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의 끝자락과 봄의 초입인 2월. 차가운 바람 속에 숨겨진 온기를 찾고, 겨우내 웅크렸던 몸과 마음을 깨울 활력을 원한다면 해답은 경북 울진에 있다. '보배로운(珍) 물건이 많은 무성한(蔚) 땅'이라는 이름처럼 울진은 숲과 바다 그리고 미식이 어우러진 천혜의 보고다. 계절의 길목에서 태고의 신비를 간직한 동굴 속을 거닐고 짙푸른 바다 위를 요트로 가르며, 제철 맞은 붉은 대게의 속살을 맛보는 여행. 겨울과 봄 사이 울진에서만 맛볼 수 있는 특별한 여정이다.
울진 근남면 구산리에 위치한 성류굴의 모습. [사진=강상헌 기자]
2억5000만년이 빚은 성류굴의 신비
울진 근남면 구산리에 위치한 성류굴(천연기념물 제155호)은 자연이 남긴 거대한 유산이다. 약 2억5000만년 전 형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석회암 동굴은 전체 길이 870m 중 470m 구간이 일반에게 개방돼 있다. '성불이 머물던 곳'이라는 뜻으로 성류굴이라 부르는데 '선유굴' '탱천굴' '장천굴'이란 이름으로도 불렀다. 아름다운 종유석이 마치 금강산 같아 '지하금강'이라고도 부른다.
성류굴은 계절의 시간을 거스르는 공간이다. 밖은 옷깃을 여며야 할 만큼 차가운 바람이 불지만, 굴 내부는 묘하게 온화한 공기가 감돈다. 연중 15~17도의 기온과 80~90%의 습도를 일정하게 유지하는 덕분이다. 이 때문에 겨울에는 바깥보다 따뜻하고, 여름에는 에어컨보다 상쾌한 시원함을 느끼며 쾌적하게 동굴을 탐험할 수 있다.
성류굴은 들어가는 길목부터 예사롭지 않다. 사람 한 명이 겨우 지나갈 법한 좁은 입구를 통과하려면 안전모를 쓰고 허리를 굽혀야 한다. 자연이 만든 비좁은 문을 지나면 비로소 수억년의 시간이 빚은 종유석과 석순, 석주가 숲을 이루는 장관이 펼쳐진다. 기하학적인 기암괴석과 은은한 조명이 어우러져 탄생한 신비로운 자태는 한동안 넋을 잃고 바라보게 할 만큼 압도적이다.
관동팔경의 백미로 꼽히는 월송정은 달빛과 어울리는 솔숲이라는 서정적인 뜻(月松)과, 신선이 솔숲을 날아 넘었다는 신비로운 뜻(越松)을 동시에 품고 있다. [사진=강상헌 기자]
월송정과 바다에서 만끽하는 쉼표
탁 트인 바다와 숲의 조화를 만끽하고 싶다면 남쪽 평해읍의 월송정으로 가보자. 관동팔경의 백미로 꼽히는 월송정의 이름에는 두 가지 흥미로운 이야기가 전해진다. 달빛과 어울리는 솔숲(月松)이라는 서정적인 뜻과, 신선이 솔숲을 날아 넘었다(越松)는 신비로운 뜻을 동시에 품고 있다. 어느 유래든 월송정이 가진 빼어난 경치를 설명하기엔 충분하다.
월송정 정자에 오르기 전 마주하는 1만여 그루의 '해송 숲길'은 그 자체로 치유의 공간이다. 빽빽한 나무 사이로 불어오는 솔향은 머릿속 복잡한 생각들을 씻어낸다. 숲 끝자락에 다다른 뒤엔 월송정 2층 누각에 올라가 보자. 기둥 사이로 펼쳐지는 풍경은 마치 거대한 액자 속 그림 같다. 푸른 바다의 물결, 하얀 백사장 그리고 이를 감싸안은 초록빛 소나무는 이곳에서만 볼 수 있는 절경이다.
월송정 기둥 사이로 펼쳐지는 풍경은 마치 거대한 액자 속 그림 같다. [사진=강상헌 기자]
인근 '구산해수욕장'은 바삐 살아온 일상을 잠시 잊고 한적한 여유를 즐기기에 제격이다. 바위에 부딪히는 파도 소리에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 있으면, 어느덧 시간이 잠시 멈춘 듯한 기분이 든다. 이 고요한 순간이야말로 지친 현대인에게 울진이 건네는 가장 완벽한 쉼표일 것이다.
