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건의 심리렌즈] 무료급식 봉사인데…'밥 위 케이크' 원성은 왜 나왔을까?

  • 음식의 질서가 깨질 때 작동하는 혐오와 온라인 탈억제 효과

안나의 집에서 배식한 무료급식 사진김하종69·빈첸조 보르도 신부 사회관계망서비스
안나의 집에서 배식한 무료급식 [사진=김하종(69·빈첸조 보르도) 신부 사회관계망서비스]

밥 위에 케이크가 올라갔다. 그 상황에서 누군가는 선의를, 누군가는 허술함을 봤다.

경기 성남에서 노숙인과 취약계층을 위한 무료급식을 이어온 복지시설 '안나의 집'은 최근 뜻밖의 비난을 받았다. 식판에 자리가 부족해 케이크 한 조각을 밥 위에 배식했다는 이유 때문이다.

이탈리아 출신 김하종(69·빈첸조 보르도) 신부는 SNS를 통해 "생일은 1년에 한 번이지만 안나의 집은 매일이 생일"이라며 후원받은 케이크를 나누는 기쁨을 전했다. 26년간 한국에서 노숙인과 취약계층을 돌봐온 이가 건넨 감사의 말이었다.

그런데 게시물의 댓글 속 시선은 케이크가 아니라 배식 방식에 꽂혔다. "왜 밥 위에 케이크를 주느냐", "무슨 조합이냐", "나중엔 김치찌개에 넣어서 주겠다", "진심 혈압 오르네" 등의 반응에 이어 '개밥'이라는 표현까지 등장했다.

선행을 욕되게 한 말이었음은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한다. 다만 이 댓글들을 '선의를 부정하는 사람들'로 묶어버리면, 들여다볼 만한 배경이 사라진다. 문제의 발언을 무조건 받아주자는 뜻이 아니라, 그저 이 반응이 왜 나왔을지 이해해보자는 제안이다.

 
안나의 집에서 케이크를 배식하는 모습 사진김하종69·빈첸조 보르도 신부 사회관계망서비스
안나의 집에서 케이크를 배식하는 모습 [사진=김하종(69·빈첸조 보르도) 신부 사회관계망서비스]

그들이 겨냥한 건 나눔이 아니라 나눔의 모양이었다. 정말로 그 사진이 불편했을 수 있고, 밥 위에 케이크가 놓인 모습이 이상하게 보였을 수 있다.

누군가에게 음식은 '원래 있어야 할 자리'가 중요하다. 음식에는 온도와 질감, 순서가 있다는 생각. 따뜻하고 습한 밥 위에 달고 부드러운 케이크가 닿아 있는 모습은 그런 사람에게 질서가 흐트러진 모습처럼 보였을 수 있다. "왜 저렇게 놨지"라는 반응이 자동적으로 튀어나오는 것이다.
 
▲ 불쾌감이 상식·도덕의 옷을 입는 순간

사람은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사물을 분류한다. 밥은 식사, 케이크는 디저트다. 밥은 한 끼로, 케이크는 끝맺음으로 기억된다. 둘이 맞닿는 순간 어떤 사람에겐 맛의 문제가 아니라 "이 조합은 허용 가능한가"라는 감각적 거부감이 먼저 올라올 수 있다.

민트초코, 파인애플 피자 논쟁이 예상보다 크게 번지는 이유도 비슷하다. 원래 떨어져 있어야 한다고 느끼는 것들이 섞였을 때 생기는 불쾌감. 어떤 사람들은 맛 자체보다 그 조합이 맞는지에 더 강하게 반응한다.

 
사진안성재 유튜브 영상 캡처
[사진=안성재 유튜브 영상 캡처]

여기까진 이상한 일이 아니다. 밥 위 케이크가 불편할 수 있고, 따로 담았으면 더 좋겠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불쾌감을 자신의 취향으로 남겨두는 데 서툰 사람들은, "난 저 조합이 싫다"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 더 그럴 듯한 문장을 가져온다.

한쪽에는 상식적인 지적이 있다. 음식에 암묵적인 자리가 있다고 믿고, 그 질서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왜 굳이 밥 위에?"라는 반응이 나올 수 있다. 이때 댓글을 단 사람은 자신이 악플을 쓴다고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너무 당연한 말을 한다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있다. "선의를 비난하는 게 아니라 기본을 말하는 것"이라고 여겼을 수 있다.

다른 한쪽에는 불쾌감의 도덕화가 있다. "저건 대접이 아니다", "가난한 사람이라고 아무렇게나 줘도 되느냐"로 넘어가는 순간 이야기는 달라진다. 약자의 존엄을 말하는 것처럼 들리지만, 심리적으로는 개인적 거부감이 도덕적 판단으로 승격되는 상황일 수 있다. 존엄, 배려, 예의, 상식.

