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환 칼럼] 한국 외교에는 여전히 러시아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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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병환 유라시아전략연구소장·전 주러시아 공사]
 
  
‘국익 중심 실용 외교’를 내건 이재명 정부가 출범한 지 1년이 지났다. 새 정부의 실용외교는 일반적으로 성과를 거둔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런데 성과는 미국, 중국, 일본에 대해서만 이야기되고 있다. 지난해 새 정부의 출범에 즈음하여 많은 사람들이 윤석열 정부의 신중하지 못한 외교로 불필요하게 악화된 한·러 관계도 달라지길 기대하였으나 1년이 지난 현시점에서 볼 때 정부가 그런 기대에 부응하였다고 평가하기는 어렵다.
 
러시아는 실용 외교 대상이 아닌가?
 
현 정부가 외교 기조로 내세운 ‘국익’과 ‘실용’은 대러 외교에는 적용되지 않고 있다. 최근 언론 보도에 따르면 청와대 관계자가 “정부는 러시아와의 소통 창구를 완전히 차단하지 않고 공식적인 외교 채널을 통해 안정적인 관계 관리를 지속하고 있다. 주러시아 대사관 등 기존 채널을 활용해 현지 우리 국민과 진출기업의 권익 보호를 위한 필수적인 소통을 이어가는 중”이라고 하였는데 과연 정부가 현지 ‘우리 국민과 진출기업의 권익 보호’를 위해 무언가를 하고 있을까?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이래 한국은 교전 당사국이 아님에도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원은 물론 러시아에 대해 금융 거래 규제, 수출 통제, 직항노선 폐쇄 등 적대적인 태도를 취했다. 이에 따라 러시아는 한국을 ‘비우호국’으로 지정하고 비우호국인 한국 국민과 기업에 대해 이런저런 불이익을 주고 있는데, 이재명 정부에 와서도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정부가 적극 노력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들리지 않는다. 대러 수출 통제(1402개 품목)로 인한 수출 감소는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직전인 2021년과 비교하면 4년간 최소한 140억 달러에 달한다. 정부는 조금이라도 문제가 될 것 같으면 대러 수출을 불허하였고 제3국을 통한 우회 수출은 찾아내서 처벌하겠다고 엄포를 놓기도 하였다.
 
 
현대자동차가 러시아에 투자한 금액은 원화로 1조원에 이르는데 2023년 12월 단돈 14만원에 2년 내 재매입 조건으로 팔고 일단 철수하였으나 이제 2년이 경과하여 러시아 생산 기지를 회복할 수 없게 되었다. 삼성 및 LG는 생산 기지를 매각하지는 않았지만 제재 때문에 현재 생산라인을 가동하지 못하고 있는데 이로 인한 기대이익의 손실도 만만치 않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길어지면서 현재 러시아 시장에서는 중국 기업이 약진하고 있다. 앞으로 한·러 관계가 정상화되더라도 우리 기업들이 종전의 위치를 회복하는 데는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직항로의 중단으로 러시아를 왕래하는 일반 국민과 기업인들이 겪는 불편과 추가 비용도 무시할 수 없으며 이로 인한 민간 교류의 위축 또한 적지 않은 손실이다. 현재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려면 배편을 이용해야 하는 실정이다.
 
‘북극 항로 개척’은 국정과제이다. 지난 2월 해수부 발표로는 9월 시범 운항을 목표로 상반기 중에 러측과 협의한다고 하는데 어떤 진전이 있는지 궁금하다. 현재 북극항로는 러시아가 운항 허가 및 항로 관리권을 쥐고 있어 러측의 협조가 필수적이다. 그런데 작년 말 어느 민간 단체에서 주최하는 북극 항로 세미나에 러측에서는 장관급 인사가 오기로 되어 있었으나 해수부 장관과의 면담 요청이 거부되자 방한이 취소되었고 행사 자체도 무산되었다. 이런 일이 있을 때는 보통 관계부처 협의가 있기 마련인데 아마도 외교 부처 쪽에서 소극적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우선 할 수 있는 일을 적극 찾아보아야 한다
 
