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재원 논설위원장]
세계는 지금 전쟁 중이다. 다만 이 전쟁은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는 전쟁의 모습과는 전혀 다르다. 총성이 울리지 않고, 병력이 이동하지 않으며, 뉴스 화면에 전선이 표시되지도 않는다. 그러나 이 전쟁은 이미 시작되었고, 그 결과는 각국의 산업 경쟁력과 국가의 장기 생존 능력을 가를 것이다. 이 전쟁의 본질은 영토도, 이념도, 통화도 아니다. 필자는 이 현상에 ‘주기율 전쟁’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싶다.
주기율 전쟁이란 화학 교과서에서 배웠던 주기율표에 등장하는 원소들, 그중에서도 산업과 기술, 에너지 체계의 핵심을 이루는 원소들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국가 간 경쟁을 의미한다. 구리, 리튬, 니켈, 코발트, 망간, 흑연, 희토류, 갈륨, 게르마늄, 은, 알루미늄, 그리고 우라늄까지. 이 원소들의 공통점은 명확하다. 인공지능, 전기차, 에너지 전환, 탄소 감축, 방위산업 어느 하나에서도 빠질 수 없다는 점이다. 그리고 바로 이 점 때문에 원소는 더 이상 단순한 원자재가 아니라 국가 전략의 기초 단위가 되었다.
최근 몇 년간 이들 원소의 가격은 거의 예외 없이 상승했다. 그러나 가격 자체는 현상의 표면일 뿐이다. 더 중요한 변화는 각국 정부와 글로벌 기업이 이 원소들을 바라보는 인식이 완전히 달라졌다는 점이다. 이제 원소는 비용 항목이 아니라 산업 전략의 출발점이자 외교 협상의 카드, 안보 자산으로 취급된다. 이 변화의 결과, 주기율표는 더 이상 실험실의 참고표가 아니라 21세기 산업 전략 지도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20세기 산업 질서를 지배한 것은 석유였다. 석유를 안정적으로 확보한 국가가 성장했고, 금융과 군사력, 외교력이 그 위에 쌓였다. 석유는 단순한 에너지원이 아니라 세계 질서를 규정하는 전략 자산이었다. 그러나 21세기는 분명히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우리는 지금 태워서 움직이는 경제에서, 전기를 만들고 저장하고 계산하는 경제로 이동하고 있다. 이 전환은 단일 자원으로는 성립할 수 없다. 수많은 원소가 동시에 필요하고, 그 조합과 통제 능력이 곧 산업 경쟁력이 된다.
인공지능은 이 변화를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AI는 흔히 알고리즘과 데이터, 소프트웨어 경쟁으로 묘사된다. 그러나 현실의 AI 산업은 철저히 물리적이다. 초대형 데이터센터는 소규모 도시 하나에 맞먹는 전력을 소비한다. 이 전력을 안정적으로 공급하기 위해서는 발전소, 송전망, 변압기, 배전 설비, 냉각 시스템이 필요하다. 이 모든 것은 금속과 원소의 집합체다.
구리는 송전과 배전의 핵심 원소다. 알루미늄은 장거리 송전에 필수적이다. 니켈과 흑연은 에너지저장장치의 기본 재료다. 은은 고효율 전력과 태양광 설비에 사용된다. 여기에 원자력 발전을 구성하는 우라늄이 결합된다. 우라늄은 더 이상 특수한 에너지원이 아니다. AI 시대의 안정적인 기저 전력을 떠받치는 주기율표 속 전력 원소로 재정의되고 있다.
AI 데이터센터가 늘어날수록 전력 수요는 폭증한다. 재생에너지만으로 이를 감당하기는 어렵다. 이 때문에 세계 각국은 원자력을 다시 들여다보고 있으며, 이는 우라늄과 핵연료 전주기, 즉 전환·농축·연료 제조 능력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진다. 우라늄 가격 상승은 투기적 현상이 아니라 전력 구조 변화가 주기율표에 투영된 결과다.
