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기호 아주대 아주통일연구소 교수(연구실장)]
쿠르스크의 눈물과 ‘혈맹’ 청구서
세초부터 국제사회가 요동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의 지시로 개시된 마두로 베네수엘라 대통령 축출에 이어 이란 내 격화된 반체제시위와 대규모 유혈 사태, 미국의 그린란드 병합 구상에 반발한 유럽과의 갈등이 대표적이다. 지난달 미국은 국가안보전략(NSS) 발표를 통해 국제규범의 수호자라는 점잖은 지위를 벗어던지고 서반구 지역의 패권자로서 ‘돈로주의’의 서막을 알렸다. 중동과 인도·태평양권역이 미국의 영향권에서 멀어지고 있다는 징후는 각국의 외교 셈법을 복잡하게 만들고 있다. 무엇보다 마두로의 압송 장면은 북한에게 우려보다는 ‘핵’에 관한 확신의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이미 2003년 대량살상무기(WMD)를 자진 폐기한 리비아의 최고 통치자 무아마르 카다피를 통해 비핵·반미국가 최고지도자의 말로를 목도한 터였다. 이제 핵개발 고도화를 앞세운 체제안보의 길은 김정은 위원장에게 불가역의 역사이자 미래이며, 국가안위를 유일하게 담보할 수 있는 절대적 지침이자 사상으로 격상되었다.
돌이켜보면 이 ‘만능의 보검’인 핵 무력이 아니었다면 대북제재에 이토록 시달릴 일도 러시아와 군사동맹을 맺을 일도, 러우전쟁에 참전하여 생때 같은 어린 군인들이 쿠르스크 땅에서 비명횡사할 일도 없었다. 2022년 2월, 러시아의 전면 침공으로 시작된 러우전쟁도 다음 달이면 만 4년이 된다. 2025년 6월 기준 영국 국방부는 쿠르스크 전투 중 북한군 파병자 약 1만 5천명 중 사상자 수를 최소 6000명 이상으로 집계하였다. 전투경험 없이 용맹함으로 맞섰던 북한군은 전자 정찰, 전자 장비, 드론 사용법에 무지했던 대가를 혹독히 치러야만 했다.
첫째, ‘총알받이’ 희생과 맞바꾼 통치 자금 확보의 모순성과 지속성이다. 쿠르스크 전투는 현대전의 잔혹함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드론과 정밀유도병기가 판을 치는 전장에 투입된 북한의 젊은 군인들은 익숙지 않은 지형, 전술 속에서 최후의 순간 “김정은 장군 만세”를 외치며 속수무책으로 산화되어갔다. 김 위원장에게 이들의 희생은 일차적으로 대러시아 경제적 청구금액의 증액을 의미한다. 국정원(2024년 10월)에 따르면, 북한의 파병군인이 러시아로부터 받는 1인당 월 급여는 2000달러, 노동자들은 800달러 수준이며 전사자 추가 보상금은 대북 제재로 막힌 외화벌이의 숨통을 틔워주었다. 하지만 인민의 생명을 담보로 국고를 채웠다는 비판은 북한 내부의 잠재적 불만을 키울 수 있다. 이는 김 위원장이 인민들에게 강조해 온 ‘어버이 수령’의 이미지와 정면으로 충돌하며 ‘인민대중제일주의 통치력’에 의구심을 키울 수 있다.
둘째, 생존자들의 입이다. 전쟁은 언젠가 끝난다. 북한도 무한정 장거리 파병을 지속할 여력이 없다. 쿠르스크에서 살아남아 귀환할 병사들은 현대전의 실상과 전투성이 결여된 러시아군의 초라한 민낯, 그리고 전우들의 비참한 죽음을 목격한 이들이다. 북한이 자랑하는 최정예 특수부대 ‘폭풍군단’은 막대한 인적 심적 손실을 감내해야 했다. 이들은 참전군인에게서 나타나는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 등 정신건강에 대한 치료 및 관리가 생략된 채로 북한군 내에서 현대전을 몸소 습득한 ‘실전형 교관’ 대우를 받게 될 것이다. 양가적 존재인 이들은 김정은 정권이 감추고 싶어 하는 전장의 진실을 퍼뜨릴 수 있는 ‘위험한 불씨’이기도 하다. 최근 쿠르스크 전선에서 생포된 포로들이 한국으로의 귀순 의사를 밝히거나, 전장의 참혹함을 증언하는 인터뷰가 공개되었는데 그 전파력 또한 간과할 수 없다. 김 위원장에게는 뼈아픈 대목이다. 헌법상 우리 국민인 이들의 송환을 외교 당국은 인도주의 차원에서 서둘러주기를 바란다.
셋째, 북·러간 불평등 동맹관계의 부담이다. 파병은 북·러 관계를 단순한 우방에서 ‘혈맹’으로 격상시켰으나 러·우 전쟁의 현장에서 북한군은 독자적 지휘체계가 부재한 상황에서 러시아군의 편제에 편입되어 전투를 수행하였다. 더군다나 북한은 러시아의 전쟁 수행을 위해 희생된 자국 젊은이들의 핏값의 대가로 군사기술(ICBM 재진입 기술, 군사 정찰 위성 등 추정)이라는 보상을 약속받았기에 이는 동맹이론가들이 말하는 국력집합(capability aggregation)식 대칭적(symmetric) 동맹이 아닌, 자율성-안보거래(autonomy-security trade-off)식 비대칭적(asymmetric) 동맹관계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으로 볼 수 있다. 향후 높아진 대러 의존도를 적절히 관리하는 것은 김 위원장의 과제다. 러시아가 추가 파병을 요구할 때, 이미 수천 명의 희생자를 낸 북한 당국이 이를 거절할 수 없다면 비대칭적 동맹관계는 김정은의 ‘자주’ 노선을 퇴색시킬 것이며, 반대로 거절 시에는 러시아의 대체재를 미연에 확보해두어야 할 것이다.
쿠르스크는 북한 청년들의 ‘거대한 무덤’이 되었지만 김 위원장은 여전히 쿠르스크의 희생을 ‘제국주의와의 성전’으로 포장하며 내부결속을 다지고 있다. 전사자 통지서가 북한의 가정집에 배달될 때마다, 그가 짊어진 부채의 이자는 복리로 늘어날 것이다. 자금과 기술로 병사들의 목숨값을 대신하려는 계산은 당장은 유효해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인민의 피 위에 세워진 권력은 그 피의 대가를 요구받아왔다. 쿠르스크의 핏값은 단순한 보상금이 아니라, 김정은 정권의 미래를 저당 잡은 거대한 채무 증서로 남을 것이다. 우크라이나군에게 생포된 북한군 포로가 최근 국내 방송사와 한 인터뷰 내용이 귓전을 맴돈다 “같은 사람인데 뭐…죽고픈 사람이 어디 있고 목숨을 그렇게 쉽게 여기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한기호 필자 주요 이력
▷아주대 아주통일연구소 교수(연구실장) ▷연세대 통일학 박사 ▷통일부 과장(서기관) ▷(사)북한연구학회 대외협력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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