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준의 indonesia 스토리] '준비된 대통령' 프라보워 …연대와 타협이냐 권력독점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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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준 강원대 문화인류학과교수
입력 2024-03-08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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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준 강원대 문화인류학과교수
[김형준 강원대 문화인류학과교수]




지난 2월 14일, 인도네시아에서는 대통령과 부통령, 국회의원, 지역대표의원, 지방의회 의원을 선출하는 선거가 치러졌다. 선거가 끝나고 20여 일이 지난 현재까지 선거관리위원회의 공식 개표율은 대통령 선거의 경우 대략 78%, 국회의원 선거는 65%에 머물러 있다. 82만여 개 투표소에서 전체 유권자의 85%인 1억7000여 만명이 참여한 투표 결과 집계에 상당한 시간이 소요됨은 당연하지만, 선거 종료 후 하루가 지나지 않아 개표가 종결되는 우리의 상황과 비교할 때, 인도네시아의 개표 과정은 경이로운 모습으로 비추어진다. 하지만, 더딘 집계 과정은 인도네시아에서 이미 예견된 바로, 선관위의 공식 개표 결과 발표는 선거가 끝나고 한 달여가 지난 3월 20일로 예정되어 있다.

인도네시아 선거 과정에서 주목받은 문제 중 하나는 선거 관리원의 대규모 과로사였다. 특히 5년 전 치러진 선거에서 이 문제가 두드러져서, 공식 사망자 수가 900여 명에 달할 정도였다. 이번 선거를 앞두고 선관위에서는 신체검사를 통해 선거 관리원을 선발하고 관리 인원을 보강하는 등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고 그 결과 사망자 수가 대폭 감소했지만, 여전히 그 규모는 100여 명에 이르렀다.

더딘 개표율과 선거 관리원의 과로사는 선거에 부여된 상징적 의미를 통해 설명될 수 있다. 인도네시아에서 선거는 오랫동안 ‘민주주의의 축제’라 불려왔다. 민주적 관행이 일상에 깊게 뿌리내리지 못한 상황에서 선거가 민주주의의 축제임을 보여줄 방식은 개표 과정의 공정성과 투명성이었다. 따라서, 개표는 과도하게 여겨질 정도로 세심하고 꼼꼼한 절차를 거쳐 진행되었다.

투표가 끝난 후 곧바로 해당 투표소에서 진행되는 개표 과정은 유권자들의 직접적인 참여 아래 이루어진다. 개표한 투표용지를 선거 관리원이 양손에 펼쳐 든 채 기표된 후보나 정당의 이름을 거명하고 이를 유권자에게 보여주며 확인받으면, 다른 선거 관리원이 커다란 게시판에 부착된 집계표에 그 결과를 일일이 기록한다. 이런 과정을 거쳐야 하기에 몇 백명이 투표한 투표소에서 개표 과정을 마무리하기 위해서는 상당히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절차적 투명성에 대한 강조는 개표뿐만 아니라 집계 과정에도 적용된다. 컴퓨터로 최종 집계가 이루어지지만, 개표 결과를 컴퓨터에 입력하기 전까지 투표소에서 집계한 결과는 여러 단계의 검토 과정을 거치게 된다. 투명성 확보를 위해 이 과정 역시 모두 수작업으로 진행되며, 확인과 재확인을 거쳐 최종 결과가 선관위에 등록된다.

누구나 쉽게 인터넷에 접속할 수 있는 환경이 인도네시아에 정착된 지도 상당한 시간이 흘렀지만, 수작업에 의존한 개표 절차는 쉽게 변화될 수 없는 전통으로 확립되었다. 이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으로 개표 과정이 취급됨으로써 선거 관리원의 과로사나 지연된 개표 결과 발표와 같은 희생을 감수하고서라도 반드시 지켜져야 하는 관행으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선관위의 공식 발표가 예정되어 있음에도 프라보워 수비안토 후보의 대통령 선거 승리는 이미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선거 직후 십여 개의 여론조사기관에서 발표한 출구조사에서 프라보워가 압도적 지지를 받았으며, 현재까지 선관위의 공식 집계에서도 유사한 경향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프라보워 후보의 득표율은 약 58%로, 다른 두 후보의 득표율인 25%와 17%를 크게 상회했다.
  

절반을 넘어선 프라보워의 득표는 이번 대선 과정에서 나타난 가장 큰 이변이라 평가될 수 있다. 작년 10월까지 진행된 여론조사에서 그의 지지율은 다른 후보자와 비슷하거나 약간 앞서는 수준이었다. 선거 캠페인 동안 그의 지지율이 상승세를 타며 선거 직전 50%에 육박하는 여론조사 결과가 발표되기도 했지만, 그가 절반을 크게 넘는 지지를 얻어 1차 선거에서 승리하리라고는 쉽게 예상할 수 없었다.

짧은 기간 동안 전개된 급격한 지지율 상승에는 프라보워의 부통령 후보 선택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현직 조코위 대통령의 장남 기브란(Gibran)을 부통령에 지명함으로써, 프라보워는 80%의 지지율을 넘나드는 조코위의 인기를 등에 업고 선거 캠페인을 펼칠 수 있었다. 선거 중립을 유지해야 했던 조코위는 프라보워를 직접 지지하지는 않았지만, 선거 기간 중 다양한 방식으로 프라보워가 자신의 후계자임을 드러냈다.

프라보워의 승리는 기브란의 승리이기도 하다. 이런 이유로 이번 선거의 최대 수혜자가 조코위이며, 그의 정치적 영향력이 새로운 정권에서도 지속될 것이라는 예상이 제기되었다. 큰 무리가 없어 보이는 설명인 듯하지만, 그 실현 가능성을 균형적으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프라보워라는 인물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그를 단순히 조코위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정치인으로 속단할 수 없기 때문이다.

