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인혁의 말줄임표] 첫 단추는 꿰었지만 흐려지는 개헌 명분

  • 국회, 국민투표법 본회의 상정…87헌법 개헌 논의 재점화

  • "핵심은 권력구조 개편인데"…제왕적 대통령제 논의 실종

  • 정치적 셈법에 동력 약화 우려…임기 초 대통령 리더십 주목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신정훈 위원장이 23일 국회에서 열린 행안위 전체 회의에서 여당 주도로 상정된 국민투표법을 처리하고 있다이날 행안위 전체 회의에서 국민의힘은 여당 주도의 국민투표법 처리에 반대해 표결에 불참했다사진연합뉴스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신정훈 위원장이 23일 국회에서 열린 행안위 전체 회의에서 여당 주도로 상정된 국민투표법을 처리하고 있다.이날 행안위 전체 회의에서 국민의힘은 여당 주도의 국민투표법 처리에 반대해 표결에 불참했다.[사진=연합뉴스]

국회 본회의에 국민투표법 개정안 상정이 예고되면서 개헌 논의가 다시 정치권 전면에 등장했다. 개헌 필요성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는 여전히 강하지만, 정작 요구의 핵심으로 꼽혀온 권력 구조 개편, 특히 제왕적 대통령제 문제에 대한 논의는 좀처럼 힘을 받지 못하고 있다. 이에 개헌의 ‘명분’이 흐려지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개헌의 선결 조건인 국민투표법 개정안은 24일 여당 주도로 국회 본회의에 상정됐다. 해당 안건은 2월 국회 내 처리될 것으로 관측된다. 이에 우원식 국회의장을 비롯해 개헌 논의를 이끌어온 인사들은 오는 6월 지방선거 일정에 맞춰 개헌 국민투표를 실시하겠다는 구상을 밝히고 있다.
 
현행 ‘87헌법’은 제정 당시부터 미완의 헌법이라는 평가를 받아왔다. 6·10 민주항쟁 이후 직선제 개헌이라는 역사적 전환점 속에서 탄생했지만, 군사 독재 종식에 방점이 찍히면서 권력 구조 전반에 대한 정교한 설계는 충분히 이뤄지지 못했다는 지적이다. 정치권에서는 이후 매년 개헌 필요성이 제기됐으나, 정치적 유불리를 이유로 번번이 무산돼 왔다.
 
87헌법의 구조적 한계로 가장 자주 거론되는 대목은 제왕적 대통령제다. 권력이 대통령에게 과도하게 집중된 탓에 정권 출범 때마다 극단적 대립과 정치적 충돌이 반복됐고, 탄핵과 전임 대통령의 구속 등 비극적 결말이 이어졌다는 평가가 뒤따른다.

이 같은 문제의식은 윤석열 전 대통령의 12·3 비상계엄 사태를 계기로 다시 증폭됐다. 재의요구권(거부권) 행사로 정국 경색이 심화됐고, 결국 군경을 동원한 비상계엄으로 이어지면서 권력 집중 구조의 위험성이 재조명됐다는 분석이다. 이에 개헌 필요성에 대한 국민 인식 또한 어느 때보다 높아지고 있다.
 
내란 우두머리 혐의와 관련한 재판 과정에서도 현행 헌법의 제도적 문제가 지적됐다. 지난 19일 열린 1심 재판에서 재판장인 지귀연 판사는 12·3 비상계엄과 같은 충돌 상황에 대해 “선진국의 경우 대통령이 의회와 갈등을 일으켜 군부를 동원해 의회의 기능을 정지시키는 사례 등을 찾아보기 어렵다”며 “선진국에서는 이러한 정도의 갈등까지 가지 않도록 제도적으로 설계를 치밀하고 꼼꼼하게 해 놓는 경우가 많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고 지적했다.
 
이어 지 판사는 “의회를 상원, 하원 양원으로 구성해 의회가 신중한 판단을 할 수 있도록 하거나 선거에서 의원의 일정 비율씩만 교체하도록 해 급격한 의회 구성의 변화를 막거나 임기 내에 의원에 대한 신임을 묻게 하는 중간투표 등의 제도를 두어 책임 있는 의정 활동을 하도록 하는 장치 등이 대표적”이라고 설명하며 제도적 견제 장치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이는 비상계엄 사태 수습 과정에서 여야 정치권 역시 공감대를 형성했던 부분이다. 특히 이재명 대통령 또한 대선 후보 시절 대통령 권한 분산과 책임 강화를 골자로 한 개헌 필요성을 밝힌 바 있다.
 
그러나 정부 출범 이후 개헌 논의는 기대만큼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다. 특히 87헌법 개헌의 핵심으로 꼽혀온 제왕적 대통령제 개선 논의는 정치권 의제에서 상대적으로 비켜나 있다는 지적이다.
 
정치권 안팎에서는 개헌이 또다시 ‘도돌이표’가 되는 과오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는 사회적 합의가 이뤄진 사안부터 순차적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온다. 또 정치권이 새로운 쟁점을 덧붙이며 개헌 동력을 약화시키고 있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실제 정청래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개헌에 대해 여야 합의가 원활히 이뤄지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도 “헌법 전문에 5·18만 수록하는 것이 아니라 그 뿌리인 동학 정신도 수록돼야 한다”며 헌법 전문 개정과 관련한 새로운 의제를 언급하고 있다.

국민의힘은 대통령 연임제 등 권력 구조 변경 가능성에 따른 유불리를 고려하며 개헌 논의에 신중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이에 대해 일각에서는 권력 구조 개편이라는 핵심 의제와는 거리가 있는 논쟁이 부각되고 있으며, 여야가 정치적 계산 속에 개헌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따라서 정치권의 셈법 속에 개헌 논의가 또다시 표류하지 않기 위해서는 대통령의 정치적 결단과 명확한 방향 제시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박상철 미국헌법학회 이사장은 아주경제와 통화에서 “집권당은 권력을 잡았기 때문에 개헌에 적극적이지 않을 수 있고, 반면 야당은 개헌이 불리하게 적용될 것 같아 소극적으로 임하는 상황이 그동안 반복돼 왔다”면서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사회적으로 동의돼 있는 사안을 순차적으로 또 단계적으로 먼저 개헌하는 것이 방법”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대통령 또한 국민이 원하는 개헌이 될 수 있도록 역할을 해야 한다”며 개헌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임기 초 대통령의 결단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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