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준의 indonesia 스토리] 히잡 쓴 배구선수 …한류, 지속가능성을 엿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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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준 강원대 문화인류학과교수
입력 2024-01-04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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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준
[김형준 강원대 문화인류학과교수]



몇 주 전, 인도네시아 지인이 소셜 미디어인 왓츠앱을 통해 메시지를 보내왔다. 친하게 지내는 친구이기에 기쁜 마음으로 메시지를 열자 흥미로운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 유튜브에서 지금 메가와티(Megawati)를 보고 있다는 것이다. 순간 인도네시아의 전 대통령으로 현재에도 막강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메가와티 수카르노푸트리(Soekarnoputri)가 떠올랐고, 그녀가 중요한 정치적 결정을 발표하고 있으리라 예상할 수 있었다. 유튜브 채널을 어디에서 볼 수 있는지를 묻는 다급한 질문에 그는 예상치 못한 사진과 함께 인터넷 주소를 보내주었다. 사진에는 배구 경기장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유튜브 채널에서는 배구 경기가 중계되고 있었고 그 배경은 한국이었다. 우리나라에서 열리는 경기를 친구가 언급한 것도, 메가와티를 거론한 것도 언뜻 이해할 수 없었지만, 영상을 계속 보자 히잡을 쓴 선수를 찾을 수 있었다. 한국 V리그에 등장한 인도네시아 선수는 쉽게 상상할 수 없는 낯선 모습이었다.

이날 메가와티 퍼르티위(Pertiwi) 선수가 소속한 정관장 레드스파크스 팀은 세트스코어 2:3으로 승리하지 못했다. 경기 실황을 전달해주던 인도네시아 친구는 자기 팀이 패배하자 눈물을 흘리는 아이콘을 보냈지만, 경기 중간중간의 메시지를 통해 그가 메가와티에 대해 커다란 자부심을 느끼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여기에는 선수로서 메가와티의 활약이 큰 몫을 했지만, 그녀가 활동하는 곳이 한국이라는 사실 역시 고려되어야 한다. 한국 여자 배구가 세계 정상을 다툴 정도로 높은 수준에 있지 않음에도, 메가와티에 열광하고 나아가 그녀의 활약에 자긍심을 느끼는 친구의 모습은 인도네시아에서 한국이 가진 긍정적 이미지를 투영하지 않고서는 쉽게 설명할 수 없다.

인도네시아 사회에서 우리나라의 이미지는 지난 20여 년 동안 급격히 변화했다. 과거 인도네시아 사람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고, 큰 관심을 끌지 못했던 국가에서 한국은 누구나 단편적이지만 이야깃거리를 가지고 있고 호감을 표명하는 국가로 전환했다. 이러한 변화의 중심에 한류가 놓여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처음으로 인도네시아에서 조사했던 1990년대 초중반, 한국인이라는 소개를 들은 대다수 현지인은 인삼을 언급했다. 우리나라가 인삼의 나라로 불릴 수 있었던 이유는 그것이 백여 년의 역사를 가졌기 때문이다. 20세기를 전후하여 한국인 보부상이 동남아 곳곳에서 인삼을 팔며 돌아다녔다는 기록을 찾을 수 있다. 이때부터 인삼의 나라라는 정체성은 동남아 여러 지역으로 퍼졌고, 인도네시아 농촌 주민에게까지 각인될 수 있었다.

백여 년이나 지속된 인삼의 나라 이미지는 ‘윈터 소나타’로 알려진 겨울연가가 2000년대 중반 현지 방송을 타며 변화의 흐름에 놓이게 되었다. 이 드라마가 젊은 층을 중심으로 인기를 끌었다면, 곧이어 방영된 대장금은 한국 드라마에 관한 관심을 중장년층으로 확장시킬 수 있었다. 당시 현지에서 만난 사람들이 ‘장금이’라는 말을 인사말처럼 건넬 정도로 그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인도네시아에서 한류의 흐름을 직접 경험했지만, 한류의 지속가능성에 대한 내 입장은 부정적이었다. 인도네시아를 연구하면서, 한국 드라마에 내재한 우리의 정서와 행동 양식이 인도네시아 문화와 친화력을 가지지 못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몇 년 뒤, 이 예상이 완전히 잘못된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2010년대에 접어들어 한국 드라마에 관한 관심은 영화, 음악, 게임을 가리지 않고 전방위적으로 확대되었고, 모든 연령층을 한류 소비자로 포섭할 수 있었다.

한류의 장점 중 하나는 그것이 한국적인 특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한류의 유행은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적인 것에 관한 관심과 호감으로 전환했다. 한국 라면과 화장품이 인기를 끈 후 인도네시아 사람의 관심은 한류 속 콘텐츠로 익숙해진 한국 음식으로 이어졌다. 대도시 쇼핑몰을 중심으로 한국 음식점이 우후죽순 세워졌고, 곧이어 거리의 일반 음식점에서도 우리 음식을 접할 수 있게 되었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한국 음식 확산은 소강상태에 접어드는 듯했지만, 그 열기를 억누르지는 못했다. 최근에는 대도시가 아닌 중소 도시로 한국 음식점 확산이 가속화되어서, 자바의 경우 인구 10만명의 소도시에서도 한국 음식을 쉽게 접할 수 있는 상황이 전개되었다.

한국에 관한 관심은 인도네시아 사람의 관광 욕구 역시 자극했다. 2019년 사상 최대인 27만명에 달했던 방한 인도네시아 관광객은 코로나 국면을 벗어난 올해 1~10월 사이 19만명으로 급속히 회복하는 추세를 보였다. 같은 기간 인도네시아를 방문한 한국 관광객이 28만명임을 고려해보면, 양국의 관광객 규모는 흥미로운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 이를 위해 몇몇 동남아 국가의 자료를 살펴보기로 한다.

