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재원의 Now&Future] 4755조의 갈림길… 팹만 키울까, 판을 키울까

  • 완제품 국가의 함정 — AI 붐이 드러낸 한일 제조업의 민낯  

곽재원 논설위원장
[곽재원 논설위원장]
 
 
인공지능(AI) 붐이 세계 산업 지도를 다시 그리고 있다. 그런데 그 수혜의 지형도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흥미로운 비대칭이 보인다. 반도체 최강국이라 불리는 한국보다 '잃어버린 30년'의 대명사였던 일본이 훨씬 넓고 두텁게 AI 붐의 과실을 누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숫자가 말해주는 역전

일본반도체제조장비협회(SEAJ)에 따르면 2025회계연도 일본산 반도체 장비 판매액은 사상 처음으로 5조엔 벽을 넘어섰고, 2026회계연도에는 전년 대비 12% 늘어난 5조5000억엔에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 이 흐름을 타고 올해 상반기 외국인 투자자의 일본 주식 순매수 규모는 반기 기준 역대 최대치인 10조9391억엔을 기록했다.

더 눈여겨봐야 할 대목은 그 자금의 방향이다. 시장에서는 글로벌 자금이 삼성전자·SK하이닉스 같은 한국 반도체 대장주 대신 일본의 반도체 공급망 종목으로 향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도쿄일렉트론(장비), 어드밴티스트(검사장비), 스크린홀딩스·고쿠사이일렉트릭(웨이퍼 세정·열처리), 아지노모토(반도체 절연재), 후지쿠라(광섬유) 등 업종도 규모도 제각각인 이들 기업의 공통점은 단 하나, 모두 AI 반도체가 만들어지는 공정 어딘가에 걸쳐 있다는 것이다.

닛케이225지수가 사상 처음 7만선을 돌파하며 시장에서는 "일본 증시가 더 이상 전통 제조업 중심 시장이 아니라 글로벌 AI 공급망의 핵심 수혜 시장으로 재평가받고 있다"는 평가까지 나온다. 한 세대 전만 해도 엔화와 자동차가 움직이던 시장이 이제는 AI와 반도체가 지수를 결정하는 시장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완제품 챔피언' 모델의 그늘

한국 반도체 산업은 분명 세계 최고 수준이다. 제조업 생산의 약 10%, 수출의 약 20%를 차지할 만큼 비중도 크다. 하지만 이 성공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라는 소수의 완제품 기업에 고도로 집중된 구조에서 나온다. 재벌 중심의 수직계열화와 '선택과 집중', 이는 짧은 기간에 메모리 반도체 세계 1위를 만들어낸 한국형 성공 방정식이었다.

문제는 이 방정식이 AI 시대의 산업 지형과 잘 맞지 않는다는 데 있다. 2019년 일본의 수출규제 당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순식간에 위기에 몰렸던 장면을 떠올려보자. 불화수소 국산화 이후 반도체 핵심 품목의 일본 수입 비중은 2018년 34.4%에서 약 24.9%까지 낮아졌지만 AI 서버용 고성능 반도체 기판(ABF)·코터(축 연결쐐기)·디벨로퍼 같은 핵심 공정 소재·장비의 구조적 의존은 여전히 해소되지 않았다. 완제품에서는 세계를 제패했지만 그 완제품을 만드는 데 필요한 상류(上流) 생태계는 취약한 채로 남아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완제품 국가의 함정'이다. 소수의 챔피언 기업이 최종 제품 시장을 장악하는 모델은 그 시장의 사이클이 다운턴이든 지정학적 충격이든지 간에 고스란히 노출된다. 게다가 후방의 소재·부품·장비(소부장) 생태계가 얇으면 완제품 하나가 흔들릴 때 기댈 언덕이 없다.
 
