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곽재원 논설위원장]

중국심서(中國心書) 2025 ⑥
‘공장전쟁(Factory War)’이라는 새로운 단어가 국제경제의 전면에 떠올랐다. <칩워(Chip War)>의 저자 크리스 밀러는 최근 발표에서 “반도체 전쟁의 다음 무대는 공장전쟁이 될 것”이라 경고했다. 그가 말하는 공장은 단순히 물건을 찍어내는 장소가 아니다. 국가의 기술력, 자동화 역량, 인공지능 통합능력이 집중된 전략 거점이라는 뜻이다. 생산설비를 가진 나라가 아니라, ‘지능화된 공장’을 운영할 수 있는 나라가 패권의 중심에 선다는 그의 주장은 일본에 큰 충격을 주었다. 이미 중국이 제조업 강국으로 세계 1위 자리를 차지한 상황에서, 공장전쟁이 시작된다면 일본은 기술력의 우위를 유지하더라도 스케일(규모)과 속도에서 불리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지금 일본 정부와 산업계는 국가 차원의 대응전략을 서두르고 있다.
중국은 2015년 시진핑 정부가 내놓은 ‘중국제조 2025(Made in China 2025)’ 이후 10년 가까운 시간을 거치며 사실상 포스트 제조 2025 체제로 진입했다. 초기 계획은 10대 전략산업(로봇, 항공기, 첨단철도, 전기차, 반도체 등)의 국산화를 목표로 했다면, 지금의 포스트 제조2025는 단순한 제조 국산화를 넘어 ‘AI-로봇 융합 제조체계’로 전환되고 있다. 중국 산업정책의 최근 키워드는 세 가지다. 첫째는 AI+산업, 둘째는 디지털 트윈과 클라우드 제조, 셋째는 지역별 스마트공장 클러스터이다. 2024년부터는 각 성(省) 단위로 ‘AI 제조 고지대(高地)’ 구축이 본격화되었고, 상하이·선전·우한·항저우 등 주요 도시에는 생산라인의 70% 이상이 자동화·무인화된 공장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이는 단순히 노동비 절감이나 효율화 차원을 넘어, 인공지능으로 생산·공급·물류를 통합 제어하는 시스템으로 발전하고 있다.
이런 위기의식 아래 일본은 ‘팩토리 워(Factory War)’에 대응하는 세 단계 전략을 구상했다. 첫째는 공장입지의 다핵화, 둘째는 기술연계의 네트워크화, 셋째는 생산능력의 동맹화이다. 일본이 지금 추진 중인 이른바 ‘3핵(三核) 클러스터 전략’은 그 상징적 시도다. 북쪽의 홋카이도, 남쪽의 구마모토, 동쪽의 도호쿠 세 지역을 축으로 하여 국가 전체의 제조력을 한데 엮겠다는 구상이다.
홋카이도에는 미 IBM과 벨기에 반도체 연구기관 아이멕(Imec)이 공동 참여한 라피더스(Rapidus) 프로젝트가 추진 중이다. 2나노미터급 첨단공정 기술을 개발해 2027년까지 양산에 들어간다는 계획이다. 일본 정부는 이미 3조엔 이상을 투입했고, 홋카이도 신치토세 인근 지역을 ‘AI 반도체 기술연구특구’로 지정했다. 구마모토에는 세계적 파운드리 기업 TSMC의 제1공장에 이어 제2공장이 속속 들어서고 있다. 소니, 덴소, 도요타 등이 투자자로 참여해 일본형 ‘자동차·산업용 반도체 허브’로 육성 중이다. 도호쿠는 대만 PSMC와 일본의 로봇·FA(Factory Automation) 기업들이 모여 ‘메모리-패키징-로봇융합 클러스터’로 발전하고 있다. 이 세 지역이 일본 제조업의 새로운 3핵으로 자리 잡고 있으며, 이 구상은 일본 경제산업성(METI)과 신에너지산업기술종합개발기구(NEDO)가 직접 관리하는 국가 프로젝트로 성장했다.
