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두수의 절차탁마] 명함에 박사 타이틀 더해져도 결국…노동이 사람을 만든다

[이두수 작가]
[이두수 작가]

2026년 새해를 맞으며 올해의 표어를 하나 정했다. '새희망 새출발'. 작년의 표어가 ‘정리정돈’이었다면 올해는 말 그대로 새로운 시작이 겹쳐 있는 해다. 내 나이 만 60세가 되는 해다. 아프리카아시아난민교육후원회(ADRF) 대표로서 공식적인 일을 시작하고, 그동안 지방에서만 하던 건설노동도 수도권으로 현장이 바뀐다. 예정대로라면 8월에는 박사 학위도 받게 된다. 겉으로만 보면 책상 앞에서 하는 일들이 갑자기 늘어난 것처럼 보이지만 정작 나를 여기까지 데려온 힘은 책상이 아니라 공사장의 비계와 삽자루였다.

건설 현장에 나가기 전까지 나는 머릿속에서만 오래 맴도는 사람에 가까웠다. 책과 기획서를 붙들고 '노동과 인권, 교육의 가치란 무엇인가, 인간의 조건이란 무엇인가'를 묻는 시간을 즐겼다. 글로만, 머리로만 싸우는 사변의 시간도 분명 소중했다. 그러나 실제로 안전모를 쓰고 먼지와 소음 속에서 하루를 보내기 전까지 노동은 내게 어디까지나 개념이었다. 몸이 아니라 문장으로만 아는 단어였다.

현장에서 미장칼과 모르타르를 들고 갱폼 위를 오르내리면서 비로소 이해하게 된 것이 있다. 노동은 단지 먹고살기 위한 생계 수단이 아니라 나라는 사람을 빚는 학교라는 것이다. 현장에서 만난 어르신들 말투와 손동작, '이건 이렇게 해야 무너지지 않는다'는 몸의 기억, 위험을 눈치채고 서로를 챙기는 눈빛이 내 사고방식을 바꾸기 시작했다. 예전에는 ‘이론적으로 타당한가’를 먼저 물었다면 이제는 ‘현장에서 실제로 가능한가, 몸으로 버틸 수 있는가’를 먼저 묻게 된다.

노동을 하면서 나는 더 현실적인 사람이 되었다. 무엇이든 '구체적으로' '책임 있게' '끝까지' '깔끔하게' 해야 한다는 태도는 사무실이 아니라 공사장에서 몸에 밴 습관이다. 현장에서는 대충 넘긴 작은 틈이 나중에 큰 하자로 돌아오고, 오늘 대충 한 안전조치가 누군가의 생명과 직결될 수 있다. 꼼꼼함은 성격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라는 것을, 대충대충 시간이나 때우는 허술한 태도가 아니라 최선을 다하는 장인의 성실함이 필요하다는 것을 나는 노동을 통해 배웠다. 그 과정에서 오히려 몸은 더 건강해지고, 생각은 더 단단해졌다. 책상 앞에서만 고민할 때보다 현장에서 땀을 흘릴 때 더 선명한 인사이트가 떠오르는 경험도 여러 번 있었다.

하지만 내 삶은 거창한 명분이나 비전만을 추구하는 목적 지향의 삶은 아니다. 높은 산 하나를 정복하기보다는 산을 오르내리며 주변 풍광을 즐기는 재미가 오히려 더 크다는 것을 나는 안다. 성취욕을 버린 것이 아니라 성취에 이르는 과정을 결코 생략할 수 없다는 뜻이다. 흔히 인생의 ‘에르곤(ergon)’을 거창한 목표나 비전에서 찾으려 하지만 실제로 한 사람의 삶을 형성하는 것은 일상 속에서 반복되는 작은 실천과 소소한 기쁨들이다. 데리다의 표현을 빌리자면 본질을 비켜난 주변부의 ‘파레르곤(parergon)’처럼 보이는 이 일상의 조각들이야말로 우리 삶이 어떤 방향과 의미를 갖는지를 드러내는 액자 역할을 한다.
예전에 군대에 가면 '국방부 시계는 거꾸로 놓아도 돌아간다'는 말을 자주 들었다. 아무리 힘들어도 시간은 흐르고, 어떻게든 제대 날짜는 다가온다는 뜻이다. 국방의 의무니까 어쩔 수 없이 군대에 왔고, 그러니 ‘버티기만 하면 된다’는 체념이 숨어 있는 말이기도 하다. 사람은 스스로 선택하지 않은 자리, 자기 안에서 동기가 생기지 않은 일을 할 때 그 환경을 외면하거나 최소한으로만 견디려는 마음이 생긴다.