그렇게 "나는 저 배식이 싫다"는 말은 "저건 개밥"이라는 말로 바뀐다. 불쾌감이 도덕의 옷을 입는 순간이다. 하지만 이 정당화는 곧 모순에 빠진다. 가난한 이의 존엄을 말한다면서 정작 그 식판을 '개밥'이라고 부른다. 대접의 품위를 따지면서, 가장 모욕적인 언어로 식사 현장을 깎아내린다. 존엄을 말하는 댓글이 존엄을 훼손하는 것이다.
 
▲ 온라인 탈억제 효과

여기에 SNS라는 공간의 특성도 한몫한다. 댓글을 단 사람들 중 상당수는 김하종 신부 앞에서 같은 말을 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신부님, 이건 개밥 같네요"…얼굴을 마주한 자리에서 이런 말을 스스럼없이 꺼내는 사람은 많지 않다.

오프라인에서는 감정과 표현 사이에 작은 제동장치가 생긴다. 이 말이 상대에게 어떻게 들릴지, 내가 너무 심한 말을 하는 건 아닌지, 적어도 한 번은 머뭇거린다.

온라인에서는 그 과정이 짧아진다. 화면이 끼어들면 사람은 자기 말이 누군가에게 닿는다는 생각을 잃기 쉽다. 익명성과 물리적 거리감 때문에 현실에서는 하지 않을 충동적 행동이나 거친 발언을 쉽게 표출하는 온라인 탈억제 효과(Online Disinhibition Effect)로 해석할 수 있다.

특히 SNS에서는 의견보단 즉각적인 반응이 더 잘 퍼진다. "왜 이렇게 배식했을까"보다 "밥 케이크는 무슨 조합임?"이 더 빨리 퍼진다. "식판 구조상 어쩔 수 없었을 수도 있다"보다 "나중엔 김치찌개에 넣어서 주겠다"가 더 웃음을 얻는다. 논증보다 리액션이, 조심스러운 말보다 과장된 말이 주목받는다.

 
사진사회관계망서비스
[사진=사회관계망서비스]

그러다 보면 댓글은 순간의 느낌을 주고받는 놀이가 된다. 이상한 조합을 보면 "이 조합 실화냐"고 반응하고, 낯선 장면을 보면 "이건 선 넘었지"라고 받아친다. 식판 사진에 달린 댓글 역시 무료급식소를 공격하려는 의도까지는 아니었을 수 있다. 그저 괴식을 본 것처럼 호들갑을 주고받는 온라인식 놀이로 여겼을 수 있다.

개별 댓글은 농담일 수 있지만, 수백 개가 모이면 분위기가 된다. 분위기는 여론이 되고, 여론은 누군가의 선의를 심판한다. 밥 위 케이크가 어색해 보였을 수 있지만 그 어색함이 모욕적인 말로 바뀌는 순간, 그건 더이상 취향의 표현에 머물지 않는다.

물론 좋은 뜻으로 한 일이라도 누군가를 불편하게 할 수 있고, 개선할 부분이 있다면 고치는 것이 맞다. 무료급식이라고 해서 모든 방식이 비판에서 면제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비판에는 맥락이 필요하다. 식판에 자리가 부족했던 사정, 후원받은 케이크를 나누려 했던 마음, 26년간 이어온 봉사의 시간, 그 모든 맥락을 지운 채 사진 한 장만 붙들고 '개밥'이라고 부르는 건 비판이 아니다. 불쾌감의 배설이자, 선의의 현장을 소비자 리뷰처럼 평가하는 태도다.
 
▲ 선의마저 서비스가 된 시대

우리는 언제부턴가 모든 것을 서비스처럼 바라보는 데 익숙해졌다. 음식은 보기 좋아야 하고, 설명은 친절해야 하고, 경험은 매끄러워야 한다. 누군가 굶지 않도록 밥을 나누는 현장에서도 묻는다. 

"왜 이렇게 담았지?"
"왜 더 보기 좋게 못 했지?"
"왜 내 기준에 안 맞지?"

틀린 질문은 아니지만 너무 빠르다. 밥 위 케이크는 완벽한 배식이 아니었을지 몰라도, 그 어색한 한 조각이 누군가에겐 그날의 유일한 단맛이었을 수 있다. 끼니를 때우러 온 자리에서 예상치 않게 받은 축하였을 수 있다.

하지만 그 따뜻함은 쉽게 지워졌다. 품평부터 꺼내는 손쉬운 엄격함 때문에. 장난처럼 던진 말의 무게를 모르는 무감각 때문에. 아무것도 하지 않은 사람이 가장 먼저 정답을 말하려는 자신감 때문에.

케이크는 밥 위에 놓였지만, 모욕까지 그 위에 올릴 필요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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