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역사의 연구』에서 문명의 흥망을 '도전과 응전'으로 풀었다. 문명은 가혹한 도전에 창조적으로 응전할 때 융성하고, 응전에 실패하면 무너진다. 2026년 대한민국이 마주한 도전은 가히 '복합위기'다. 미국의 신뢰 하락, 더 강해진 중국, 기사회생한 북한, 군사대국화하는 일본, 그리고 에너지·공급망 충격까지 다섯 개의 파도가 한꺼번에 밀려오고 있다. 관건은 도전의 강도가 아니라 우리의 응전 능력이다. 낡은 지도로는 새로운 세계를 읽을 수 없다.
균열은 기존 질서의 축이었던 미국 내부에서 시작됐다. 미국은 여전히 세계 최대 경제대국이지만, '미국의 약속을 믿을 수 있는가'라는 신뢰부터 흔들리고 있다. 최근 퓨리서치 조사에서 한국인의 대미 호감도와 미국의 국제 리더십에 대한 신뢰는 크게 하락했고, 입소스 조사에서는 국제사회에 긍정적 영향을 미치는 나라로 중국을 꼽은 응답이 미국을 앞서기까지 했다. 관세 전쟁과 방위비 청구서, 동맹을 경시하는 거래적 외교가 낳은 결과다. 여기에 이란 전쟁의 여파로 국제에너지기구가 '수십 년 만의 최악' 이라 부르는 원유 공급 차질까지 겹쳤다. 소비 에너지의 90% 이상을 해외에, 그것도 원유 대부분을 중동에 의존하는 한·일 양국의 처지는 그 어느 때보다 위태롭다.
반면 중국은 산업과 기술 경쟁력을 빠르게 재정비하며 새로운 전략적 영향력을 구축했다. 세계 제조업 생산의 약 30%를 차지해 미국·일본·독일을 합친 것보다 많고, 370척이 넘는 세계 최대 규모의 해군을 운용하며, 2030년경에는 1천 기 수준의 핵탄두를 보유하리라는 것이 펜타곤의 전망이다. 전기차·배터리·태양광 생산 세계 1위에 희토류 정제의 90%를 쥐고 있으며, 갈륨·게르마늄·희토류 수출통제로 서방 첨단산업의 목줄을 죄고 있다. 21세기 패권은 항공모함 숫자가 아니라 공급망의 병목, 즉 초크포인트를 누가 쥐느냐에 달려 있음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일본은 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공급망 재편과 안보 전환에 나선 나라다. 2010년 센카쿠 사태 이후 중국산 희토류 영구자석 의존도를 31%까지 낮췄고, 2026년 방위예산은 사상 처음 9조 엔을 돌파했다. 평화헌법 9조 개정이 추진되고 자위대 장교가 나토에 파견됐다. 그러나 파이낸셜타임스가 꼬집었듯 일본은 '트럼프에게 노(No)라고 말할 수 없는 나라'다. 미국 일변도에 묶인 탓에 비용은 더 내고 족쇄는 깊어지는데, 정작 미국을 신뢰한다는 일본인은 20%에 그친다. 다카이치 총리의 '대만 유사시 존립위기사태' 발언으로 중국의 경제 보복까지 자초했다. 일방 편승 외교가 다다른 막다른 길이다.
한국은 일본과 비슷한 지정학적 압박에 놓여 있으면서도, 공급망 측면에서는 오히려 더 취약하다. 주요 희소금속 31종 가운데 16종의 최대 공급국이 중국이다. 일본이 의존도를 낮추는 동안 한국의 중국산 희토류 영구자석 의존도는 88%까지 치솟았고, 갈륨의 98%, 흑연의 97%, 마그네슘의 84%를 중국에 기대고 있다. 2021년 요소수 사태를 기억하자. 중국이 요소 수출을 멈추자 전국의 트럭이 멈춰 설 뻔했다. 미사일이 날아오지 않아도 산업이 질식할 수 있다는 공급망 전쟁의 예고편이었다.
그럼에도 우리에게는 일본에 없는 강점이 있다. 첫째, 미국이 절실히 원하는 반도체와 조선이라는 '산업 지렛대'다. 한화오션의 미국 필라델피아 조선소 인수와 미 해군 함정 정비 수주가 보여주듯, 이 지렛대를 활용하면 원자력추진잠수함 승인이나 핵주기 협상 같은 실질적 성과를 끌어낼 수 있다. 둘째, 경주 APEC을 계기로 시진핑 주석의 11년 만의 방한을 성사시키며 대중 정상외교를 복원했다. 셋째, 한반도 문제의 당사자인 데다 과거사의 짐이 없어 아시아 중견국 연대를 주도하기에도 유리하다.
빅터 차 CSIS 한국석좌는 '전략적 모호성'을 버리고 미·일과 함께 중국에 맞서라고 조언한다. 사드 보복 당시 우리 기업들이 중국에서 쫓겨나듯 철수했던 현실을 직시하라는 경고는 경청할 만하다. 그러나 그 처방은 절반만 맞다. 위협을 명확히 인식하는 것과 특정 진영에만 서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의존하면 결국 포획된다. '동맹이냐 자주냐'의 이분법이야말로 일본을 외길로 몰아넣은 낡은 프레임이다.
실용외교의 원형은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있다. 그는 한미동맹을 국익의 닻으로 삼되, 그 닻에 스스로를 묶어 두지 않았다. 굳건한 대미외교 위에서 대화정책으로 평양의 문을 열었고, 김대중-오부치 선언으로 과거사와 미래협력의 균형을 잡았으며, 4강 외교로 외교의 지평을 넓혔다. '서생적 문제의식과 상인적 현실감각'의 원칙과 실리 외교야말로 창조적 응전의 교과서다. 안보와 경제를 아우르며 사안별로 실리를 챙기는 이재명 정부의 실용외교와도 맞닿아 있다.
냉전 시대의 외교는 어느 편에 설 것인가가 중요했다. 그러나 복합위기 시대의 외교는 편을 정하는 일보다 국익을 극대화할 전략 공간을 확보하는 일이 더 중요하다. 동맹은 강화하되 선택지는 넓혀야 하고, 가치를 추구하되 경제안보의 현실을 외면해서도 안 된다. 김대중 정부가 외환위기와 한반도 냉전구조라는 이중의 위기 속에서 국익과 평화를 함께 일궈냈듯, 오늘의 대한민국도 원칙과 실용을 결합한 새로운 국가전략을 요구받고 있다. 국익우선 외교는 강대국 사이에서 줄타기하는 외교가 아니라, 강대국들이 한국을 필요로 하게 만드는 능동적 외교다. 대한민국의 미래는 미국과 중국 가운데 한쪽을 고르는 데 있지 않다. 반도체·조선·배터리·AI·문화산업을 지렛대 삼아 양쪽 모두가 협력을 원하는, 무시할 수 없는 나라가 되는 데 있다. 그것이 복합위기의 시대에 한국이 가야 할 더 넓은 길이다.
필자 주요 이력
△한미의회교류재단 이사장 (Korea Inter-Parliamentary Exchange Center, Washington D.C.) △ 전 국회의원 (재선, 경기남양주을, 민주당) △ 2006 – 2007 코넬대학교 동아시아센터 방문연구원 (New York, U.S.A.) △ 전 대통령(김대중) 비서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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