전기차 전환은 주기율 전쟁을 또 다른 차원으로 끌어올린다. 내연기관차는 철강과 알루미늄 중심의 산업이었다. 반면 전기차는 주기율표의 결정판이다. 리튬, 니켈, 코발트, 망간, 흑연, 희토류 없이 전기차는 단 한 대도 움직일 수 없다. 전기차 한 대에 들어가는 광물의 양은 내연기관차보다 훨씬 많고, 그 종류도 다양하다.
더 중요한 점은 전기차 확산이 단순한 차량 교체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는 교통 시스템 전체를 거대한 전기 저장망으로 바꾸는 과정이다. 수백만 대의 전기차는 동시에 이동 수단이자 배터리이며, 전력 시스템의 일부가 된다. 이 구조가 정착될수록 원소 수요는 단기간에 줄어들 수 없고, 오히려 누적적으로 증가한다. 전기차 전환이 주기율 전쟁을 구조적·장기적 경쟁으로 만드는 이유다.
탄소제로 사회 지향 역시 이 흐름을 강화한다. 풍력과 태양광, 에너지저장장치, 수소 경제는 모두 금속 집약적 산업이다. 태양광에는 은과 알루미늄이 필요하고, 풍력에는 희토류와 대형 철강 구조물이 들어간다. 수소 경제에는 니켈과 백금족 금속이 필수적이다. 탄소를 줄이기 위해 우리는 역설적으로 더 많은 금속을 소비한다. 탄소중립은 자원을 덜 쓰는 사회가 아니라 주기율표를 더 깊이 파는 사회다.
이러한 구조적 변화는 이미 매우 구체적인 현장에서 확인된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최근 영국 파이낸셜타임스가 다룬 구리 특집이다. 파이낸셜타임스는 2025년 12월 3일자에서 ‘AI 붐을 연결하는 구리를 찾아서’라는 제목의 특집을 통해, 인공지능 확산이 구리 수요 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꾸고 있다고 진단했다. AI 데이터센터는 기존 데이터센터보다 훨씬 많은 전력을 필요로 하고, 이를 연결하는 송전망과 배전 설비에는 대량의 구리가 필수적으로 들어간다. 이 때문에 구리는 더 이상 단순한 산업 금속이 아니라, 디지털 경제의 혈관 역할을 하는 전략 자원으로 격상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 특집은 국제에너지기구 분석을 인용해, 현재 계획된 광산 생산만으로는 2030년대 중반 예상되는 글로벌 구리 수요의 상당 부분을 충족하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했다. 문제는 수요 급증보다 공급 제약이 더 심각하다는 점이다. 신규 구리 광산 개발은 환경 규제와 지역사회 갈등, 인허가 지연으로 수년씩 늦어지고 있고, 정련·가공 능력은 특정 국가에 편중돼 있다. 파이낸셜타임스는 이로 인해 구리 시장이 이미 가격의 문제가 아니라, 누가 물량을 확보하고 통제할 수 있는가의 문제로 이동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AI 시대의 경쟁력은 반도체 설계도나 알고리즘만으로 결정되지 않으며, 그것을 연결할 구리를 누가 안정적으로 확보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경고다.
이 같은 흐름은 런던금속거래소(LME)에서도 그대로 관찰된다. LME는 오랫동안 산업 금속의 기준 가격이 형성되는 중립적 시장으로 인식돼 왔다. 그러나 최근 LME는 단순한 가격 발견의 장을 넘어, 각국과 글로벌 기업들이 실물 물량을 놓고 경쟁하는 전략 무대로 변모했다. 특정 금속의 재고가 급감하거나, 특정 국적의 기업이 인도 가능한 물량을 선점하는 순간 가격은 급등한다. 이는 투기가 아니라 공급망을 먼저 쥔 쪽이 가격 결정권까지 가져가는 구조가 정착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2022년 3월 LME 니켈 시장에서 벌어진 ‘니켈 쇼크’는 주기율 전쟁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사건이었다. 거래 중단과 계약 무효화라는 초유의 사태는 단순한 시장 혼란이 아니었다. 니켈이 전기차 배터리의 핵심 원소로 격상된 상황에서, 특정 국가가 정련과 가공을 통제하기 시작하자 시장의 취약성이 한꺼번에 노출됐다. 이 사건 이후 시장은 분명한 교훈을 얻었다. 주기율표의 핵심 원소는 더 이상 금융상품이 아니라 국가 전략 자산이라는 사실이다.