일본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이긴 이유

일본의 반전은 정반대의 경로에서 나왔다. 가전과 스마트폰 같은 완제품 경쟁에서는 밀렸지만 그사이 정밀가공·소재기술의 축적은 자동차·공작기계·전자 등 여러 산업에 걸쳐 저변화되며 오히려 살아남았다. AI 붐이 터지자 이 저변이 한꺼번에 조명을 받기 시작했다.

첨단 반도체 공정에서 회자되는 "ASML이 찍고, TEL(도쿄일렉트론)이 감싼다"는 표현은 이 구조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노광은 네덜란드가, 그 앞뒤 공정의 상당 부분은 일본이 쥐고 있다는 뜻이다. 여기에 반도체 미세화가 물리적 한계에 부딪히면서 부상한 '어드밴스드 패키징' 경쟁까지 더해지면 정밀 가공에 강점을 가진 일본 장비사들의 입지는 한층 더 공고해진다.

즉 일본은 완제품이 아니라 '공정 그 자체'를 지배하는 전략을 택했다. AI 붐이 GPU로 튀든, HBM으로 튀든, 파운드리 증설로 튀든 그 흐름이 어디로 향하더라도 일본은 공정망 어딘가에 걸려 있다. 베어링 같은 지극히 평범해 보이는 부품까지 수혜 목록에 오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폭이 넓다는 것은 결국 리스크가 분산되어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협력의 실마리, 그러나 근본 처방은 아니다

물론 희망적인 신호도 있다. 지난 5월 도쿄에서 열린 '한·일 비즈니스 플라자'에서 한국 측은 "한국은 제조와 양산 역량을, 일본은 소재와 장비 경쟁력을 보유하고 있다"며 협력을 통한 공급망 구축을 제안했다. 한국의 메모리 생산력과 일본의 소부장 기술력을 결합해 새로운 생태계를 만들자는 구상이다. 경쟁 일변도로만 여겨졌던 한·일 반도체 관계를 수직적 분업 관계로 재정의하려는 시도로 방향 자체는 옳다.

하지만 협력은 완제품 국가의 구조적 함정을 근본적으로 해소해 주지는 않는다. 협력은 의존을 관리하는 방법이지 저변을 스스로 넓히는 방법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한국은 왜 반세기 가까이 반도체 완제품 챔피언을 키우면서도 그 뒤를 받치는 소부장 생태계를 두텁게 키우지 못했는가.
 
소프트웨어에 쏠린 시선, 다시 제조업으로

한국은 AI 경쟁을 이야기할 때 유독 LLM 개발이나 AI 서비스 쪽에 시선이 쏠리는 경향이 있다. 물론 중요한 영역이다. 하지만 AI 시대의 국가 경쟁력은 소프트웨어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반도체 생산능력과 제조장비, 소재, 전력 인프라, 데이터센터까지 아우르는 산업 생태계 전체가 곧 국가 경쟁력이 되는 시대다.
 
4755조원의 결단 - 방향은 옳다, 그러나 절반의 답이다

그런 점에서 지난 6월 29일 청와대에서 열린 '대한민국 대도약 3대 메가프로젝트 국민보고회'는 눈여겨볼 장면이었다. 이재명 대통령이 주재한 이 자리에서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과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나란히 등장해 각각 2655조원, 2100조원, 총 4755조원에 이르는 국내 투자 계획을 발표했다. 국가 예산의 6배가 넘는 규모다. 이 대통령은 두 회장을 향해 "국가영웅, 국민영웅"이라 칭하며 90도로 허리를 숙였다.

