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는 아이의 이유식을 무염으로 만든다. 누군가는 첨가물을 꼼꼼히 따진다. 더 깨끗한 환경을, 더 신중한 선택을 원한다. 원칙만 보면 이상할 건 없다. 부모라면 할 수 있는 고민이다. 문제가 되는 건 원칙이 아니라, 그 원칙이 바깥으로 번질 때 풍기는 기운이다.
최근 이지훈·아야네 부부의 '무염 육아' 논란도 그랬다. 아야네는 딸이 어린이집에서 사탕을 먹은 것 같다며 이를 "충격이었다"고 표현했다. 해당 사탕이 비타민 사탕이었다는 점, 공개 계정에 불편감을 드러낸 점 등에 지적이 이어지자 아야네는 "무염은 엄마의 선택이고 누구에게 강요한 적도 피해 준 적도 없다"고 해명했다.
아야네의 항변처럼, 이번 논란에서 실제로 벌어진 일은 없었다. 확인된 갑질도, 공개된 피해도 없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미 미래의 민폐를 본 것처럼 반응했다. 왜일까. 대중이 불편함을 느낀 건 무염 이유식 자체가 아니었다. 태도 뒤에 따라올 것 같은 장면들 때문이었다.
'어린이집에서도 저 기준을 요구하는 거 아냐?'
'자기 기준만 강한 부모 느낌이다.'
사람들은 한 부모의 육아 원칙만 본 게 아니었다. 어린이집 교사를 몰아붙이는 학부모, "우리 아이는 특별하다"고 말하는 부모, 사적 기준을 기관 전체에 적용하려는 보호자, 문제가 생기면 조용히 소통하기보다 공개적으로 여론을 움직이는 사람을 떠올렸다.
▲ 대중은 사탕이 아니라 '유형'을 봤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대표성 휴리스틱과 연결해볼 수 있다. 대니얼 카너먼과 아모스 트버스키는 인간이 불확실한 상황에서 충분한 정보를 따지기보다, 대상이 자신이 이미 알고 있는 유형과 얼마나 닮았는지를 근거로 빠르게 판단한다고 설명했다. 이 판단은 효율적이면서도, 자주 오류를 만든다.
대중은 아야네라는 한 개인을 처음부터 끝까지 관찰한 것이 아니다. 몇 개의 단서를 보고 이미 익숙한 인물형에 끼워 넣었다. '까다로운 엄마', '기관을 피곤하게 할 부모', '자기 기준이 강한 보호자'. 여기서 유난은 그저 까다롭다는 뜻이 아니다. 자신의 불안이나 기준을 타인의 업무로 확장할 가능성으로 읽힌다.
▲ 좋은 부모가 되려는 마음은 어떻게 불안이 되나
물론 부모의 마음도 봐야 한다. 현대 육아 담론은 부모 모두에게 부담을 주지만, 그 압박은 여전히 엄마에게 더 가혹하게 배분된다. 사회학자 샤론 헤이스는 이를 '집중적 모성'(intensive mothering)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했다. 현대 모성 이데올로기는 육아를 아이 중심적이고, 전문가 지향적이며, 감정적으로 몰입되고, 노동집약적이며, 비용이 많이 드는 일로 만든다. 좋은 부모가 되려는 마음은 어느 순간 끝없는 검열이 된다.
그래서 무염 육아를 선택하는 마음 자체는 이해할 수 있다. 아이에게 더 좋은 것을 주고 싶고, 모르는 위험을 줄이고 싶고, 부모로서 할 수 있는 통제력을 행사하고 싶은 마음. 특히 아이가 어릴수록 부모는 세상을 위험물 목록처럼 바라보기 쉽다. 육아는 사랑이지만, 동시에 불확실성 관리다.
▲ 불안이 공개되는 순간, 요구는 압박이 된다
문제는 그 불안이 어디로 향하느냐다. 불안이 자기 안에서 머물면 신중함이 된다. 하지만 그 불안이 기관과 교사에게 이동하면 그건 요구처럼 읽힌다. 그리고 그런 표현이 공개 계정에 올라가는 순간, 요구는 압박이 될 수 있다. 부모는 "그냥 놀랐을 뿐"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어린이집 교사는 그 놀람이 만들어낸 파장을 감당해야 하는 위치에 놓인다. 특히 상대가 공개 계정을 가진 인물이라면 개인의 감정 표현은 더 이상 개인의 감정 표현으로만 남지 않는다. 팔로워가 붙고, 기사가 붙고, 댓글이 붙는 순간 불쾌감은 여론이 된다.
여기서 대중은 사탕보다 큰 문제를 본다.
'이 사람은 불편한 일이 생기면 먼저 대화하는 사람인가, 아니면 여론의 힘을 빌리는 사람인가.'
