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판을 새로 짜자] 특별기획 칼럼 ⑤ 혁신시장과 글로벌 무대로…금융의 물꼬를 틀어야 한다

챗GPT로 생성한 이미지
[챗GPT로 생성한 이미지]

역사적으로 강대국은 예외 없이 강력한 금융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다. 금융은 국가 성장과 글로벌 패권을 뒷받침하는 핵심 인프라였다. 19세기 영국을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만든 힘은 ‘더 시티(The City)’였으며, 20세기 이후 미국이 초강대국으로 부상한 배경에도 월가(Wall Street)가 있었다. 

경제의 핏줄인 금융이 제 역할을 할 때, 국가는 강성하고 기업은 투자를 마음껏 할 수 있으며 국민의 삶은 풍요로울 수 있다. 그렇다면 2026년 대한민국의 금융은 어떠한가. 금융은 국가와 민간경제에 활력을 불어넣는 혈관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고 있는가. 선뜻 긍정하기는 어렵다. 은행들은 매년 수십조원의 이익을 내고 증권사들도 사상 최대 실적을 경신하고 있지만, 정작 국가 경제의 미래 성장동력을 만드는 데 얼마나 기여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남는다. 혁신기업 대신 부동산, 글로벌 시장 대신 국내 시장에 안주했던 게 우리 금융의 현실이다. 

대한민국의 새로운 100년을 위해 자본시장과 금융의 역할을 재정립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핵심은 패러다임 전환에 있다. 부동산 대신 혁신과 생산적 영역으로, '좁은 우물'(한국시장) 대신 글로벌 시장으로 돈(금융)의 물꼬를 틀어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일관된 주장이다. 

◆ '부동산'에  매몰된 금융
영국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대표 저서 〈고용, 이자 및 화폐에 관한 일반이론〉에서 "한 나라의 자본 발전이 카지노의 부산물이 되면 경제는 제대로 작동하기 어렵다"고 경고했다. 한 나라의 자본이 생산적 투자 대신 투기로 흘러들어가선 안 된다는 지적이다. 케인스가 말한 '카지노'가 한국에서는 '부동산'이었다. 

경제가 성장하고 국민 소득이 증가할수록 자산이 기업 투자와 금융시장으로 유입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수십 년 동안 반대 현상이 반복됐다. 가계와 기업의 자금은 생산 현장보다 부동산 시장으로 집중됐다. '부동산 공화국', '아파트 공화국'이란 오명은 그렇게 생겼다. 

부동산 공화국을 키운 건 금융이다. 은행들은 기업의 성장 가능성을 평가해 자금을 공급하기보다 담보가 확실한 부동산 대출에 집중했다. 예대마진 중심의 안정적인 수익구조에 안주한 결과다. 십수년간 "은행이 손쉬운 영업만 한다"는 비판에도 여전히 예대마진 수익은 은행 이익의 80~90%에 달한다. 그 이익의 상당부분이 주택담보대출인 것도 변함 없다. 금융이 경제의 혈관이 아니라 부동산 가격 상승을 증폭시키는 펌프 역할만 한다는 비판이 쏟아지는 이유다. 

증권사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불과 몇 년 전까지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은 증권업계의 대표적인 수익원이었고, 지금도 수십조원의 PF 위험노출액(익스포저)을 안고 있다. 혁신기업에 대한 투자보다 부동산 금융에 더 많은 역량을 투입했던 것이 현실이다.

◆ '우물 안 개구리' K-금융
부동산에 매몰된 금융 구조는 한국 금융산업의 글로벌 경쟁력 정체로도 이어졌다. 비교지표가 이를 보여준다. 지난해 스위스의 IMD 국가경쟁력 평가에서 한국은 69개국 가운데 27위를 기록했다. 그러나 금융 부문 경쟁력은 33위에 머물렀다. 미국 시장조사기관인 S&P글로벌마켓인텔리전스가 발표한 '2026년 세계 100대 은행'에서 50위 안에 든 한국 은행은 없다. KB금융이 67위로 가장 높을 뿐이다. 

