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도 칼럼] AI 시대, 반도체 강국의 조건은 '소부장 상생 협업'

김학도 한국협업진흥협회 회장
[김학도 전 중소벤처기업부 차관/논설고문] 

 
대한민국 경제에서 반도체가 차지하는 위상은 이제 개별 산업의 범주를 넘어 국가 전략의 핵심으로 자리 잡았다. 반도체는 2025년 우리나라 전체 수출 7097억 달러의 24.4%인 1734억 달러를 담당하는 주력 산업이자, 미·중 기술패권 경쟁과 AI·국방·첨단산업의 성패를 좌우하는 전략 자산이다. 특히 AI 확산과 함께 반도체 수요는 역대 유례없는 호황으로 확대되고 있어, 한국은 ’25년 HBM 세계시장 점유율 80.6%라는 대기록 하에 메모리 분야에서는 명실상부한 세계 최강국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분명한 한계도 존재한다. 메모리에 편중된 산업 구조, 상대적으로 취약한 시스템반도체와 패키징 경쟁력, 그리고 일본·미국 등 특정 국가에 의존적인 소재·부품·장비(소부장) 공급망이라는 구조적 불안 요소다. 과거 일본의 수출 규제와 최근 중국의 빠른 추격은 반도체 공급망이 얼마나 쉽게 흔들릴 수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 경고였다.
 
이러한 문제의식 속에서 정부는 지난해 12월, ‘AI 시대에 맞는 새로운 K-반도체 산업전략’을 발표했다. 세계 최대·최고 수준의 반도체 클러스터 조성, NPU 집중 투자, 상생 파운드리 구축, 국방반도체 자립 등이 핵심 과제다. 또한, 지난 1월말에는 「반도체특별법」이 국회에서 통과하여 우리가 강점을 가진 메모리뿐만 아니라 시스템반도체, 설계·제조·패키징, 소부장에 이르는 전 공급망을 체계적으로 뒷받침할 제도적 기반을 갖추었다. 생성형 AI와 HBM을 중심으로 글로벌 반도체 지형이 급격히 재편되는 시점에서, 국가 차원의 총력전 체제를 재정비한 것은 다소 늦은 감은 있으나 적절한 대응이다.
 
특히 이번 정부 전략에서는 ‘소부장 생태계의 패러다임을 전환하겠다’는 메시지를 분명히 담고 있다. 반도체는 단순한 산업 경쟁력을 넘어 국가 안보 자산이 되었으며, ‘메모리 최강국’을 넘어 ‘반도체 세계 2강’으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기초체력 강화가 필수적이라는 인식이다. 대기업 중심의 성장만으로는 한계가 분명하며, 소부장 공급망 전체가 함께 성장해야 지속 가능하다는 의지가 정책 전반에 깔려 있다.
 
이러한 변화의 상징적 사례가 바로 ‘트리니티팹(Trinity Fab)’, 즉 양산연계형 미니팹 구축이다. 이는 단순한 테스트 시설을 넘어, 실증을 중심으로 한 대·중·소 상생 협업의 진화된 모델인 것이다.
 
반도체 소부장 중소기업이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에 납품하기 위해서는 양산 수준의 실증 테스트가 필수적이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혁신적인 장비나 소재를 개발해도 12인치 웨이퍼 기반의 양산 환경에서 검증하지 못하면 납품 기회조차 얻기 어려웠다. 대기업의 양산 라인은 특성상 테스트를 위해 쉽게 개방할 수 없었고, 소부장 기업들은 사실상 ‘단 한 번의 기회’에 모든 것을 걸어야 하는 구조에 놓여 있었다.
 
트리니티팹은 이러한 구조적 병목을 해소하기 위해 기획됐다. 정부와 대기업이 협업해 실제 양산 공정과 동일한 환경에서 소부장 장비와 소재를 사전에 검증할 수 있는 12인치 웨이퍼 기반 실증 테스트베드를 구축하는 것이다. SK하이닉스가 용인 특화단지 내 공장 부지를 제공하고, 정부와 지자체가 총 4000억원이 넘는 대규모 투자를 집행하는 이 사업은 단순한 연구시설이 아니라 ‘양산으로 가는 마지막 관문’을 공공 인프라로 만드는 시도다.
 
