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호이의 사람들③] 지금 이 순간, 좋아하는 걸 그려보세요" — 케서린 번하드의 예술적 즉흥성과 색채의 세계


케서린 번하드(Katherine Bernhardt)는 현대미술계에서 보기 드문 확신에 찬 감각주의자다. 그녀의 그림은 마치 색과 사물들이 자유롭게 춤추는 무대 같다. 도톰한 윤곽선과 강렬한 색채, 익숙한 캐릭터와 오브제들이 한데 얽히고 설켜 화면을 가득 메운다. 가필드, 스머프, 스타워즈, 바나나, 담배, 물병… 일상적이고 대중적인 것들이 번하드의 손을 거치면 놀랍도록 생기 있고 낯설게 다가온다.
그녀는 “예술은 도피이고, 동시에 예술 치료”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 말은 단지 수사적 표현이 아니다. 어릴 적 미술관에서 배운 그림이 삶의 일부가 되었고, 유화를 거부하고 아크릴에 매혹된 소녀는 이제 미국 미술의 또 다른 얼굴로 떠오르고 있다. 그녀의 그림은 무겁고 진지한 미술 담론보다는, 지금 이곳에서 반짝이는 것들에 더 가깝다. 하지만 그 가벼움 속에 담긴 통찰은 결코 가볍지 않다.
사진UNC갤러리
케서린 번하드 [사진=UNC갤러리]


그림을 시작하게 된 이유? 우연처럼, 자연스럽게
번하드의 그림 여정은 놀랍도록 평범한 계기에서 시작됐다.
“어렸을 때 세인트루이스 미술관에서 그림 수업을 들었어요. 고등학교 때는 다양한 그림 스타일을 실험해봤죠. 유화도 시도했지만 마음에 들지 않았고, 아크릴 물감은 너무 좋았어요.”
10대 시절, 그녀는 포르투갈의 풍경과 장면, 브라질과 관련된 이미지들을 탐색했고, 미술학교에서는 배경 없이 단일한 사물만 그리는 데 집중했다. 시간이 흐르며 그녀는 유명 잡지 속 슈퍼모델들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시점부터 회화는 그녀에게 ‘그림’ 그 이상이 되었다.
“작업실 바닥에 캔버스를 눕히고, 스프레이 페인트와 묽은 아크릴, 자유로운 붓질을 실험하면서 지금의 스타일이 형성됐어요. 그 즉흥적이고 실험적인 과정이 지금의 회화를 정의하죠.”
사진 UNC갤러리
[사진= UNC갤러리]



스머프, 바나나, 스타워즈… 이 ‘잡동사니’들은 무엇을 말하는가?
번하드의 그림에는 늘 무언가 ‘익숙한 것’들이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낯선 배치와 조합 속에서 완전히 새롭게 보인다. 그녀는 이를 ‘개인적 시각 언어’라고 표현한다.
“스머프, 과일, 담배, 스타워즈, 가필드 같은 오브제들은 단순한 장난감이나 캐릭터가 아니에요. 저의 아들의 관심사, 어린 시절 집안에 있던 잡동사니, 중고 상점에서 발견한 물건들… 모두 저만의 기억과 연결돼 있어요. 그리고 이런 사물들은 지금의 문화와도 연결돼 있죠.”
그녀는 일상에서 자칫 지나칠 수 있는 것들에 의도적으로 시선을 둔다. “지루하고 뻔한 것들, 하지만 그래서 더욱 의미 있는 것들.”
그리고 이 ‘의미 없음 속의 의미’를 찾는 태도는, 곧 그녀의 회화 전략이 된다.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것들을 섞는 게 좋아요. 그것들이 만났을 때 발생하는 낯섦과 유머를 사랑하거든요.”
사진 김호이 기자
[사진= 김호이 기자]


하나의 사물에서 ‘패턴 회화’로
처음 그녀는 의자, 신발 등 하나의 사물을 집중적으로 그렸다. “특정한 것에 집착했죠.”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그녀의 회화는 패턴으로 진화했다.
“처음에는 단순히 반복해서 그리는 것이 재미있었어요. 그런데 그 반복 자체가 일종의 리듬이 되고, 더 큰 화면에서 구조와 균형을 만들더라고요. 그다음엔 패턴 위에 또다시 익숙한 캐릭터들을 얹었어요. 가필드, E.T., 스머프…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것들을 함께 그리며 새로운 조화를 만들려고 했어요.”
이러한 반복과 병치, 콜라주 같은 구성은 화면에 리듬을 불어넣고, 복잡한 현대사회의 이미지들을 명확하게 정리해준다. 그녀의 시각 언어는 늘 유쾌하지만, 결코 단순하지 않다.
사진김호이 기자
[사진=김호이 기자]

