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는 최근 노사협상 최종 합의안을 통해 임금 인상과 성과급 조정, 복지 확대, 일부 근로 조건 개선 등에 합의하며 일단 대규모 충돌 국면을 봉합했다. 그러나 이번 사태는 단순히 하나의 기업 내부 문제로 끝나지 않는다. 세계 최대 메모리 반도체 기업 가운데 하나인 삼성전자와 SK 하이닉스의 노사 문제는 글로벌 공급망과 국제 자본시장, 국가 산업 전략, 그리고 한국 경제 전체의 신뢰 문제와 직결된다.
지금 세계는 AI 반도체 패권 전쟁의 한복판에 있다. 미국의 엔비디아와 AMD, 대만의 TSMC, 중국의 국가 주도 반도체 굴기, 일본의 반도체 부활 전략까지 모두가 총력전에 돌입한 상태다. 반도체는 더 이상 단순한 전자부품 산업이 아니다. 군사·안보·AI·데이터센터·자동차·우주항공·양자컴퓨팅까지 연결되는 국가 전략 산업이다.
이런 상황에서 삼성전자의 파업 소식은 세계 금융시장과 공급망 투자자들에게 적지 않은 충격을 주었다. 외국 자본이 가장 민감하게 보는 것은 단순한 임금 수준이 아니다. “한국의 첨단산업 공급망은 안정적인가”, “AI 시대 핵심 기업들이 장기적 예측 가능성을 유지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노동의 역할 역시 과거와는 완전히 달라졌다. AI 시대의 반도체 산업은 단순한 조립 노동이 아니다. 극자외선(EUV) 공정, HBM 설계, AI 패키징, 초미세 공정 운영은 세계 최고 수준의 엔지니어와 숙련 노동자 집단 없이는 불가능하다. 오늘날 첨단산업에서 노동은 단순한 비용 항목이 아니라 핵심 전략 자산이다.
따라서 이번 삼성전자 노사 갈등은 어느 한쪽의 승패 문제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 노동은 기업의 지속 가능성을 존중해야 하고, 기업은 노동의 기여와 존엄을 인정해야 한다. 양측 모두 글로벌 룰 속에서 움직여야 한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이미 한국 기업이면서 동시에 세계 기업이다. 노사 관계 역시 이제는 국제적 기준과 투자자 신뢰 속에서 관리되어야 한다.
이번 논쟁 과정에서 특히 주목받은 것은 ‘잔여청구권(residual claimant)’ 논리였다. 이른바 “주주만 왜 잔여를 갖는가”라는 논쟁이다. 이는 현대 주식회사 제도의 가장 본질적인 구조를 건드리는 문제다.
주식회사는 기본적으로 위험과 보상의 대칭 구조 위에 세워진다. 채권자는 약정 이자를 받는 대신 초과이익을 포기한다. 노동자는 약정 임금과 고용 안정성을 얻는 대신 손실 위험을 제한받는다. 국가는 세금이라는 방식으로 사회적 인프라 제공의 대가를 회수한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남는 잔여 이익과 손실을 떠안는 존재가 주주다.
이 때문에 주주는 ‘잔여청구권자’라고 불린다. 회사가 엄청난 이익을 낼 경우 가장 마지막에 남는 몫을 가져가지만, 반대로 회사가 붕괴하거나 주가가 폭락할 경우 가장 먼저 손실을 흡수하는 존재 역시 주주다.
2023년 반도체 한파 당시 삼성전자 영업이익은 급감했다. 당시 직원 임금이 대폭 삭감되지는 않았다. 협력업체 대금도 상당 부분 유지됐다. 그러나 시가총액은 급락했고, 수많은 개인투자자와 국민연금이 손실을 감수해야 했다. 자본주의 구조에서 위험을 최종적으로 흡수하는 존재가 누구인지는 바로 이런 순간 드러난다.
