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슈퍼카 제왕 페라리가 첫 순수 전기차 '루체'를 공개했다. 교황 레오 14세를 직접 운전석에 태우고 차량 운전대까지 뽑아 선물하는 퍼포먼스에도 불구하고 세간의 평가는 냉정했다. 자동차 시장의 전동화는 피할 수 없는 흐름이지만 "더 이상 페라리답지 않다"는 비판이 적지 않다. 수십 년 동안 쌓아온 브랜드 정체성이 흔들리고 있다.
지난 14일(현지시간) 프랑스 사르트 서킷에서 막을 내린 '2026 르망 24시' 레이스 하이퍼카 클래스에서 제네시스 마그마 레이싱 팀의 19호 차량이 종합 13위로 최종 결승선을 통과했다. 현대차 제네시스가 세계 최고 권위의 레이싱 대회에서 거둔 데뷔 성적이다.
앞서 두 대의 경주차를 모두 예선 톱10에 올려놓으며 경쟁자들을 놀라게 했다. 첫 출전이라는 부담 속에서도 안정적인 완주 성과를 거두며 "현대차는 안 된다"는 선입견을 깨뜨렸다. 우승과는 거리가 있었지만 모터스포츠 본고장에서 새로운 역사의 시작을 알리기에는 충분했다.
두 사례는 산업계에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레거시란 무엇인가.
스마트폰 시대가 열리자 노키아와 블랙베리는 몰락했다. 디지털 카메라가 등장하자 코닥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인공지능(AI) 시대는 이런 변화의 속도를 더욱 빠르게 만들고 있다. 생성형 AI와 로봇, 자율주행, 피지컬 AI가 산업 질서를 다시 쓰고 있다.
한국 경제도 예외가 아니다. 최근 우리나라 산업 경쟁력의 상징은 단연 메모리 반도체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AI 시대 최대 수혜 기업으로 평가받는다. 특히 고대역폭메모리(HBM)는 AI 반도체 경쟁의 핵심 부품으로 자리 잡으며 한국 반도체 산업의 위상을 다시 끌어올리고 있다.
지금의 경쟁력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1980년대부터 이어진 과감한 투자와 연구개발, 수많은 실패를 감내한 결과다. 당시 세계 시장은 일본 기업들이 지배했다. 한국 기업은 후발주자였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40여 년 동안 축적한 기술과 생산 역량은 결국 세계 메모리 시장의 판도를 바꿔 놓았다.
레거시는 영원하지 않다.
중국은 막대한 자금을 앞세워 반도체 자립에 나서고 있다. 미국은 AI 반도체 패권을 무기로 공급망 재편을 주도한다. HBM 시장에서도 기술 경쟁은 갈수록 치열해지고 있다. AI 슈퍼사이클이 한국 반도체 산업에 기회인 동시에 위기인 이유다.
페라리의 고민도, 제네시스의 도전도 결국 같은 질문으로 귀결된다.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면 레거시는 무겁지만 내려놓을 수도 없는 짐일 뿐이다. 반대로 변화 속에서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내면 레거시는 더욱 강력한 경쟁력으로 작용한다.
한국 산업 역시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반도체와 자동차, 조선 등 수십 년에 걸쳐 쌓아온 산업적 자산은 소중하다. 그러나 지키기만 해서는 살아남을 수 없다. AI와 로봇, 미래 모빌리티 같은 새로운 영역에서 또 다른 성공 경험을 만들어야 한다.
레거시는 과거의 영광으로 치부하며 박물관에 보관할 유물이 아니다. 끊임없는 혁신으로 미래까지 연결될 때 빛을 발할 가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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