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장사가 아닌데, 왜 공시를 하지?”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DART)의 ‘기타법인 공시’ 항목을 처음 본 사람이라면 한번쯤 가질 만한 의문입니다.
기타법인 공시에는 삼성전자, SK하이닉스 같은 회사 대신 생소한 특수목적회사(SPC)나 프로젝트 펀드, 중소 투자회사의 이름이 줄지어 등장하죠. 겉보기엔 별 것 아닌 거 같지만 시장을 움직이는 ‘진짜 큰손’들의 발자취가 담겨 있습니다.
공시는 누가, 언제, 어디에, 얼마를 투자하거나 회수하는지에 대한 증거를 남기죠. 그게 아무리 비상장 법인이라 해도 자본시장과 연계돼 있다면 공시 의무를 피할 수 없습니다.
기타법인 공시의 핵심은 비상장 법인을 통해 대기업의 지배구조·투자 흐름을 추적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이게 바로 ‘기타법인 공시’를 보는 이유죠.
SK그룹이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SK그룹은 SK㈜를 정점으로 SK E&S, SK실트론, SK온, SK이노베이션 등 계열사를 거느리고 있습니다. 이 중 일부는 비상장사지만 대규모 증자나 사채 발행, 투자자 유치 등 중요한 변화가 있을 때는 ‘기타법인 공시’로 알리죠.
예를 들어 SK E&S가 유상증자를 통해 수천억 원 규모의 자금을 조달하거나, SK온이 비상장 상태에서 대규모 투자를 유치할 경우 해당 법인은 기타법인 공시 대상이 됩니다. 이 공시를 통해 누가 투자자로 들어왔는지, 어떤 조건인지, 어떤 구조인지까지 들여다볼 수 있죠.
결국 상장사만 본다면 겉껍질만 보는 거고, 기타법인 공시를 함께 본다면 알맹이까지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일반투자자에게 생소한 사모펀드(PEF)나 대형 벤처캐피탈(VC)의 투자도 기타법인 공시를 통해 포착되기도 합니다. PEF는 보통 SPC를 만들어 투자에 나서는데, SPC가 발행하는 전환사채(CB), 신주인수권부사채(BW), 유상증자 등은 공시 대상입니다.
이로써 투자자는 발행조건, 전환가액, 투자자 명단 등을 파악할 수 있죠. 이때 투자자가 발행시점과 조건 등을 살펴보게 되면 인수합병(M&A)의 방향이 읽히기 시작합니다.
아울러 비상장사를 통한 자금조달은 향후 우회상장(백도어 리스팅)을 노리는 기업이나, 자금을 끌어모아 상장사에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전략적 투자자가 자주 활용하는 방식입니다.
이를테면 비상장사 A가 CB를 발행하는데, 전환가액이 현 시세보다 낮고 투자자가 특정 연기금이나 대기업 계열이라면 향후 자본 재편의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처럼 ‘상장 전 단계’의 움직임은 대부분 기타법인 공시에서 시작됩니다.
이처럼 기타법인은 나름대로 중요한 역할을 가졌음에도 공시 시스템 상 다소 소외된 입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매번 신경 쓰며 들여다보기도 번거롭죠. 하지만 주기적으로 들여다보면 시장의 전반적인 흐름을 읽을 수 있습니다. 특히 기타법인 공시에 자주 등장하는 투자사·SPC·PEF 법인명을 기억해두면 투자 대응을 적절히 할 수 있다는 게 꿀팁 중 하나입니다.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