필자는 모든 대러 제재를 당장 해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정부가 공식적으로 결정하고 그렇게 발표한 제재에 해당되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융통성 있게 판단해야 한다고 주장할 뿐이다. 그러한 태도가 ‘실용 외교’ 아닌가? 정부에서 외교와 직접 관련 없는 부처 또는 기관의 공무원들이 러측을 접촉하면 안 된다고 발표한 적이 있었는가? 지난 정부 때 형성된 대러시아 접촉 기피 현상이 왜 현 정부에서도 유지되어야 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물론 공무원들 특유의 조심스런 성향도 작용하였을 것이다. 윤석열 정부 때 일이지만 문화 교류에 있어서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러시아의 세계적인 발레리나인 스베틀라나 자하로바의 내한 공연이 2024년 4월에 있을 예정이었는데 석연치 않은 이유로 취소되었다. 이 과정에서 정부는 발레 공연은 제재 대상이 아님을 분명히 하여 중심을 잡아 주었어야 했다. 그렇다면 이제라도 새 정부는 무엇이 금지 또는 불허되는 것인지 명확하게 구분해 주어야 할 것이다.
 
대러시아 관계에 있어 우리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일본은 달리 대처하고 있다. 비근한 예로 지난 5월 하순 일본 정부의 고위 대표단이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일본 기업들의 자산 보호에 대해 러측과 협의하였다고 한다. 일본 기업들은 사할린 가스 프로젝트에서 철수하지 않았다. 일본은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직후 G7의 제재에 맞춰 러시아산 원유 수입을 사실상 크게 줄이거나 중단했으나, 예외적으로 사할린 프로젝트의 부산물 원유는 일본의 LNG 공급 유지와 직결된다는 이유로 G7 국가들로부터 예외를 인정받아 계속 수입하고 있다.
 
한국이 대러 제재를 취한 것은 미국의 입장을 고려한 결과이다. 미국이 우크라이나 전쟁과 관련하여 한·러 관계 개선에 호의적이지 않고 우리 정부는 그러한 미국의 입장에 유의하고 있는 것으로 사람들은 이해하고 있다. 그런데 지난해 8월 알래스카에서 있었던 트럼프-푸틴 회담에서 미측은 우크라이나 전쟁의 종전 의지를 분명히 밝히고, 러측에 “중국과 거리를 두면 제재 완화”라는 방안을 제안하고 나아가 협력도 거론하였다고 한다. 지난 3월에는 12년 만에 러시아 하원 대표단이 워싱턴을 방문하여 미국 의원, 행정부 관계자 및 학자 등과 접촉하여 양국 관계 개선에 대해 의견을 교환하였다. 또한 최근 언론 보도에 따르면 미국의 알래스카와 러시아의 추코트 반도를 잇는 베링해 해저터널 건설을 위한 협정이 체결될 예정이라고 한다.
 
사실 한국의 대러 제재는 러시아의 전쟁 수행 능력에 영향을 주는 실질적 효과보다는 서방의 대러 압박에 동참한다는 상징적 의미가 더 크다. 실제로 러시아는 무기 제조에 필요한 부품들을 중국으로부터 공급받고 있기 때문이다. 새 정부는 주한 미군 감축 및 주둔비용 분담금 증액, 전작권 회수 등과 관련하여 이전 정부와는 다른 태도를 보이고 있는데, 한·러 관계는 그러한 이슈들보다 훨씬 덜 예민한 만큼 무작정 기다리기보다는 미국에 대해 무언가를 타진해 볼 수는 있는 것 아닌가? 게다가 이번 정부 들어와서는 러측과의 고위급 물밑 접촉도 전혀 없다는 이야기까지 들린다.
 
한·러 관계 개선은 북·러 밀착 견제에도 필요하다
 
한국은 북한이 러시아에 무기를 보내고 병력을 파견하면서 러시아와 북한이 2024년 ‘포괄적 동반자 협정’을 체결하는 등 양국 관계가 긴밀해지고 있는 데 대해 우려하고 있다. 특히 러시아가 북한에 대해 보상으로 고도 정밀 무기 기술을 넘겨주지는 않을까 경계하고 있다. 북·러 군사협력이 긴밀해질수록 우려만 할 것이 아니라 이를 억지할 방안을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러시아 정부는 여러 차례 한국과의 관계 정상화에 준비가 되어 있다는 입장을 표명한 바 있다. 더욱이 러시아의 기본 입장은 한국과 북한 어느 한쪽을 택하기보다는 양쪽 모두와 교류와 협력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즉 한·러 및 북·러 관계는 제로섬 게임이 아니다. 따라서 북·러가 밀착하므로 대러 관계 개선을 미룰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라면 한국이 우려하는 상황이 펼쳐지는 것을 막을 수 없다.
 