이 판단에는 기본적 귀인 오류, 더 정확히는 상응편향의 구조도 겹쳐 있다. 리 로스에 따르면 사람은 타인의 행동을 볼 때 그 행동이 놓인 상황보다 그 사람의 성격이나 태도를 원인으로 돌리기 쉽다. '문화 차이 때문에 놀랐을 수 있다', '첫 육아의 불안이 과하게 표현됐을 수 있다', 'SNS에 익숙한 방식으로 감정을 남겼을 수 있다'는 가능성보다 '저 사람은 원래 저런 식으로 문제를 키우는 사람일 것'이라는 결론으로 빨리 이동하는 것이다.
아야네의 해명에는 납득할 만한 부분이 있었다. 일본과 한국의 영유아 간식 문화 차이를 설명했고, 어린이집을 저격할 의도가 아니었다고 밝혔다. '충격'이라는 표현이 문화적 뉘앙스 차이로 과하게 받아들여졌을 수 있다고도 설명했다.
다만 대중이 문제 삼은 부분은 '왜 놀랐느냐'가 아니라, '왜 놀람을 그런 방식으로 표현했느냐'였다. 해명의 방향과 대중의 불편 지점이 어긋난 것이다. 이럴 때 해명은 해명으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역시 본질을 모른다'는 증거가 된다.
그런 인상은 이지훈의 대응으로 더 강해졌다. "유난 떨어 미안합니다"라는 말은 사과처럼 보이지만 조롱처럼 읽혔다. 지인의 댓글에 "무개념녀보다 낫잖아"라는 답글을 단 것도 마찬가지다. 대중은 여기서 '이 사람들은 자신들이 왜 불편하게 보이는지 모른다'는 신호를 본다. 사과는 상대의 불편을 이해하는 행위인데, 방어적 농담은 상대의 불편을 우스운 것으로 만든다. 그래서 사과가 기싸움처럼 해석되고 만다.
여기에 어린이집 교사의 키즈노트까지 공개되면서 논란은 또 다른 방향으로 번졌다. 교사가 '너무 스트레스 받지 않으셨으면 좋겠다'고 쓴 글은 따뜻한 위로일 수 있다. 실제로 교사가 부모를 배려하는 마음으로 쓴 문장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미 대중의 머릿속에는 '교사를 피곤하게 만드는 부모'라는 프레임이 생긴 뒤였다. 교사의 선의는 선의로만 읽히지 않았다. '결국 교사가 부모 감정까지 달래고 있네'… 해당 글이 휴일에 작성됐다는 점은 그 이미지를 더 강화했다.
▲ 한 번 씌워진 이미지는 모든 장면을 증거로 만든다
이 과정에서는 확증편향도 붙는다. 레이먼드 니커슨은 확증편향을 사람이 기존 믿음이나 가설에 유리한 방식으로 정보를 찾고 해석하는 경향으로 설명했다. 한 번 '유난 부모'라는 인상이 생기면, 이후의 모든 행동은 그 인상을 강화하는 증거로 채택된다.
해명은 해명으로 읽히지 않는다. 사과는 사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교사의 위로도 위로로만 보이지 않는다. 모든 장면이 하나의 결론을 향해 배열된다.
'봐라. 역시 피곤한 사람들 아니냐.'
▲ 문제는 무염이 아니라 기준의 비대칭이었다
여기에 과거 짬뽕 영상까지 소환되며 논란은 '유난'에서 '위선'으로 이동했다. 어린이집에서 비타민 사탕을 먹은 건 충격이고, 부모가 장난스럽게 매운 짬뽕을 맛보게 하는 것은 괜찮냐는 지적이다.
사람들은 타인의 기준이 높을 때보다, 그 기준이 자신에게는 느슨하게 적용되는 것처럼 보일 때 더 예민하게 반응한다. 엄격함 자체가 문제라기보다 엄격함의 비대칭이 문제다. 타인에게는 원칙을 요구하면서 자신에게는 예외를 허용하는 듯 보이는 순간, 대중은 그것을 도덕적 정합성의 결여로 읽는다.
'건강 기준이 중요한 게 아니라, 자기 기준만 중요한 거였네.'
사람들은 아직 벌어지지 않은 일에 화를 낸 게 아니다. 이미 반복적으로 보아온 장면을 떠올린 것이다. 기관의 사정을 모르면서 기관을 쉽게 평가하는 사람. 사적 불쾌감을 공적 압박으로 바꾸는 사람. 자신은 예민하지만 타인의 피로에는 둔감한 사람. 이지훈·아야네 부부가 그런 사람이라는 게 아니라, 애석하게도 두 사람에게 그런 이미지가 씌워졌다는 이야기다.
이번 논란이 건드린 건 사탕도, 무염 육아도 아니다. 기준을 가진 사람이 그 기준을 어디까지 확장할 것인가에 대한 불안이다. 그 불안은 아무 일이 벌어지지 않았어도 사람을 미워하게 만든다. 그 사람에게서 연상되는 미래가 이미 피곤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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