이른바 ‘3핵 클러스터’는 단순히 생산거점을 분산하는 수준이 아니다. 데이터·전력·인력·기술이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디지털트윈 기반 공장네트워크를 지향한다. 일본은 이를 ‘Nippon Factory Network 3.0’이라 부른다. 홋카이도의 연구개발이 구마모토의 생산라인으로 실시간 전송되고, 구마모토의 생산데이터는 도호쿠의 로봇·FA 라인에서 피드백되어 다시 공정개선을 유도하는 구조다. 세 지역은 전력망(전력구매계약·에너지 저장장치 백업)으로도 연결되고, 산·학·연 인재교류 시스템(Factory Academy)으로 묶인다. 각 지역별로 AI전력관리센터를 운영해 생산·에너지·탄소배출을 동시 관리하는 스마트공장 운영체계를 구축한다는 계획이다. 이는 단순한 제조혁신이 아니라, 에너지·환경·노동·데이터를 통합하는 ‘국가적 공장생태계’로의 진화라 할 수 있다.
일본의 이런 시도는 1980년대 제조산업의 황금기 이후 처음으로 등장한 전면적 산업재편이다. 과거에는 도쿄권 중심의 본사·연구소, 나고야·오사카권 중심의 생산체계라는 이원구조였다면, 이제는 지역 균형형 다핵체제로 전환하고 있다. 홋카이도, 구마모토, 도호쿠라는 선택은 지리적·전략적으로도 의미가 깊다. 홋카이도는 러시아와 가까워 북방 안보·기술거점의 상징이고, 구마모토는 대만·아시아 공급망과의 연결성이 탁월하다. 도호쿠는 동일본 대지진 이후 부흥정책의 중심지로, 지역경제 회복과 기술집적을 동시에 달성할 수 있는 지역이다. 세 곳 모두 일본의 신(新)지정학적 제조지도에 핵심으로 찍히고 있다.
일본이 공장전쟁에서 내세우는 또 다른 전략 키워드는 ‘질(質)의 동맹’이다. 일본이 스스로 공장규모를 중국 수준으로 확대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판단 아래, 미국·대만·EU 등 동맹국과의 ‘공급망 동맹’을 강화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일본 경제산업성은 올해 5월 미국 상무부와 함께 ‘공장기반 공급망 협력위원회’를 신설했다. 반도체·배터리·희토류·첨단소재 등의 생산거점을 공동으로 배분하고, 생산·조달·재고·물류 데이터를 공유하는 시스템을 설계하기로 합의했다. 이른바 ‘얼라이언스 서플라이체인 이니셔티브’로 불리는 이 정책은 사실상 공장전쟁의 군사동맹 버전이다. 일본 내부에서는 이를 ‘경제판 미일안보조약’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일본 정부는 보조금 정책의 방향도 전면적으로 바꾸고 있다. 과거에는 생산량이나 고용규모에 비례해 지원금을 지급했지만, 이제는 기술성숙도, 생산성, 에너지효율, 데이터 연동 수준 등에 따라 성과연동형으로 전환했다. 단순한 공장설립 지원이 아니라, 공장을 얼마나 지능화하고, 얼마나 탄소중립적으로 운영하느냐가 보조금의 핵심 조건이 된다. 또한 경제안보전략회의는 2027년까지 산업데이터 스페이스를 제도화하기로 했다. 반도체·배터리·자동차·로봇 산업별로 생산데이터를 표준화하고, 데이터권리·보안·수익배분 규칙을 명시한 것이다. 이는 한국이나 유럽이 추진 중인 산업데이터 스페이스 모델과 유사하지만, 일본식 특징은 ‘정부·기업 공동의 권리 공유’에 있다. 공장전쟁 시대의 자산은 데이터라는 사실을 일본은 명확히 인식하고 있다.
이러한 ‘질의 동맹’ 전략은 중국과의 정면 대결을 피하면서, 기술·인재·데이터·공급망을 동맹국 중심으로 재배치하는 효과를 낸다. 일본의 경제안보 전략가들은 “중국이 공장을 양으로 늘린다면 일본은 공장을 네트워크로 엮어 질로 맞선다”고 요약한다. 실제로 2024년 일본의 제조산업 생산지수는 2년 연속 하락세지만, 반도체 장비·정밀부품·로봇 분야의 생산성 지수는 오히려 상승세를 기록했다. 이는 단순히 경기회복이라기보다, 공장자동화·데이터화가 일정한 성과를 내고 있음을 보여준다.