그렇다고 해서 노동의 기여를 무시할 수는 없다. 오히려 AI 시대에는 인간의 창의성과 집단 지식이 기업가치의 핵심이 되고 있다. 오늘날 반도체 기업의 가치는 단순한 공장 건물에서 나오지 않는다. 연구개발 조직과 설계 능력, 생산 경험, 그리고 장기간 축적된 조직문화에서 나온다.
따라서 문제는 “누가 다 가져갈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지속 가능한 방식으로 나눌 것인가”다. 세계적 기업들이 스톡옵션, 장기성과급, 우리사주, 성과연동형 보상체계를 강화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노동자가 단순한 비용이 아니라 기업 성장의 동반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노동 역시 글로벌 자본시장의 냉혹한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경쟁하는 상대는 국내 기업이 아니다. 미국·대만·중국·일본의 국가 전략 산업들이다. 특히 중국은 국가 자본을 총동원해 반도체 자립에 나서고 있다. 미국은 자국 반도체 산업에 막대한 보조금을 투입한다. 대만은 국가 전체가 TSMC 생태계 중심으로 움직인다.
이 상황에서 한국 산업이 내부 갈등으로 소모전을 반복하면 결국 피해는 노동과 기업 모두에게 돌아간다. 산업 경쟁력이 약화되면 장기적으로 일자리도 줄고 국가 경제 기반도 흔들린다.
여기에서 반드시 짚어야 할 개념이 바로 카펙스(CAPEX)와 오펙스(OPEX)다. 카펙스(Capital Expenditure)는 미래를 위한 자본적 지출이다. 공장 증설, 반도체 장비 투자, 차세대 기술 개발, AI 인프라 구축이 여기에 해당한다. 반면 오펙스(Operational Expenditure)는 운영비용이다. 인건비, 유지비, 전력비, 관리비 등이 포함된다.
반도체 산업은 카펙스 중심 산업이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해마다 수십조 원씩 미래 시설 투자에 투입한다. 최신 EUV 장비 한 대 가격만 수천억 원에 달한다. 첨단 패키징과 AI 메모리 라인 구축에는 천문학적 자본이 들어간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만약 단기적 성과 배분 요구가 과도하게 증가해 오펙스 부담이 급격히 커질 경우, 기업은 미래 카펙스를 줄이게 된다. 이는 결국 장기 경쟁력 약화로 이어진다. 반도체 산업은 오늘 이익을 나누는 산업이 아니라, 미래 10년의 기술 패권을 선점하기 위해 현재를 재투자하는 산업이다.
실제로 일본 반도체 산업이 쇠퇴한 중요한 원인 가운데 하나는 장기적 투자 구조 붕괴였다. 반대로 대만 TSMC는 거의 종교적 수준으로 카펙스를 유지하며 세계 1위 파운드리 기업으로 성장했다. 엔비디아 역시 현재의 엄청난 시가총액을 만들기까지 수십 년 동안 연구개발과 AI 생태계에 재투자를 지속했다.
따라서 삼성전자 노사 문제 역시 단기 임금 갈등만으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 노동도 기업의 미래 투자 구조를 이해해야 하고, 기업 역시 성과 공유를 더욱 정교하게 설계해야 한다. 핵심은 미래 경쟁력을 유지하면서도 구성원 모두가 성장의 과실을 공유하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다.
여기에서 최근 이재명 대통령의 국무회의 발언은 상당한 시사점을 던진다. 대통령은 노동3권 자체를 부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노동권은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기 위한 헌법적 장치라고 분명히 말했다. 그러나 동시에 권리 행사에는 연대와 책임이 함께 따라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재명 대통령의 발언이 주목받는 이유는 단순히 대통령의 정책 메시지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는 소년공 출신 대통령이다. 어린 시절 공장에서 노동의 현실을 직접 경험했고, 산업화 시대 한국 노동 현장의 고단함과 불균형 구조를 몸으로 겪은 인물이다. 그렇기 때문에 노동자의 절박함과 기업 현장의 현실을 동시에 이해하는 정치인이라는 점에서 상징성이 크다.
