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잘못한 게 없는데요?”
영화는 한공주(천우희)를 추궁하는 어른들의 모습으로 시작된다. 이들은 왜 교복을 입은 공주를 둘러싸고 추궁할까, 궁금함도 잠시 공주는 고향을 떠나 새로운 곳으로 전학을 가게 되고 그곳에서 새로운 삶에 적응하려 애쓴다. 이혼한 엄마를 3년 만에 찾아갔지만 재혼한 남성의 “누구냐”는 물음에 “아무도 아니”라는 말을 듣는 공주의 곁에는 살갑게 다가오는 아카펠라 동아리 리더 은희(정인선)만이 버팀목이 돼 준다.
노래를 좋아했으나 ‘그 사건’ 이후로 노래를 하지 않았던 공주는 은희의 응원으로 인해 다시금 노래를 하고, 수영을 배운다. 또 기타를 퉁기며 새로운 삶을 살아가기 위해 노력한다. 그곳에서 공주는 새롭게 사귄 친구들과 점차 적응하는 듯 보인다. 그러나 공주는 울지도, 화를 내지도 않는다. 다만 산부인과에 가서 남성 선생님을 마주하는 등 생활 속 작은 불편함을 감수하고 있다. 그렇게 흘러갈 줄 알았던 어느 날, 공주의 앞에 가해자들의 부모들이 나타나면서 공주의 삶은 또 한 번 무너질 듯 위태로워진다.
영화는 공주가 전학을 오게 된 사건의 시발점과 그 과정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사건이 일어나게 된 배경과 사건이 일어나기 전 미묘한 긴장감, 사건이 벌어지고 난 뒤 피해자를 더욱 아프게 하는 2차 가해들.
그럼에도 영화는 사건에 대한 초점보다 사건 후 한 소녀의 잃어버린 희망에 대해 이야기 한다. 피해자를 ‘지역 물을 흐리는 사람’으로 여기는 어른들의 눈초리, 가해자들의 부모가 전학 간 학교까지 찾아와 합의를 요구하는 상황 등에도 살아낼 수밖에 없기에, 공주는 아무도 없는 길을 걸어간다.
밀양 성폭행 사건의 가해자는 무려 200여명에 가까웠다. 이중 44명이 체포됐고 10명이 소년원 송치됐지만 75명에 대한 기록은 없었다. 소년원에 간 이들마저도 보호처분이나 봉사활동 같은 가벼운 처벌에 그쳤다.
수많은 또래 가해자, 집단적 폭력이라는 충격도 컸지만 수사 과정에서의 2차 가해도 문제였다. 남성 경찰이 A양을 추궁하며 “너 때문에 밀양물이 흐려졌다” “네가 먼저 꼬리친 것 아니냐” 등의 폭언을 일삼았다는 사실과, A양의 신상정보를 가해자들에게 알리는 등 2차 가해가 일어난 사실이 알려지며 더욱 공분이 일었다.
결국 2005년 가해자들의 솜방망이 처벌에 분노한 국민들의 온라인 청원 및 항의가 쏟아졌다. 2008년에는 국가인권위원회가 직권 조사를 통해 경찰의 2차 가해를 인정하고 관련자 수사를 의뢰했다. 그러나 가해자들은 현재 공공기관 등에서 일하거나 안정된 삶을 살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2014년 영화 개봉 당시 독립 영화의 특성상 상영관이 많지 않아 흥행을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음에도 이 영화는 20만 명의 관객을 끌어모으며 많은 이들에게 경종을 울렸다. 이수진 감독은 그해 청룡영화상 시상식에서 신인감독상을, 한공주 역의 천우희는 여우주연상을 거머쥐었다.
그러나 현실은 영화보다 더욱 영화 같았다. 사건 발생 20여 년이 흐른 2023년 유튜버 ‘나락보관소’‘전투토끼’ 등을 시작으로 여러 명의 유튜버들이 가해자들의 얼굴, 이름, 직업, 주소 등을 공개하면서 명예훼손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는데, 법원은 “법과 절차를 무시한 채 진행된 사적 응징은 결코 정의가 될 수 없다”며 실형을 선고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지난 19일 밀양 사건의 피해자 A씨와 그 동생이 가해자들의 개인정보를 유튜버들에게 유출한 혐의로 경찰에 입건됐다는 사실이었다.
온라인은 다시 한번 달아올랐다. 네티즌들은 “가해자들은 제대로 된 처벌도 받지 않고 잘 사는데 피해자가 범죄자가 돼야 하나”, “피해자만 불쌍하다”, “사법 체계에서 제대로 된 처벌을 하지 않으니 피해자가 오죽했으면 그랬겠나”라는 반응과 “아무리 그래도 법적 테두리를 벗어난 사적 제재는 아니다”, “그 과정에서 무고한 사람들이 피해를 입는다” 등의 반응으로 나뉘며 20년이 지난 지금까지 논란의 중심에 있다.
이렇듯 영화는 끝났지만 현실은 아직 현재 진행형이다.
이수진 감독이 2019년 ‘씨네21’과의 인터뷰에서 한 말이 맴돌았다.
“‘한공주’때 (실제) 사건을 언급하지 않으려는 마음이 컸어요. 자칫 실화가 바탕일 때, 그것이 과거의 일로 치부될까 봐. 그들이 겪은 사건이 엄연히 지금도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폭력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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