중국이 갈륨, 게르마늄, 흑연 등 특정 원소에 대해 수출 통제와 허가제를 강화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는 가격을 올리기 위한 조치가 아니다. 목적은 글로벌 첨단 산업이 중국의 정책 결정에 구조적으로 민감해지도록 만드는 데 있다. 이 원소들은 개별 산업에서는 조연처럼 보일 수 있지만 반도체와 AI, 통신, 방위산업에서는 대체가 거의 불가능하다. 공급이 잠시만 막혀도 생산 라인이 멈춘다. 이로 인해 시장은 가격보다 공급 가능성과 정치적 안정성에 훨씬 더 큰 프리미엄을 매기기 시작했다.
미국과 유럽의 산업 정책도 같은 방향을 가리킨다. 미국의 인플레이션감축법과 유럽연합의 핵심원자재법은 겉으로는 산업 지원 정책처럼 보이지만, 그 출발점은 언제나 동일하다. 주기율표에 있는 어떤 원소를, 어느 동맹권 안에서 확보할 것인가다. 이들 정책은 시장에 맡기겠다는 선언이 아니라, 주기율 전쟁에 국가가 직접 개입하겠다는 선언이다.
이제 한국의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한국은 자원 빈국이다. 그러나 더 위험한 것은 자원이 없다는 사실이 아니라, 주기율 전쟁을 여전히 개별 기업의 원가 문제나 일시적 가격 변동으로 인식하는 태도다. AI와 반도체, 전기차, 배터리를 이야기하면서 그 기반이 되는 원소와 공급망 전략을 부차적 문제로 취급하는 순간, 우리는 산업의 심장부를 외부에 맡기게 된다.
한국의 생존 전략은 분명하다. 광산 소유 경쟁에 뛰어드는 것은 현실적이지도, 효율적이지도 않다. 대신 우리는 정련과 소재, 가공과 재활용에서 주도권을 확보해야 한다. 원소는 캐낼 수 없더라도, 원소를 산업화하는 능력은 만들 수 있다. 고순도 정련 기술, 차세대 소재 설계, 도시광산과 재활용 기술은 ESG와도 맞고, 한국 제조업의 강점과도 맞닿아 있다.
또 하나 중요한 축은 금융과 외교다. 장기 오프테이크(공급자와 구매자의 사전합의) 계약을 국가 신용과 결합해 패키지로 설계해야 한다. 개별 기업이 감당하기 어려운 정치적·환율 리스크를 국가 차원에서 분산시키는 전략이 필요하다. 주기율 전쟁은 기업 혼자 싸울 수 있는 전쟁이 아니다. 이는 국가 운영 능력의 시험대다.
수요 관리 역시 자원 전략이라는 인식 전환이 필요하다. AI 데이터센터의 에너지 효율, 전기차 배터리의 원소 대체, 소프트웨어를 통한 금속 사용량 절감은 모두 보이지 않는 자원 정책이다. 주기율 전쟁에서 승리하는 국가는 더 많이 쓰는 나라가 아니라, 덜 쓰고도 더 많은 가치를 만드는 나라다.
주기율표는 이제 시험 문제의 표가 아니다. 그것은 산업 전략의 지도이자, 외교 전략의 참고서이며, 국가 생존 전략의 설계도다. 앞으로의 경쟁은 이렇게 묻게 될 것이다. “당신의 나라는 주기율표의 어느 칸을 책임지고 있는가-.”
세계는 이미 주기율 전쟁에 들어섰다. 자원 빈국 한국의 선택지는 분명하다. 주기율표를 새로운 산업 전략 지도로 삼아 생존의 길을 설계하는 길이다. 시간이 촉박하다.
곽재원 필자 주요 이력
▷전 중앙일보 경제부국장, 도쿄특파원 ▷전 서울대 공과대학 초빙교수 ▷전 한양대 기술경영학 석좌교수 ▷전 경기도 경기과학기술진흥원 원장 ▷현 가천대·호서대 초빙교수 ▷현 아주경제 논설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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