이번에 방한한 브라질의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 시우바 대통령 역시 세계적으로 유명한 노동운동가 출신 정치인이다. 룰라 대통령 또한 가난한 노동자 계층과 공장 노동 현장에서 성장했다. 두 정상은 서로 다른 대륙에 서 있지만, 산업화 시대 노동 현장의 경험을 공유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동병상련의 공통분모를 가진다.
흥미로운 점은 두 사람 모두 단순한 이념적 노동운동에 머물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룰라 대통령은 집권 이후 브라질 산업 육성과 투자 유치, 수출 확대를 동시에 추진했다. 노동 보호와 산업 경쟁력의 균형을 고민했던 것이다.
이재명 대통령 역시 이번 삼성전자 노사 갈등 국면에서 노동권 자체보다 “선을 넘지 않는 연대와 책임”을 강조했다. 이는 매우 현실적 접근이다. 결국 대통령이 제시한 핵심 메시지는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노동권은 헌법적 권리이며 존중받아야 한다.
둘째, 기업의 지속 가능성과 국가 산업 경쟁력 역시 동시에 보호되어야 한다.
셋째, 권리 행사에는 반드시 공동체에 대한 책임과 절제가 따라야 한다.
이는 앞으로 한국 노사관계가 나아가야 할 중요한 가이드라인이 될 가능성이 크다. 과거 한국의 노사 관계가 대립과 충돌 중심이었다면, AI 시대의 노사 관계는 공동 성장과 공동 책임 중심으로 진화해야 한다는 의미다.
앞으로 AI는 생산성을 폭발적으로 끌어올릴 것이다. 동시에 인간 노동의 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꾸게 된다. 일부 직종은 사라지고, 일부는 초고부가가치 영역으로 재편될 것이다. 이런 시대에는 단순한 임금 투쟁만으로는 지속 가능한 해답을 만들 수 없다.
오히려 미래에는 새로운 형태의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 노동자는 단순 임금이 아니라 기업 성장의 장기 성과에 참여하는 구조를 고민해야 한다. 기업은 단순 비용 절감이 아니라 인간 중심의 혁신 체계를 만들어야 한다. 국가는 조세·복지·교육·재훈련 시스템을 통해 산업 전환 충격을 완화해야 한다.
결국 AI 시대의 핵심은 ‘조화로운 생산성 혁명’이다. 노동과 자본이 서로를 적으로 보는 순간 산업은 쇠퇴한다. 반대로 서로를 성장의 동반자로 인식할 때 혁신은 지속된다.
대한민국은 지금 중대한 갈림길에 서 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단순한 기업이 아니다. 한국 산업 문명의 최전선에 서 있는 전략 자산이다. 여기서 무너지는 것은 단순한 한 회사의 이익이 아니다. 대한민국의 미래 산업 질서와 국가 경쟁력 자체다.
그래서 지금 필요한 것은 선동도, 감정도 아니다. 필요한 것은 냉정한 현실 인식과 성숙한 사회적 지혜다. 노동도 책임을 져야 하고, 기업도 책임을 져야 하며, 국가도 책임을 져야 한다. 권리만 있고 책임이 없는 자유는 오래 지속되지 못한다. 반대로 책임만 있고 희망이 없는 산업 역시 미래를 잃는다.
이재명 대통령이 강조한 ‘연대와 책임’의 철학은 결국 한국형 미래 노사 모델의 핵심 키워드가 될 가능성이 크다. 대립과 파괴가 아니라, 혁신과 공존의 질서를 어떻게 만들어낼 것인가. 그것이 AI 시대 대한민국 노사 관계가 풀어야 할 가장 중요한 과제다.
산업은 투쟁만으로 성장하지 않는다. 자본만으로도 성장하지 않는다. 기술과 노동, 투자와 혁신, 책임과 신뢰가 함께 움직일 때 비로소 문명은 앞으로 나아간다. 지금 대한민국이 필요한 것은 승자독식의 논리가 아니라, 세계와 경쟁하며 함께 성장할 수 있는 성숙한 산업 공동체의 철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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