즉흥성, 그리고 몰입의 순간
그녀에게 작업은 일종의 ‘몰입 퍼포먼스’에 가깝다.
“작업실에 들어가면, 제일 먼저 바퀴 달린 스프레이 테이블을 캔버스 앞으로 끌고 와요. 사다리도 같이요. 머릿속에 떠오른 이미지가 있으면, 주저하지 않고 바로 스프레이로 윤곽을 그립니다. 그다음엔 캔버스를 바닥에 눕히고 묽게 탄 아크릴 물감으로 본격적인 작업을 시작하죠.”
그녀는 말한다.
“가장 몰입되는 순간은 혼자 작업실에 있을 때예요. 음악을 크게 틀고, 몸이 완전히 지칠 때까지 물감을 뿌리고 붓질할 때. 그건 굉장히 신체적이고 감각적인 경험이에요. 완전히 몰입하게 되죠.”
그녀의 회화는 즉흥성과 우연을 적극적으로 포용한다. “색이 고이는 방식, 물감이 예상치 못한 모양을 만들어내는 방식… 그 모든 우연은 작품의 일부예요.”
사진 김호이 기자
[사진= 김호이 기자]

성공’과 ‘실패’를 가르는 기준은 단 하나: 에너지
그녀는 자신이 성공했다고 느끼는 작품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림에 처음의 에너지와 즉흥성이 고스란히 살아 있을 때, 그게 성공이에요.”
반대로, 그림이 지루하거나 충분히 복잡하지 않을 때는 실패로 느낀다고 말한다. “그럴 땐 화면에서 생기가 사라져요.” 흥미롭게도, 자신이 실패했다고 느낀 작품이 의외로 대중의 큰 반응을 얻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사진 김호이 기자
[사진= 김호이 기자]


뉴욕에서 배운 것들, 그리고 여성 작가로서의 시선
번하드는 현재 세인트루이스에서 거주하고 작업하고 있지만, 뉴욕에서의 경험은 그녀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뉴욕은 소비문화 이미지와 스트리트 아트가 넘쳐나는 곳이에요. 거기서 받은 자극이 제 회화의 기반을 형성했죠. 다양한 커뮤니티와 문화의 충돌, 활기, 시끄러움… 그런 요소들이 전부 그림으로 흘러들어왔어요.”
여성 작가로서 동시대 미술계에 바라는 점을 묻자, 그녀는 “더 많은 여성 예술가들이 주목받고, 목소리를 낼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사진 김호이 기자
[사진= 김호이 기자]


디지털 시대와 SNS, 그리고 ‘가벼움’에 대한 오해
인스타그램을 통해 작업과 일상을 공유하는 그녀는, 디지털 시대가 예술가에게 주는 영향력을 긍정적으로 본다.
“요즘은 작업을 온라인에 올리기만 해도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죠. 그건 정말 좋은 변화예요.”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작업을 두고 ‘너무 가볍다’, ‘장난 같다’고 평가하는 이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의도된 유머예요. 그림은 도피이자, 치유이자, 즐거움이에요. 사람들은 종종 제 작업이 어린아이 같다고 말하죠. 저는 그게 최고의 칭찬이라고 생각해요. 모든 연령대가 제 그림에 공감할 수 있으니까요. 만약 제 그림이 쉬워 보인다면, 당신도 직접 그려보세요. 무엇보다, 장난스러운 게 뭐가 나쁜가요?”
사진 김호이 기자
[사진= 김호이 기자]


예술가로서 계속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것들
그녀는 “에너지 넘치는 창작, 풍부한 색감, 그리고 새로운 모티프에 대한 탐구”가 자신을 움직이게 하는 동력이라고 말한다.
가장 두려운 것은 뭘까?
“즉흥성을 잃는 것, 자신에게 너무 집착하거나 내면에 갇히는 것, 그리고 신체적으로 지쳐 더 이상 큰 그림을 못 그리게 되는 거요.”
앞으로의 계획을 묻자, 그녀는 “더 큰 공공 미술 작업, 레지던시 참여, 그리고 나만의 시각 언어를 더 깊게 발전시키는 것”이라고 답했다.
사진 김호이 기자
[사진= 김호이 기자]


지금 내가 사랑하는 것들을 진심으로 그려라”
인터뷰를 마무리하며, 그녀는 예술가를 꿈꾸는 이들에게 마지막 말을 전했다.
“당신이 사랑하는 ‘별것 없어 보이지만 분명한 것들’을 그리세요. 본능을 믿고, 자기 자신을 나타내는 작품을 만들길 바랍니다. 당신만의 색과 언어를 통해 나오는 표현이 당신을 특별하게 만들 거예요. 자신에게 정직하고, 매일매일 꾸준히 그리는 것이 결국 가장 멀리 가는 길입니다.”
그녀의 말처럼, 모든 예술은 일상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어쩌면, 그 시작은 단지 하나의 스머프 인형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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