프라보워에 관해 말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키워드는 특전사와 수하르토이다. 그는 1998년까지 30년 이상 인도네시아를 지배한 독재자 수하르토의 사위였으며, 수하르토 정권 말기 특전사 사령관으로 활동했다. 수하르토 퇴진을 촉발한 민주화 운동 진압 과정에서 그는 민간인을 납치하여 살해한 인물로 지목되었고, 수하르토 퇴진 후 발생한 폭동과 극심한 사회적 혼란의 배후로도 알려져 있다.

수하르토 퇴진 후 불명예 제대한 프라보워는 동생의 도움을 받아 농업과 광산업을 중심으로 사업을 시작했고, 몇 년 만에 놀라운 부를 축적했다. 이를 바탕으로 그는 2004년 대선을 앞두고 정계에 입문했으며, 자신이 설립한 정당을 통해 2009년 부통령 후보에 선임되었다. 2014년과 2019년, 조코위와 일대일로 맞붙은 대선 2차 선거에서 프라보워는 40%가 넘는 득표율을 얻을 정도로 높은 대중적 지지를 끌어냈다. 이러한 경력을 고려하면 그는 인도네시아의 어느 정치인보다 오랫동안 대통령 자리를 꿈꾸고 준비해 온 인물이라 평가될 수 있다.

군 경력과 수하르토와의 연관성은 부정적 꼬리표로서 프라보워를 항상 쫓아다녔다. 하지만, 2009년 이후 네 차례의 대선 과정을 거치며 이런 이미지는 상당 부분 희석되었을 뿐 아니라 긍정적으로 전환되기까지 했다. 그의 경력이 민간인 출신 후보자들이 내세우지 못하는 강력한 지도자라는 이미지 구축에 일조했기 때문이다.

이번 대선 캠페인에서 프라보워는 자신의 강경한 이미지를 완화하려는 전략을 적극적으로 펼쳤다. 대규모 대중 유세 중 연단에 선 그는 거리낌 없이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었는데, ‘귀여운 춤’이라 불린 그의 비디오 클립은 소셜 미디어를 통해 확산하며 젊은 세대의 큰 관심을 끌어냈다. 대선 후보 토론회에서 그는 ‘옆집 아저씨’와 같은 친근함을 부각하고자 했다. 다른 후보자의 의견에 반박하기보다는 이를 수용하려는 태도를 과할 정도로 취했고, 자신의 경력에 대한 날 선 비판을 엉뚱한 대화로 회피하는 모습을 보였다.

프라보워의 캠페인 과정은 인도네시아의 전통 예술인 그림자극을 연상시킨다. 인도의 서사시를 기본 줄거리로 하는 그림자극에는 토착적 성격의 캐릭터가 등장한다. 다른 등장인물과 달리 기이한 외모를 지닌 이들은 우스꽝스럽고 때로 천박하기까지 한 언행으로 관객의 웃음을 자아내는 광대 역할을 하지만, 실상 이들은 강력한 힘을 가진 토착 신이다.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지 않고 희화화되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 프라보워의 캠페인 방식은 외유내강의 성품을 지닌 이상적 지도자로서의 면모를 드러냄으로써 대중적 지지를 얻는 데 기여했다.

이번 선거에서 조코위가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고, 그에 기반하여 프라보워가 승리했음을 부정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이를 근거로 앞으로 출범할 프라보워 정권을 단순히 조코위 정권의 연장선으로 바라보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무엇보다 대중적 영향력을 갖춘 정치인으로서 프라보워가 자신만의 독자적 세력을 견고하게 구축해 왔고, 오랫동안 자신만의 정책과 통치 방법을 준비해왔기 때문이다. 또한, 전례를 찾을 수 없는 압도적 지지로 당선되었다는 사실은 그가 앞으로 보여줄 독립적 행보를 뒷받침할 정치적 자산으로 작용할 것이다.

프라보워의 독자적 행보를 예상하게 하는 또 다른 요인은 아이러니하게도 조코위와 연관된다. 장남인 기브란이 부통령이 됨으로써 조코위는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을 이어갈 발판을 마련했지만, 이 과정에서 그는 자신이 소속한 정당을 배신하는 선택을 했다. 그가 등을 돌린 인도네시아 투쟁민주당은 이번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다수당의 위상을 유지한 반면 그는 자신을 중심으로 한 독자적 정치 세력을 형성하지 못했다. 이는 자연인으로 돌아간 조코위의 정치적 행보가 제한적일 수밖에 없음을 지적한다.

대통령 선거 결과는 유력 인사를 중심으로 한 정치 왕조가 인도네시아 사회에 미치는 중대한 영향을 재확인해 주었다. 그러나 인도네시아의 민주화 전망과 관련해서 더욱 중요한 사실은 프라보워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는 점이다. 그동안 많은 비판을 받아 왔지만, 인도네시아에서 절차적 수준의 민주주의가 유지될 수 있었던 요인 중 하나는 유력 정치 세력 간 연대와 타협이었으며, 이는 어떤 정치 세력도 압도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프라보워의 개인적·정치적 배경은 그가 기존의 정치적 균형을 무너뜨리고 권력을 독점할 잠재력을 가지고 있음을 시사한다. 이런 의미에서 앞으로 형성될 프라보워와 기존 정치 세력 간 역학 관계는 인도네시아 민주주의의 미래를 결정지을 핵심 요인이 될 것이다.


필자 주요 이력 
▷서울대 인류학과 (학사·석사 수료) ▷호주국립대학 (박사) ▷강원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전 강원대 사회과학원 원장 ▷전 한국동남아학회 회장 ▷ 인도네시아 팟자드자란 대학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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