일본의 대응이 이렇게 빠른 것은 중국의 ‘포스트 제조 2025’ 정책이 이미 공장전쟁의 실질적 1라운드를 열었기 때문이다. 중국은 현재 ‘신형공업화 전략’이라는 이름으로 2035년까지 제조 강국에서 ‘지능제조 강국’으로 도약하는 계획을 세웠다. 그 핵심은 'AI가 통제하는 초대형 스마트팩토리' '지역별 산업 클러스터의 AI화' '산업데이터를 국가통합플랫폼에서 관리하는 체계다. 예컨대 광둥성의 ‘스마트공장 1000 프로젝트’는 2025년까지 1000개의 AI·로봇 융합공장을 가동하는 목표를 세웠고, 저장성은 ‘AI 제조 시티’를 조성해 전력·물류·공정 데이터가 한 플랫폼에서 통제되도록 하고 있다. 이러한 속도를 일본은 두려워하고 있다. 일본의 한 경제학자는 “중국의 공장은 이미 AI가 지배한다. 일본이 아무리 정밀해도 속도가 늦으면 공장전쟁에서 지게 된다”고 경고했다.
그렇다면 일본은 앞으로 어떤 길을 걸어야 할까. 우선 일본은 ‘질적 동맹’과 ‘국가 클러스터화’를 더 강하게 밀어붙일 것이다. 기술·데이터·전력·인력·자본을 하나로 엮는 구조를 완성하지 못하면, 일본의 공장은 결국 섬처럼 고립될 수 있다. 일본 정부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2025년부터 ‘Nippon Factory Network 법안’을 추진 중이다. 이 법은 반도체·배터리·로봇 등 전략산업의 공장 간 데이터교환과 인력파견, 전력공유를 제도적으로 보장한다. 산업정책이 아닌 인프라법 형태로 상정되어, 제조업 전체를 하나의 거대한 디지털생태계로 재편하려는 시도다. 또 일본은 ‘경제안보 기술연구센터(ESTI)’를 신설해 AI공정·로봇공정·소재 데이터 연구를 통합 관리할 계획이다. 이는 미국의 국립표준기술연구소(NIST), 독일의 프라운호퍼,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이 수행하는 역할과 유사하지만, 방위·산업·외교를 모두 엮는 형태다.
궁극적으로 일본은 공장전쟁을 단순한 산업경쟁이 아니라, ‘문명적 생존전략’으로 본다. 20세기 일본의 산업 기적이 인구·노동·기계의 결합이었다면, 21세기 일본의 재도약은 AI·데이터·공장의 결합에서 온다. 일본은 이미 늦었지만 방향을 잃지는 않았다. 다핵 클러스터를 중심으로 한 산업재편, 동맹형 공급망, 데이터중심의 제조혁신은 공장전쟁 시대의 필수 조건이다. 중국의 포스트 제조2025가 압도적 규모와 속도로 세계 제조지형을 바꾸고 있다면, 일본은 고밀도·고지능·고신뢰의 체계로 맞서는 것이다.
세계는 이제 칩워에서 팩토리워로 이동하고 있다. 반도체가 산업의 심장이었다면, 공장은 산업의 신경망이다. 누가 더 많은 칩을 만드는가보다, 누가 더 똑똑하게 공장을 돌릴 수 있는가가 국가경쟁력을 결정짓는다. 중국이 속도와 규모를 앞세운다면, 일본은 지능과 연대, 그리고 품질로 맞서야 한다는 전략이다. 그 전략의 성패는 홋카이도, 구마모토, 도호쿠—이 세 지역에서 결정될 것이다.
일본의 ‘3핵 클러스터 전략’은 공장 지능화·네트워크화·동맹화로 국가 경쟁력을 재편하는 프로젝트다. 한국도 AI 3대 강국 비전을 실현하려면 기술·인재·데이터·공장을 유기적으로 연결하고, 클러스터 단위 제조혁신·AI 테스트베드 구축·동맹형 공급망·현장 인재 전환을 서둘러야 한다.
곽재원 필자 주요 이력
▷전 중앙일보 경제부국장, 도쿄특파원 ▷전 서울대 공과대학 초빙교수 ▷전 한양대 기술경영학 석좌교수 ▷전 경기도 경기과학기술진흥원 원장 ▷현 가천대·호서대 초빙교수 ▷현 아주경제 논설위원장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