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법인의 대표자라 하더라도, 그 법인이 사실상 범죄 수단으로 설립된 경우라면 ‘타인 명의’ 계좌를 이용한 것으로 보고 금융실명법 위반죄로 처벌할 수 있다는 대법원 판단이 나왔다. 법인의 법인격 형식을 악용한 자금세탁 범죄에 경고를 보낸 판결로 평가된다.
2심은 무죄, 대법은 파기…“실질 따져야”
대법원 2부(주심 권영준 대법관)는 최근 범죄수익은닉규제법 및 금융실명거래 및 비밀보장에 관한 법률(금융실명법) 위반 등 혐의로 기소된 A씨 등 사건에서, 하급심이 금융실명법 위반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한 부분을 파기하고 사건을 창원지법으로 돌려보냈다.피고인들은 2023년 4~7월 사이, 상품권 매매업체를 가장한 허위 법인을 설립한 뒤 이 명의로 금융계좌를 개설하고, 온라인도박 및 투자사기 조직에 해당 계좌를 제공해 범죄수익금을 수취·인출한 혐의로 기소됐다. 이들은 수수료를 받고 현금 인출 및 전달을 반복하며 범행에 가담한 것으로 드러났다.
하급심은 대체로 이들의 범행을 유죄로 인정했지만, 금융실명법 위반 혐의에 대해서는 무죄를 선고했다. 그 이유는 피고인들이 자신이 대표이사로 등기된 법인의 명의로 거래를 한 것이므로 ‘타인의 실명으로 거래한 것’이라 볼 수 없다는 판단이었다.
재판부는 먼저, 해당 법인이 오로지 범죄수익 자금세탁 등을 목적으로 설립됐다는 점에 주목했다. 즉 겉으로는 대표이사로서 자신의 법인 명의로 거래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이를 자신의 범죄를 위한 도구로 삼은 것이라는 판단이다.
이에 대해 대법원은 다음과 같은 법리를 제시했다.
“법인의 대표자 지위에 있는 행위자가 형식적으로는 법인 명의로 금융거래를 했으나, 실질적으로는 자신의 범죄 등을 위해 법인 명의를 수단으로 삼아 자신의 금융거래를 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는 경우, 그 거래는 ‘타인의 실명으로 한 금융거래’에 해당한다.”
즉 실질적으로는 ‘자기 돈을 남의 이름으로 돌린 것’과 다름없다는 의미다.
‘법인 남용’에 금융실명법 적용…자금세탁에 경고
이번 판결은 법인격의 남용이 있을 경우, 대표자 본인이 법인을 통해 이뤄낸 거래도 ‘타인 명의 거래’로 평가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법인 명의 계좌가 자금세탁과 범죄수익 은닉에 악용되는 경우가 많다는 점에서, 형식적 대표이사라는 지위만으로 면책을 받을 수 없음을 명확히 한 셈이다.특히 대법원은 범죄 목적의 법인 설립 여부, 계좌 개설 및 사용 경위, 실제 운영 실태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실질 판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는 향후 자금세탁·보이스피싱·도박 수익 은닉 사건에서 법인 명의 계좌 사용이 처벌 회피 수단이 될 수 없음을 천명한 판결로 해석된다.
그간 하급심에서는 법인 대표자가 법인 명의 계좌를 사용한 행위에 대해 금융실명법상 ‘타인 명의 거래’로 볼 수 있는지에 대해 보수적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었다. 법인의 실체와 운영 목적을 무시하고, 형식적으로 법인 명의 거래라는 이유로 처벌을 배제하는 한계가 있었던 셈이다.
이번 대법 판결은 “타인 실명”이라는 개념을 법인의 형식을 넘어서 실체에 기반해 해석해야 한다는 방향성을 제시한 것으로 평가된다. 실질 중심 원칙과 자금세탁 범죄 억제를 동시에 추구하는 해석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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