은행들은 20년 넘게 동남아시아 중심의 해외 진출을 꾀하고 있지만 글로벌 플레이어로 평가받기에는 여전히 갈 길이 멀다. 증권업계 역시 미래에셋 등 일부 회사를 제외하면 대부분 국내 시장에 머물러 있다. 근본적인 이유는 수익 구조에 있다. 은행들은 기술력과 성장성을 평가해 투자하기보다 담보 중심 영업에 익숙해졌다. 증권사들도 오랫동안 위탁매매(브로커리지)에 의존해왔다. 거래대금이 늘면 수익이 증가하고 시장이 침체되면 실적도 악화되는 구조다. 최근 코스피 강세장이 이런 구조적 한계를 잠시 가리고 있을 뿐이다.

더구나 AI와 바이오, 로봇, 양자컴퓨팅, 우주산업 등 미래 산업 경쟁이 본격화되는 시대다. 미래 산업은 대부분 초기 단계에서 막대한 자금이 필요하지만 성공 여부를 확신하기 어렵다. 결국 위험을 감수하는 모험자본이 충분히 공급되지 않으면 혁신도, 국가 경쟁력도 기대할 수 없다. 미국의 실리콘밸리를 키운 건 정부가 아니었다. 혁신기업의 미래를 보고 투자한 벤처캐피털과 투자은행(IB)들이었다. 20~30년 뒤를 내다본 이들의 투자가 엔비디아와 알파벳(구글) 등 '빅테크'라는 결실을 맺었다. AI로 대표되는 미래 산업의 시대, 기존과 같은 금융으로 대한민국은 경쟁력을 얻을 수 없다. 

◆금융의 물꼬를 틀어라
결국 새로운 대한민국의 기틀은 금융 인프라의 재구축에서 시작해야 한다. 아파트에서 기술로, 토지에서 혁신으로, 투기에서 투자로 금융의 물꼬를 돌려놓아야 한다. 대한민국이 혁신기술·미래산업으로 자금이 흘러가는 생산적 금융국가로 도약할 수 있는지가 여기에 달려있다.

그러기 위해서 금융은 더 이상 돈을 보관하고 빌려주는 산업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국가의 미래 산업을 키우고 성장의 방향을 결정하는 전략 산업으로 거듭나야 한다. 은행은 담보보다 기술과 성장 가능성을 평가하는 금융기관으로 변화해야 하고, 증권사는 거래를 중개하는 역할을 넘어 혁신기업의 성장을 지원하는 자본 공급자로 진화해야 한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다. 지난(至難)한 과정이다. 역대 정부에서 반복적으로 시도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던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포기해선 안될 일이다. 마침 우리에겐 천재일우(千載一遇)의 기회가 찾아왔다. 한국 증시가 오랜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시간을 지나 '코리아 프리미엄'의 시대로 진입했다. 변방에 머물렀던 한국 증시는 이제 세계 7위(시가총액 기준)로 올라섰다.

정부도 모처럼 찾아온 변화의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는 방침이다. 부동산을 넘어 생산적 금융으로 은행과 자본시장의 물길을 돌릴 다양한 방안을 내놨다. 3년 후까지 은행·증권을 통해 모험자본에 60조원을 투입하고, 150조원 규모의 국민성장펀드 조성에도 나섰다. 

게다가 생산적 금융으로의 전환은 국민의 자산 형성에도 긍정적이다. 그동안 한국은 기업 성장의 성과가 자본시장을 통해 국민 전체의 자산 증가로 연결되는 구조가 충분히 정착되지 못했다. 부동산에 매몰된 금융이 제 역할을 한다면 국민연금과 퇴직연금, 장기 투자자금이 혁신기업으로 흘러가고, 그 성과가 국민의 자산 증대로 이어지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 수 있다. 특히 청년세대에게는 부동산(집)이 아닌 금융이라는 '성공의 사다리'를 제공하는 역할도 충분히 가능하다. 

대한민국은 대전환기에 서 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글로벌 반도체 시장을 주도하고, K-방산이 세계를 주름잡는 중이다. K팝 등 K-콘텐츠도 글로벌 시장을 휩쓸고 있다. 이제 K-금융의 차례다. 부동산과 한국시장이란 좁은 우물에서 벗어나 혁신과 미래를 키우는 금융 패러다임의 전환을 당장 시작해야 한다.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컴패션_PC
댓글0
0 / 300

댓글을 삭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로그인 후 댓글작성이 가능합니다.
로그인 하시겠습니까?

닫기

이미 참여하셨습니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