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럽의 핵보유국인 영국과 프랑스가 사상 처음으로 양국 핵전력 사용을 조율하기로 합의했다. 러시아의 위협이 고조되고 미국의 유럽 방위 공약이 약화되는 가운데 두 핵보유국이 유럽 안보 주체로 나서겠다는 의지를 공식화한 것으로 평가된다.
미국 월스트리트저널(WSJ) 등 외신에 따르면 영국을 국빈 방문 중인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과 키어 스타머 영국 총리는 9일(현지시간) 회담을 열고 양국 핵억지력 조율 방안에 합의했다. 마크롱 대통령은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이후 유럽연합(EU) 정상으로서는 처음으로 영국을 국빈 방문하고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의 압박에 맞서 안보·경제 협력 방안을 논의 중이다.
영국 정부는 “이번 합의는 양국 각각의 (핵)억지력이 사상 처음으로 독립적이면서도 조율될 수 있다는 의미”라고 설명하며 "유럽에 대한 극단적 위협이 양국의 대응을 촉발하지 않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특히 프랑스가 전통적으로 나토(NATO)의 핵공유 체계에서 독자 노선을 유지해왔다는 점에서 이번 합의는 프랑스가 유럽적 차원의 공동 억지력에 일정 부분 발을 들인 것으로도 해석된다.
마크롱 대통령은 그간 프랑스 핵전력의 사용 기준이 ‘프랑스 핵심 이익’에 따라 결정된다고 밝혀왔으나, 그 이익의 범위에 ‘유럽 차원’이 포함된다는 점을 암시해왔다.
영국은 나토의 핵기획그룹(NPG) 회원국으로서 나토 안보를 위해 보유 전력을 공유하는 상황이지만 나토 핵공유협정에서 빠져 있는 프랑스는 핵전력 사용과 관련해 독립적인 결정을 하겠다는 입장을 고수해왔다고 파이낸셜타임스(FT)는 전했다.
이번 합의는 나토 차원의 집단방위 체계에 대한 미국의 공약이 흔들리고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유럽 안보가 위협받는 상황 속에서 이뤄졌다. WSJ은 이번 합의가 유럽 지역 전체에 대한 핵우산 확대를 시사한다고 지적했다. WSJ은 “미국이 제공하던 안전망으로부터 독립을 확대하면서 유럽 전역의 억지에 영국·프랑스의 핵무기를 제공하려는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영국과 프랑스가 보유한 총 핵탄두는 약 515기로, 미국(5200기)이나 러시아(5580기)와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적지만 핵탄두 1기만으로도 핵억지 효과는 막강하다. 독일 등 유럽 국가들은 러시아의 침공 이후 영·프의 핵억지력을 유럽 전체로 확대해야 한다고 촉구해왔으며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이같은 요구가 더욱 거세졌다.
양국은 이번 회담에서 2010년 체결한 ‘랭커스터 하우스 협정’을 발전시킨 ‘랭커스터 하우스 2.0 선언’에도 서명할 예정이다. 양국은 우크라이나 전장에서 운용 중인 스톰섀도 및 스칼프 미사일을 대체할 차세대 장거리미사일, 공대공 미사일, 극초단파 무기 공동 개발에 나서기로 했다. 아울러 동시타격역량 향상을 위해 인공지능(AI)을 활용하는 방안이 포함됐다.
일각에서는 양국이 안보 협력 강화를 선언해온 것과 달리 실질적인 협력으로 이어진 경우는 별로 없었다는 회의론도 제기된다. 닉 커닝엄 국방전문가는 “이번 합의가 실질적 행동으로 이어질지는 더 지켜봐야 한다”고 WSJ에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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