노동 현장도 비슷하다. 이쪽 일은 원래 힘들고 거칠다. '내가 원해서 온 게 아니고, 할 수 없이, 어쩔 수 없이 하는 일'이라는 부정적 시각은 일을 대하는 태도 자체를 그렇게 만들어 버린다. 하루하루를 ‘시간 때우기’로 느끼게 하고, 결국 삶 전체를 부정하고 싶게 만들기도 한다. 사회 역시 그 시선을 그대로 반사해 막노동꾼으로 보는 것이다. 건설노동자를 '잠시 거쳐 가는 사람, 실패해서 밀려난 사람, 언젠가는 떠날 사람, 불결하고 거친 말을 일삼는 사람' 정도로만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한편에서는 앞으로 거칠고 힘든 일은 휴머노이드로 대체될 거라고 말한다. 지식 중심의 일자리도 빠르게 AI로 대체될 거라는 전망이 이어진다. 글로벌 리서치 기관인 가트너는 2028년부터 매년 일자리 수천만 개가 AI에 의해 재편될 수 있다고 경고하고, 많은 일자리에서 '전통적 업무' 대신 AI와 협업하는 형태가 필수가 될 것이라고 말한다. 다른 분석들은 2030년경이 되면 전체 노동의 최대 30% 이상이 자동화 대상이 될 수 있다고 예측하며, 일부는 그 비율이 70%에 이를 수 있다고까지 말한다.

지금까지는 '노동을 제공하고 임금을 받는다'는 구조가 개인의 정체성, 하루의 리듬, 사회복지 시스템까지 모두 떠받치고 있다. 반복적이고 위험한 작업, 단순 사무와 계산, 운송·물류·제조의 상당 부분은 AI·로봇·휴머노이드로 빠르게 대체되거나 '사람+기계 협업' 구조로 바뀔 가능성이 크다. 그 과정에서 '더 이상 내 몸을 어디에 팔아야 하나' '임금 없이 어떻게 살아야 하나'라는 경제적 질문과 함께 '일이 없으면 나는 누구인가' '일하지 않는 인간은 가치가 있는가'라는 존재론적 질문이 동시에 떠오를 수 있다.

낙관적인 전망에서는 AI가 반복적이고 위험한 일을 대신하면서 인간이 창의성·공감·판단·돌봄·공동체 활동에 더 많은 시간을 쓸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비관적인 전망에서는 기업들이 비용 절감을 이유로 대량 실업을 촉발하고, 의미 있는 일을 할 기회를 가진 소수와 그렇지 못한 다수 사이의 격차가 커질 수 있다고 걱정한다. 어느 쪽이든 결국 질문은 하나로 모아질 것이다.
“일을 ‘생존 수단’이 아니라 ‘세계와 관계 맺고 자신을 드러내는 행위’로 다시 정의할 수 있는가?”

AI와 로봇이 임금노동을 상당 부분 대체하더라도 '노동'과 '행위'는 계속될 수밖에 없다. 인간은 생각한 것을 바깥으로 꺼내 구체적인 형태로 만들고, 그것을 타인과 나누려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임금노동과 인간의 행위는 다르다. AI가 대체하는 것은 주로 '지정된 작업을 효율적으로 수행하는 기능으로서의 노동'이다. 그러나 인간의 노동에는 생존을 넘는 차원, 즉 '내가 무엇을 의미 있다고 느끼는가, 누구를 위해 무엇을 만들고 싶은가'라는 행위의 차원이 있다. 이 차원에서는 결과물이 돈이 되든 안 되든, 생각하고, 설계하고, 몸을 움직여 뭔가를 만드는 활동이 계속 이어질 수밖에 없다.

나만을 위한 생산이 아니라 누군가를 위해, 함께 쓰기 위해, 누군가가 안전하고 편안하게 살도록 만들기 위한 노동은 그 자체로 관계를 맺는 행위다. 건물을 짓고,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교육 프로그램을 만드는 일은 모두 '눈에 보이는 것 너머의 삶을 상상하고, 그 삶을 위해 무언가를 빚어내는 일'이라는 점에서 숭고하고 아름답기까지 하다.