그 효과는 분명하다. 소부장 기업은 기술 개발 이후 상용화까지 걸리는 시간을 획기적으로 단축하고, 대기업은 검증된 기술을 보다 빠르고 안정적으로 양산 라인에 적용할 수 있다. 한 반도체 기업 관계자의 표현처럼, “수능만 치르던 소부장 기업들에게 모의고사를 볼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이다. 이는 사후 구매 중심의 수직적 거래 관계에서 벗어나, 기획 단계부터 실증까지 대·중·소가 기술적 운명을 공유하는 ‘진화된 협업’을 의미한다.
 
주목할 점은 대기업의 역할 변화다. 과거에는 “잘 만들어 오면 쓰겠다”는 수동적 수요자에 가까웠다면, 이제는 부지제공, 운영참여, 인력파견 등 생태계 조성자로서 보다 적극적인 역할을 맡고 있다. 단기적 비용은 들더라도 장기적인 경쟁력을 확보하겠다는 전략적 선택이다.
 
정부 역시 단순한 재정 지원을 넘어, 비영리 재단법인 설립과 민관공동 운영구조를 통해 공공성과 전문성을 동시에 확보하려 하고 있다. 산업통상부를 중심으로 한 이러한 접근은 개별 R&D 지원을 넘어 실증–상용화–양산을 유기적으로 연결하는 산업정책으로 진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물론 우려도 있다. 미니팹이 특정 대기업의 납품 생태계를 위한 시설로 인식된다면 공공 투자에 대한 정당성은 훼손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운영의 공공성과 형평성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트리니티팹은 비영리 재단법인을 통해 특정 기업의 폐쇄적 라인이 아니라,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비롯한 다양한 수요기업에 납품하는 소부장 기업들이 차별 없이 이용할 수 있는 ‘오픈 플랫폼’으로 기능해야 한다.
 
이는 트리니티팹만의 과제가 아니다. 앞으로 우리가 구축해야 할 모든 상생 협업 플랫폼이 공통으로 풀어야 할 숙제다. 협업은 이제 단순한 거래를 넘어, 사전 기획–실증–역할 분담–성과 공유로 진화해야 한다.
 
반도체는 이제 단순한 상품이 아니라 국가 안보자산이자 기술패권의 핵심이다. 거대 수요기업의 경쟁력을 기반으로, 튼튼한 소부장 생태계가 뒷받침될 때 공급망은 비로소 안정된다. 특히 AI 반도체와 HBM 등 첨단 공정으로 갈수록 초기 설계 단계부터 소부장 기업과의 긴밀한 협업이 초격차 유지의 관건이 된다.
 
AI 시대의 반도체 경쟁은 더 이상 개별기업 간의 경쟁이 아니다. 국가 단위의 생태계 경쟁이다. 대기업은 인프라와 노하우를 공유하고, 정부는 정교한 정책과 재원을 제공하며, 소부장 기업은 기술 혁신으로 응답하는 ‘황금 삼각형(Trinity)’이 완성될 때 대한민국은 진정한 반도체 강국으로 도약할 수 있다. 반도체 세계 2강으로 가는 길은, ‘상생과 협업’이라는 구조를 만드는 것, 바로 그것이 AI 시대 반도체 강국의 진짜 조건이다. 이번 정부 전략이 현장에서 막힘없이 작동하여, 우리 소부장 중소기업들이 세계 무대에서 당당히 주연으로 활약하는 날을 기대해 본다.

김학도 필자 주요 이력
△미국 서던캘리포니아대학 정치경제학 박사 △전 산업통상자원부 에너지자원실장 통상교섭실장 △전 중소벤처기업부 차관 △전 중소벤처기업진흥공단 이사장 △현 한국협업진흥협회 회장 △현 충북대 특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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