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29일 청와대 영빈관, 대통령이 두 기업인에게 허리를 숙였다. 이재명 대통령은 초대형 반도체·AI 투자를 결단한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과 최태원 SK그룹 회장을 '국민 영웅'이라 칭하며 예우했다. 정부와 기업이 손을 맞잡고 '대한민국 대도약 3대 메가 프로젝트'를 선언한 이 장면은 국가의 명운을 건 승부수이자 미래를 향한 담대한 결단으로 다가왔다. 진심으로 환영한다.
김대중의 초고속통신망, 이재명의 반도체
지도자의 혜안과 담대한 인프라 투자가 국가의 운명을 바꾼 변곡점들이 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외환위기의 폐허 위에서 초고속 정보통신망 구축에 국력을 쏟아 부었던 때가 대표적이다. '산업화는 늦었지만 정보화는 앞서가자'는 결단은 오늘날 대한민국을 IT 강국이자 글로벌 콘텐츠의 산실로 밀어 올린 굳건한 토대가 되었다.
이란 전쟁이 던진 뼈아픈 질문
이 거대한 청사진이 온전히 성공하기 위해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안보적 현실이 있다. 2025년 6월 이스라엘과 미국이 감행한 이란 핵시설 정밀 타격은 현대전의 양상이 어떻게 변했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깊은 지하 시설조차 예외가 아니었다. 전쟁의 중심이 영토 점령에서 '상대국의 전략 자산 및 핵심 인프라 무력화'로 이동했다. 전쟁의 문법 자체가 바뀐 것이다.
이 가공할 현실을 한반도에 대입해 보자. 세계 최대의 메모리 반도체 생산기지가 북한의 미사일 사정권 안에 놓여 있다는 사실은 국가적 아킬레스건이다. 반도체의 심장인 평택은 휴전선에서 불과 100여 킬로미터 떨어져 있다. 신규 클러스터를 남쪽으로 분산 배치하는 것은 그 자체로 의미 있는 안보적 진전이나, 좁은 한반도의 지리적 특성상 여전히 사정권 안이라는 본질적 한계를 안고 있다.
공장 밖, 세 겹의 지정학적 급소
물리적 미사일만이 위협이 아니다. 우리는 이미 세 겹의 구조적 취약점에 노출되어 있다. 첫째, '공급망의 급소'다. 중국은 반도체용 갈륨 정제의 98%, 게르마늄의 절반 이상을 쥐고 희토류를 전략 무기화하고 있다. 둘째, '지정학적 급소'다. 워싱턴의 촘촘한 대중국 수출 통제와 베이징의 기술 자립 야심이 충돌하는 단층선 한가운데 우리 기업들이 서 있다. 세계 D램의 70%를 공급하면서도 G2의 힘겨루기에 숨통이 죄이는 역설적 상황이다. 셋째, '생산 집중의 딜레마'다. 글로벌 고객사들은 단일 지역에 첨단 생산능력이 집중되는 리스크를 극도로 경계한다. 우리의 초격차 강점은 곧 글로벌 분산 압력과 견제의 표적이 될 수 있다. 수백 조 원 단위의 투자가 집행될수록 이 세 가지 리스크 역시 비례해서 팽창한다.
'반도체 평화경제론'을 제안한다
첨단 반도체 공장은 상상을 초월하는 자원을 요구한다. 용인 클러스터 한 곳에만 원전 10기규모의 전력과 하루 150만 톤의 용수가 필요하다. 정부가 전력과 용수 공급, 원스톱 행정 지원을 책임지겠다고 약속한 것은 옳은 방향이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 가장 절대적인 인프라가 하나 빠져 있다. 바로 '평화'다. 전기와 물이 끊기면 공장이 멈추듯, 안정적인 안보 환경이 보장되지 않는다면 아무리 위대한 초격차 기술도 하루아침에 지정학의 인질로 전락하고 만다. 여전히 대한민국 첨단 산업의 최대 리스크는 북한의 핵·미사일 능력이다.
과거에는 국가 안보가 산업을 뒤에서 지켜주는 울타리였다면, 이제는 첨단 산업 자체가 국가 안보의 핵심 자산이자 무기다. 나아가 평화는 그 산업의 가치를 유지하고 글로벌 투자를 유인하는 가장 강력한 '필수 인프라'가 되었다. 기술의 초격차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우리는 세계 최고의 반도체 강국인 동시에, 전 세계 자본이 가장 안심하고 투자할 수 있는 안전지대가 되어야 한다. 한반도의 전쟁 발발 위험을 구조적으로 낮추고, 공급망을 다변화하며, 미·중 패권 경쟁 속에서 전략적 균형을 잃지 않는 고도의 외교 역량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기술 초격차 위에 '평화 초격차'를 쌓아 올릴 때 비로소 3대 메가 프로젝트는 완성된다. 대한민국을 '세계 1위 평화경제권'으로 만드는 것, 이것이 진정한 국가전략이다.
가장 진보한 공장을 위한 가장 정교한 평화의 설계도
현실은 녹록지 않다. 남북의 대화 채널은 끊겨 있고, 북미는 불통이며, 북중러는 밀착하고 일본은 군사강국의 길을 걷고 있다. 대만해협은 미중 군사 충돌의 화약고로 남아 있다. 한반도를 둘러싼 안보 불안 요인은 증폭되면 되었지 결코 완화되고 있지 않다. 이러한 아슬아슬한 환경 속에서 천문학적인 산업 베팅이 온전히 열매를 맺으려면, 무엇보다 북한을 묶어 놓아야 한다. 핵과 미사일을 가진 북한에 대한 진정한 억지력은 북한의 전략적 계산법을 근본적으로 바꿔놓는 데서 나온다. 도발과 전쟁의 끝은 체제 파멸이라는 점을 각인시키는 압도적 억제력이 기본이다. 더불어 오판과 우발적 충돌의 위험을 '제로(0)' 수준으로 수렴하게 만드는 위기관리 시스템, 즉 대화 채널과 직통 라인의 복원이 반드시 병행되어야 한다.
우리는 더 이상 강대국들이 주도하는 국제 질서의 수동적인 '페이스 팔로워'에 머물러선 안 된다. 능동적으로 판을 깔고 평화의 페이스에 시동을 거는 적극적인 자세가 필요하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남긴 '서생적 문제의식과 상인적 현실감각'은 거대한 투자 청사진과 냉혹한 안보 현실을 동시에 다루어야 하는 지금, 절실하게 요구되는 국정 지혜다.
이제 우리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질 때다. 세계에서 가장 진보한 첨단 공장을 여전히 위험한 화약고 위에 세워야 하는 숙명을 안고 있다면, 그 위험을 관리하고 평화를 빚어내는 역량 역시 세계 최고여야 하지 않겠는가. 역대급 산업 대도약의 청사진 옆에, 한반도의 구조적 위협을 걷어낼 정교한 '평화의 설계도'가 나란히 놓이기를 진심으로 기대한다.
필자 주요 이력
△한미의회교류재단 이사장(Korea Inter-Parliamentary Exchange Center, Washington D.C.) △전 국회의원 (재선, 경기 남양주을, 민주당) △2006~2007 코넬대학교 동아시아센터 방문연구원(New York, U.S.A.) △전 대통령(김대중) 비서실장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르포] 중력 6배에 짓눌려 기절 직전…전투기 조종사 비행환경 적응훈련(영상)](https://image.ajunews.com/content/image/2024/02/29/20240229181518601151_258_161.jp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