그간 러시아는 2016년 ‘북·러 불법 체류자 상호인도 협정’이 체결된 뒤에도 중국과는 달리 탈북민에 대해 범죄 혐의가 없는 한 북송하지 않고 러시아 국내법과 인도주의 원칙에 따라 유엔난민기구(UNHCR) 측과 협의하여 처리하였다. 즉, 러시아 당국의 배려로 적지 않은 수의 북한 벌목공들이 한국에 올 수 있었다. 또한 러시아 당국은 탈북민들을 지원하는 한국인 선교사들의 활동을 묵인하였다. 그런데 한·러 관계가 악화되면서 한국인 선교사들의 활동이 된서리를 맞고 있다. 2024년 3월 타스 통신의 보도에 따르면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 체류 중인 한국인 선교사 백모씨가 러시아 당국에 의해 간첩 혐의로 체포되었다.
 
러시아의 유용성에 눈을 뜨자
 
요즘 정부와 일부 학자들로부터 남북 협력의 돌파구 마련이라는 측면에서 중국이 숙원인 동해로의 출해권(出海權)를 확보하기 위해 추진 중인 광역두만개발계획(Greater Tumen Initiative)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자주 나온다. 그런데 중국의 동해 출해권 확보는 전략적 관점에서 우리에게 명백히 득보다는 실이 큰 것임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어 그러한 목소리가 나오는 것이라고 본다. 남북 협력의 재개가 시급하다면 2010년대 초 러시아가 남·북·러 삼각협력으로 추진하였던 나진·하산 복합 물류 사업을 되살리면 된다고 본다. 이 사업은 이명박 정부 시절 적극적으로 참여할 것 같은 모습을 보이다가 박근혜 정부 출범 초기에 한국이 불참을 선언하여 무산되었다. 러시아는 이 사업을 위해 미국을 설득하여 이 프로젝트에 대해서는 유엔 안보리의 대북 제재의 적용 예외를 확보하였는데 이 사업이 재개된다면 남·북 및 한·러 관계 개선에 도움이 될 수 있다.
 
러시아는 수출, 에너지, 북극항로, 우주항공, 극동시베리아 개발 등 여러 분야에서 우리와 윈-윈 관계에 있고, 특히 극동시베리아 개발 참여는 경제적 효과는 물론 앞으로 동북아 세력균형의 변화 가능성에 대비하는 전략적 측면이 있다. 무엇보다도 러시아는 안보 측면에서 소홀히 할 수 없는 나라이다. 그럼에도 고위 당국자들의 외교 사고(diplomatic thinking)에 러시아가 설 자리가 없는 것 같다. 그간 한·러 관계에 대한 당국자들의 이런저런 발언들을 간단히 정리하면 “우선 우크라이나 전쟁이 끝나고 미국과 유럽연합이 대러 제재를 푼 뒤 관계 정상화를 검토하겠다”이다. 달리 말하면, 한·러 관계 그리고 러시아는 한국 외교에 있어서 독립된 의제가 아니라는 이야기이다. 외교 당국자들의 이러한 안이함 뒤에는 한·러 관계의 실상에 대해 거의 무관심으로 일관하고 있는 국내 언론이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필자는 2020년 한·러 수교 30주년 계기에 졸저 <한국 외교에는 왜 러시아가 없을까>를 출간하였는데 이제는 ‘한국 외교에는 여전히 러시아가 없다’라고 말하고 싶다. 러시아의 유용성과 전략적 가치에 대한 무관심과 그 결과로서 무지는 한국의 미래에 크든 작든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다.

필자 주요 이력 

▷고려대 법대 법학과 ▷영국 옥스퍼드대 외교관 연수과정 수료 ▷주우즈베키스탄 공사 ▷ 주이르쿠츠크 총영사 ▷주러시아 공사 ▷상명대 글로벌지역학부 초빙교수 ▷현 유라시아전략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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