어제는 영하의 추운 날씨에도 미장을 너무 열심히 했는지 지금도 손목이 욱신거린다. 이 통증이 오히려 내가 살아 있다는 감각을 준다. 라오스의 빈곤층 가정에서 자란 한 아이가 ADRF의 지원으로 지금은 대학에 다니며 글로벌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는 편지를 보내왔다. 그 편지를 읽으며 오늘 하루의 피로가 조금은 다른 빛으로 느껴졌다.
그래서 나는 읽고, 생각하고, 쓰고, 그리고, 일하는 것을 내 삶의 기본 리듬으로 삼으려 한다. 현장에서 몸으로 일하고, 책상에서 글을 쓰고, 화폭 위에 장면을 옮기는 이 과정을 일상 속에서 반복하는 것, 나에게 이것이 노동이다.

인간은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 사유하고 명상하면서 수많은 상징과 은유, 비전과 개념을 만들어 왔다. 그리고 그 보이지 않는 것들이 실체 세계를 견인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무엇인가를 만든다는 것은 우선 그것을 생각해 내고, 다시 그것을 구체적인 형태로 빚어 내는 일이다. 생각한다는 것은 결국 질문하는 것이며, 인간의 호기심과 의문을 풀어 가는 과정에서 인류의 문명과 문화가 생겨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때 질문에서 출발해 그것을 구체적인 형태로 빚어 내고자 하는 모든 노력을 넓은 의미에서 ‘노동’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노동은 세계를 만들 뿐 아니라 그 세계 속에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배우게 하는 하나의 학교이기도 하다.

많은 이들이 '먹고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노동을 한다'고 말하지만 나는 조금 다른 말을 덧붙이고 싶다. 인간과 다른 생물의 차이 가운데 하나는 인간이 직립보행을 한다는 점이다. 바로 선다는 것은 땅에만 매달린 삶에서 벗어나 하늘의 원리를 알고자 하는 어떤 욕망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의 특질은 이처럼 눈앞의 현실적 삶을 넘어 보이지 않는 추상적 삶을 추구하는 데 있으며, 어쩌면 바로 그 힘이 인류의 문명과 문화를 여기까지 이끌어 온 원동력이었을지 모른다.

인간이 직립보행하는 존재이면서 동시에 사유를 지향하는 존재라는 점을 함께 놓고 보면 노동은 단순한 ‘동물적인 생존 행위’가 아니라 생각을 몸과 세계에 새겨 넣는 행위라는 의미를 갖게 된다. 그래서 노동은 ‘육체적인 것’과 ‘추상적인 것’을 가르는 경계가 아니라 둘을 잇는 다리라고 말할 수 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인카네이션(incarnation)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신성이 인성 안에 깃든 유일한 사건이라면 인간의 노동은 그 인카네이션의 길을 따라 우리 안의 보이지 않는 믿음과 사유가 몸과 세계 속에 구체화되는 작은 성육신의 자리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성인이나 위인을 신성과 인성이 조화를 이룬 완성된 인간의 모습으로 본다면 노동이야말로 그 신성을 내면에 새기고 실천 속에서 드러내어 점점 더 온전한 인간이 되어 가는 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 내 명함에 ADRF 대표이자 박사, 신문 칼럼니스트라는 타이틀이 더해진다고 해도 그 이름들을 지탱해 주는 것은 결국 먼지 속에서 보낸 하루의 노동일 것이다. 2026년 새해, 나에게 새희망과 새출발을 허락한 것도 결국 노동이라는 선생이다. 그래서 망설임 없이 이렇게 적어 본다. ‘노동이 사람을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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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호기심과 의문을 풀어 가는 과정에서 인류의 문명과 문화가 생겨났다. 질문에서 구체적인 형태로 빚어 내고자 하는 모든 노력을 넓은 의미에서 ‘노동’이라 부를 수 있다. 그림, 이두수 작가]  

필자 주요 이력 
idoosoo@naver.com
최근 수년간 일용직 건설 노동자 생활을 하며 현장의 일상을 글과 그림으로 표현해 왔다. 현재는 아프리카아시아난민교육후원회에서 빈곤지역 교육지원사업에 관여하고 있다. 건설 현장에서 몸으로 익힌 절차탁마의 정신을 실생활에 적용하기 위해 다양한 프로그램을 개발해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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