내용을 뜯어보면 이 투자는 단순한 반도체 증설이 아니다. 삼성은 평택·용인 기존 클러스터 확장(2030조원)에 더해 호남(광주) 신규 반도체 클러스터, 충남권 HBM 패키징 팹, 영남권 로봇·피지컬 AI·전고체 배터리 사업까지 아우른다. SK는 2035년까지 전국에 15GW 규모의 AI 데이터센터를 만드는 동시에 용인·청주·서남권을 잇는 메모리 생산벨트 구축에 나선다. 여기에 GS그룹도 강원 동해에 아시아 최대급 AI 데이터센터 캠퍼스를 짓겠다며 가세했다. 반도체 팹, HBM 패키징, 데이터센터, 로봇·피지컬 AI, 차세대 배터리 등 정부가 밝힌 삼각축(반도체·피지컬AI·AI데이터센터)대로 수도권에 갇혀 있던 투자가 호남·충청·영남으로 퍼지는 모양새다.

바로 여기서 앞서 지적한 것을 소환해 보자. 지금까지 한국의 반도체 투자는 대체로 완제품 팹 증설, 즉 '더 많이, 더 빨리 만드는' 방향에 집중되었다. 이번 메가프로젝트가 다른 것은 데이터센터·로봇·피지컬 AI·차세대 배터리까지 폭을 넓혔다는 점이다. 완제품 하나에 쏠려 있던 베팅이 처음으로 AI 생태계 전반으로 분산되기 시작한 것이다. 방향은 분명히 옳다.

다만 이 투자가 진짜 '완제품 국가의 함정'을 넘어서는 계기가 되려면 조건이 하나 더 필요하다. 일본이 넓은 수혜를 누리는 이유는 팹이 많아서가 아니라 그 팹을 돌리는 소재·부품·장비 기업의 층이 두껍기 때문이었다. 지금 발표된 4755조원 가운데 얼마만큼이 완제품 팹과 데이터센터 건설로, 또 얼마만큼이 국내 소부장·후방 산업 생태계를 키우는 쪽으로 흘러가는지는 아직 지켜봐야 할 대목이다. 팹은 지어졌지만 그 안을 채우는 장비와 소재는 여전히 수입에 의존한다면 이번 투자는 규모만 커진 '완제품 챔피언 모델의 확장판'에 그칠 수 있다.
 
만년의 약점을 넘어설 절호의 기회

그럼에도 이번 발표는 한국이 지난 반세기 동안 안고 있던 만년의 약점인 좁은 수혜 구조를 정면으로 해소할 수 있는 보기 드문 기회임은 분명하다. 국가 예산의 6배에 이르는 자본이, 그것도 정부와 양대 그룹이 정치적 명운을 걸고 한 방향으로 움직이는 순간은 흔치 않다. 이 자본이 반도체 팹 증설에만 쓰인다면 우리는 또 한번 같은 함정에 빠질 것이고 반대로 이 기회를 소부장 생태계와 후방 공급망을 두껍게 만드는 데 함께 쓴다면 한국은 처음으로 '넓은 수혜'를 가진 제조 강국으로 도약할 수 있다.

관건은 속도가 아니라 배분이다. 정부가 밝힌 것처럼 청와대에 직할 담당관을 두고 신속하게 집행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질문은 이 천문학적 자본 가운데 얼마가 완제품 팹을 세우는 데 쓰이고, 얼마가 그 팹을 채울 장비·소재·부품 기업을 국내에서 길러내는 데 쓰이느냐다. 일본이 반세기에 걸쳐 축적한 저변을 한국은 이번 메가프로젝트를 지렛대 삼아 훨씬 짧은 시간에 만들어낼 잠재력을 갖고 있다. 그 잠재력을 실제 생태계의 두께로 바꿔내느냐가 이 역사적 투자 발표를 '진짜 대도약'과 '규모만 큰 반복'으로 가르는 분수령이 될 것이다.

곽재원 필자 주요 이력 

▷전 중앙일보 경제부국장, 도쿄특파원 ▷전 서울대 공과대학 초빙교수 ▷전 한양대 기술경영학 석좌교수 ▷전 경기도 경기과학기술진흥원 원장 ▷현 광주과기원 AI정책전략대학원 특임 교수, 가천대 초빙교수 ▷현 아주경제 논설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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