동을 뒤흔들며 에너지 시장을 출렁이게 했으며, 미국이 유럽에서 발을 빼면서 대서양 동맹마저 삐걱대는 형국이다. 이 판에서 키이우와 모스크바 양쪽 모두와 말이 통하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회원국은 튀르키예 하나뿐이다. 봉쇄를 뚫고 곡물 3000만t을 실어 나른 흑해 곡물협정이 튀르키예의 작품이었고, 양측 포로 1000명씩을 맞바꾼 협상도 이스탄불에서 이뤄졌다. 이란 전쟁이 터지자 하칸 피단 외무장관은 걸프 국가들을 돌며 이 지역의 안보는 이 지역이 책임져야 한다고 설득했고, 앙카라는 워싱턴과 테헤란 사이의 창구를 자임하고 나섰다.

이 외교력의 뿌리를 캐보면 지리가 나온다. 튀르키예는 유럽과 아시아를 가르는 해협 위에 서서 몽트뢰 협약에 따라 흑해로 통하는 유일한 뱃길의 열쇠를 쥐고 있으며, 실제로 이 열쇠를 돌려 러시아 군함의 흑해 증원을 막아낸 바 있다. 중국과 중앙아시아를 유럽에 잇는 육로 '중간회랑'의 길목이기도 한데, 러시아를 지나는 북쪽 길이 막히면서 이 회랑의 몸값은 하루가 다르게 뛰고 있다. 상품도 가스도 곡물도 난민도 결국 튀르키예를 거쳐 간다. 태평성대의 튀르키예가 길목이라면, 난세의 튀르키예는 문지기다. 그리고 지금은 난세다.

앙카라 정상회의에 이재명 대통령이 자리한 이유도 여기서 찾을 수 있다. 우크라이나의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과 더불어 나토 비회원국 정상으로는 단둘뿐인 초청이었다. 뱃길과 공급망에 국운이 걸린 통상국가인 한국은 이 '연결 국가'에 일찍이 공을 들여왔다. 이 대통령은 지난해 11월 한국 대통령으로는 13년 만에 튀르키예를 국빈 방문했는데, 이는 튀르키예의 6·25 참전 75주년에 맞춘 걸음이었다. 튀르키예는 그 전쟁에 2만 1000명을 보내 900명 넘게 잃었고, 한국인이 튀르키예를 형제의 나라로 부르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두 정상은 103분간 마주 앉아 전략적 동반자 관계를 격상하는 공동성명을 채택하고 원자력·보훈·인프라 협력 양해각서에 서명했으며, 한국은 이를 발판으로 시노프 제2원전 사업에 첫발을 들였다. 유럽 방산시장을 두드리는 한국에 튀르키예는 협력 상대인 동시에 살아 있는 교본이기도 하다. 한 세대 만에 무기 수입국에서 수출 강국으로 올라선 나라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으로 튀르키예 국내 정치를 둘러싼 논쟁이 끝나는 것은 아니며, 논란은 나라 안팎에서 여전히 진행형이다. 다만 7·15 이후의 궤적만큼은 부인할 도리가 없다. 나라를 부수려던 그 밤이 되레 나라를 벼려냈고, 그렇게 단단해진 튀르키예가 세계가 유럽과 아시아 사이의 문을 지켜줄 누군가를 애타게 찾는 바로 이 순간, 그 문 앞에 서 있는 것이다.

15일 밤 튀르키예는 10주년을 맞는다. '의지도 우리 것, 승리도 우리 것'을 주제로 전국 81개 주와 해외 공관에서 행사가 열리고, 이스탄불 마르마라해에는 희생자 253명을 기리는 배 253척이 뜨며, 아야소피아 대사원에서는 쿠란 암송자 253명이 목소리를 모은다. 그리고 그날 밤 가장 많은 시민이 쓰러졌던 사라차네에서는 10년째 한 해도 거르지 않았던 그대로 희생자들의 이름이 하나씩 불린다. 폭격당한 의회 옆에 32개국 정상을 불러 모은 나라와 그 이름들의 주인이 목숨으로 지켜낸 나라, 결국 같은 나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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