등기산 스카이워크에서 바라본 울진 바다. [사진=강상헌 기자]
역동적인 바다를 원한다면 후포항의 '등기산 스카이워크'를 추천한다. 해발 64m 등기산 공원에서 이어지는 이 다리는 해수면 20m 높이에 설치돼 있다. 압권은 57m 구간의 강화유리 바닥이다. 발 아래로 넘실대는 파도가 그대로 내려다보인다. 마치 바다 위 허공을 걷는 듯한 아찔한 스릴을 느낄 수 있다. 다리 끝에 서면 탁 트인 동해의 수평선과 후포 갓바위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요트를 타고 바다 위에서 바라본 등기산 스카이워크의 모습. [사진=강상헌 기자]
스카이워크에서 내려와 울진 요트학교로 향하면 바다를 온몸으로 만끽할 수 있다. 요트에 올라타 방파제를 벗어나면 에메랄드빛 바다가 눈앞에 펼쳐진다. 바다 한가운데서 올려다보는 스카이워크와 갓바위의 웅장한 자태는 덤이다. 육지와는 전혀 다른 각도에서 마주하는 울진 해안선은 그야말로 매혹적이다.
붉은대게는 흔히 '홍게'로 잘 알려져 있다. 생김새는 대게와 비슷하지만, 전체적으로 붉은빛이 띠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사진=강상헌 기자]
입안 가득 퍼지는 붉은 바다
울진 여행에서 '먹는 즐거움'을 빼놓을 수 없다. 그 중심에는 겨울 울진의 상징 '대게'가 있다. 대게는 큰 게가 아니다. 몸통에서 뻗어 나온 여덟 개의 다릿마디가 마른 대나무를 닮았다고 해 붙은 이름이다. 붉은대게는 흔히 '홍게'로 잘 알려져 있다. 생김새는 대게와 비슷하지만, 전체적으로 붉은빛이 띠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붉은대게는 늦가을부터 겨울을 거쳐 이듬해 봄까지도 맛볼 수 있는 별미다.
울진 최남단에 위치해 있는 후포항은 국내 최대의 대게잡이 항구다. [사진=강상헌 기자]
울진 최남단에 위치해 있는 후포항은 국내 최대의 대게잡이 항구다. 동이 트기 전 조업을 마친 배들이 항구로 들어오면 위판장은 뜨거워진다. 선원들이 쏟아내는 대게와 붉은대게로 바닥은 순식간에 대게 판이 된다. 이후 경매사의 우렁찬 목소리와 함께 중매인들의 치열한 눈치 싸움이 시작되고 바닥에 깔린 대게는 순식간에 팔려나간다. 후포항 관계자는 "평균적으로 매일 400~500마리 정도가 잡힌다. 여기서 잡힌 게들은 전국 각지로 유통된다"고 귀띔했다.
갓 쪄 나온 대게의 모습. [사진=강상헌 기자]
위판장의 활력을 눈에 담았다면 이제는 게 맛을 즐길 차례다. 대게는 '잘 먹는 법'이 있다. 고소한 냄새를 풍기는 갓 쪄낸 대개의 다리의 끝을 잡고 관절 부분을 비틀어서 당기면 뽀얀 속살이 탱글탱글하게 모습을 드러낸다. 집게다리는 가위 끝으로 금을 내서 벌리면 된다. 울진 대게는 살이 꽉 차 있어 수율이 높기로 유명하다. 짜지 않고 담백하면서도 씹을수록 배어 나오는 단맛이 특징이다.
울진 대게는 짜지 않고 담백하면서도 씹을수록 배어 나오는 단맛이 특징이다. [사진=강상헌 기자]
붉은대게 역시 특유의 짭조름한 맛과 진한 향으로 마니아층을 사로잡는다. 수심 1000m 이상의 깊은 바다에서 건져 올린 붉은대게는 이름처럼 선명한 붉은빛이 식욕을 자극한다. 대게에 비해 껍질이 얇아 손으로 툭 꺾어 살을 발라내기도 한결 수월하다. 특히 붉은대게는 키토산이 풍부하고 특유의 감칠맛이 강해 대게와 또 다른 매력을 자랑한다.
울진 바다와 대게의 매력을 한자리에서 만끽할 수 있는 축제의 장이 곧 열린다. '2026 울진대게와 붉은대게 축제'가 오는 27일부터 3월 2일까지 4일간 후포면 왕돌초광장 일원에서 진행된다. 축제 기간엔 메인무대인 대게를 주제로 한 다채로운 상설 프로그램과 다양한 공연이 펼쳐진다. 전통체험 놀이마당과 요트승선체험, 등기산 걷기 등 울진 후포에서만 즐길 수 있는 체험도 마련된다. 다양한 가공식품 무료 시식회는 또 다른 즐거움이다. 늘 먹던 찜 요리와는 다른, 붉은대게의 색다른 매력을 오감으로 경험할 차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