올 1~10월 사이 태국 방문 한국 관광객은 130만명, 한국 방문 태국 관광객은 31만명이었고, 베트남 방문 한국 관광객은 290만명, 한국 방문 베트남 관광객은 35만명이었으며, 필리핀 방문 한국 관광객은 110만명, 한국 방문 필리핀 관광객은 35만명이었다. 이 자료와 비교해보면, 인도네시아 관광객과 한국 관광객 사이의 편차가 훨씬 작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관광 분야에서 한국과 인도네시아의 관계가 상당히 호혜적인 성격을 띠고 있음을 시사한다. 이러한 호혜적 관광 활동은 여행지로서의 한국에 대한 인도네시아 사람의 높은 선호도에 기인했다. 2022년 인도네시아 통계청 자료를 보면, 전체 해외 방문자 중 한국 방문자 수는 상위권에 속했고, 인도네시아 사람의 전통적 선호 관광지인 일본을 뛰어넘는 모습을 보이기까지 했다. 이 자료는 한류의 힘이 어디까지 확장될 수 있는가를 여실히 보여준다.

한류 콘텐츠의 선정성을 문제 삼아 보수적 이슬람 집단이 때로 반한류 정서를 드러내기도 했지만, 인도네시아 사회 일반에서 한류에 대한 부정적 시각은 표출되지 않았다. 내가 만난 공무원, 정치인, 학자에게서도 같은 태도가 나타났지만, 이들과의 대화 중 나를 곤혹스럽게 하는 질문이 있었다. 이들은 한류 확산에 비견되는 상황이 한국에서 전개되고 있는지 궁금해했다. 달리 말해 ‘인도네시아류’가 한국 사회에 존재하거나 앞으로 나타날 가능성이 있는지를 알고 싶어 했다.

인도네시아 문화 중 세계적으로 관심받는 대상을 찾기는 어렵지 않다. 독특한 제조 방식, 다양한 색채와 문양으로 유명한 바틱(batik), 셀 수 없는 열대의 향신료가 가미된 음식 른당(rendang), 인도·아랍풍과 말레이풍이 조화롭게 혼합된 대중음악 당둣(dangdut), 공연 예술의 진수를 보여주는 그림자극 와양(wayang) 등은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런 문화 요소 중 어느 것도 우리에게 친숙하지는 않다. 한국의 대형마트에서 인도네시아산 라면인 미고랭(mie goreng)을 찾을 수 있지만, 그것이 우리 입맛을 사로잡는 대중 음식으로 자리 잡을 것 같지는 않다. 이러한 상황으로 인해 한국 내 ‘인도네시아류’ 가능성에 관한 질문에 나는 얼버무리듯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두 국가 간 문화 교류가 일방향적으로 전개되었고, 앞으로도 그 추이가 크게 변하지 않으리라 예상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인도네시아 배구선수 메가와티의 한국 리그 참여는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준다. 그녀의 활약상은 인도네시아 미디어의 주목을 받아서, 소속팀 경기 결과는 신문과 방송의 주요 기사로 보도되었다. 소셜 미디어에는 그녀를 응원하는 수많은 채널과 계정이 만들어졌고, 많은 현지인이 경기를 시청하고 있다. 현지 보도에서 강조되는 측면 중 하나는 그녀가 온몸을 가리는 복장과 히잡을 고수한다는 점이다. 이는 비이슬람권 지역인 한국에서 자신의 종교 정체성을 유지하려는 당당한 무슬림으로서의 모습을 부각함으로써, 절대 다수가 무슬림인 인도네시아 사람에게 자긍심을 가져다줄 수 있었다.

인도네시아 미디어에서 주목하는 또 다른 측면은 그녀의 활약이 한국에서도 높이 평가받고 있다는 점이다. 일정 정도의 과장이 포함되었지만, 미디어 보도에서는 메가와티의 활약상에 대해 한국의 배구 팬 역시 열광하고 있으며, 이들이 그녀의 종교적, 종족적 차이를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을 부각한다. 이런 의미에서 메가와티는 한국에서의 ‘인도네시아류’ 가능성을 보여주는 상징으로 그려지고 있다.

메가와티가 한국에서 활동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한국배구연맹이 올해 처음 도입한 ‘아시아 쿼터제’이다. 여자 배구만을 놓고 본다면, 이 제도를 통해 태국, 인도네시아, 일본, 필리핀 국적 선수가 활동할 수 있게 되었다. 이들 모두가 눈에 띄는 활약을 펼친 것은 아니지만, 메가와티 사례처럼 이들의 한국 리그 참여가 가진 긍정적 영향은 명확하다. 이들의 한국 활동은 이들이 속한 국가 국민에게 자긍심을 가져다줄 수 있으며, 이는 한류가 가진 문제점인 일방향성을 완화할 잠재력을 내포한다. 이런 측면에서, 한국 스포츠계의 아시아 쿼터제 도입은 한류에 대해 고민해온 정부나 학계에서 고려하지 못했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아시아권 선수의 한국 활동이 한류의 일방향성을 완화함으로써, 그 지속가능성을 높이는 데 일조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필자 주요 이력 
▷서울대 인류학과 (학사·석사 수료) ▷호주국립대학 (박사) ▷강원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전 강원대 사회과학원 원장 ▷전 한국동남아학회 회장 ▷ 인도네시아 팟자드자란 대학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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