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준의 Indonesia 스토리] '항공기 생산국' 인도네시아의 딜레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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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준 강원대 문화인류학과교수
입력 2023-09-13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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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준 교수
[김형준 강원대 문화인류학과교수]


인도네시아 도심의 거리는 자동차와 오토바이로 가득 차 있다. 교통 체증 속에서 조금이라도 빨리 움직이려는 차량이 뒤엉켜 연출하는 혼돈의 모습은 인도네시아의 일상으로 자리 잡았다. 관련 통계를 보면, 교통지옥의 이유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1100만 인구의 자카르타를 예로 들면, 2022년 등록 자동차 수가 360만대, 등록 오토바이가 1700만대 정도였다. 자동차만 놓고 볼 때 320만대가 등록된 서울과 큰 차이가 없지만, 여기에 다섯 배나 많은 오토바이를 추가하면, 주민 수의 두 배에 육박하는 차량이 거리를 활보하고 있는 셈이라 할 수 있다.
오토바이는 인도네시아인이 선호하는 교통수단이다. 승용차보다 가격과 운행비가 저렴하고 교통 체증에서도 재빠르게 이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도네시아 인구의 절반에 해당하는 1억3000만대의 오토바이가 등록된 최근 상황은 그리 오래된 모습이 아니다. 소득 증가에 비례하여 오토바이 역시 증가했기에 20여 년 전에는 인구의 10분의 1에 해당하는 2000만대 정도만이 등록되었을 뿐이다.
시간을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 오토바이가 부의 과시 수단이던 1990년대, 도로를 보며 떠올린 궁금증은 오토바이의 절대다수가 일본 제품이라는 점이었다. 혼다, 스즈키, 야마하 오토바이로 가득 채워진 도로의 모습에서 무언가 석연치 않음을 느꼈다. 수입대체 산업화라는 경제발전 모델에 익숙한 내게 있어 오토바이 국산화가 진행되지 않았음은 인도네시아 경제의 한계를 드러내는 듯했다.
국산 오토바이가 부재한 상황에 관해 현지인들은 명확한 이유를 제시하지 않았다. 일본산 오토바이의 품질이 뛰어나기에 국산 오토바이를 고집하기보다는 수입하는 편이 낫다는 식의 설명을 가장 많이 들었다. 여기에서는 선진국과의 기술력 차이를 쿨하게 인정하는 듯한 현실 안주적 태도를 읽을 수 있었다. 이에 국산 오토바이의 부재가 기술적 후진성이나 종속성과 연결되지 않느냐는 조금은 도발적인 질문을 던졌을 때, 전혀 예상하지 못한 답변을 듣게 되었다. 인도네시아에서 항공기를 자체 제작한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이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우리도 제대로 만들지 못하는 비행기를 인도네시아에서 자체 제작한다고? 자전거에서 시작하여 오토바이, 자동차 순으로 차근차근 축적한 기술력에 기반하여 항공기 생산에 도전하는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하고 있던 내게 현지인의 주장은 어불성설에 가까웠다.
이들의 답변은 터무니없었지만, 이들이 제시한 근거는 상당히 설득력 있었다. 유학 후 독일에서 일하던 천재 엔지니어인 하비비(Habibie)를 당시 대통령 수하르토가 귀국시켰고,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그가 항공기를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관련 정보를 조금 찾아보자 이들의 말이 거짓이 아님이 드러났다. 또한, 1995년 N250으로 명명된 비행기가 시험운항에 성공함으로써 인도네시아는 항공기 생산국 반열에 올랐다. 이런 이유로 항공기 제작은 인도네시아인에게 있어 국가적 자긍심의 원천이었고, 오토바이를 만들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만들지 않는 것이라는 주장을 뒷받침할 근거를 제공했다.
야심 차게 시작한 인도네시아의 항공 산업은 1997년 경제위기라는 복병을 만났다. IMF의 요구에 맞추어, 항공 사업을 전담하던 국영기업은 예산 낭비의 전형이라는 불명예를 받으며 해체되었고, 관련 전문인력은 뿔뿔이 흩어졌다. 하지만, 이런 절망적 상황이 항공 산업에 대한 의지를 꺾지는 못했다. 2000년대 초 경제 상황이 조금 호전되자 정부는 해체된 기업을 ‘인도네시아 항공회사’(Dirgantara Indonesia)로 재편하여 출범시킴으로써, 항공 산업에 대한 의지를 재천명했다.
인도네시아 항공회사 홈페이지를 방문하면, 우리에게 익숙지 않은 모습을 접하게 된다. 수송기와 여객기 등 다목적으로 활용되는 쌍발 프로펠러 비행기 4종의 사진이 첫 화면을 장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제품 섹션에는 4종의 헬리콥터가 추가로 소개되어 있다. 일반적인 상품 카탈로그와 달리 그 가격이 제시되어 있지 않지만, 언론 보도를 통해 주력 판매 기종인 N219의 가격이 미화 6~800만 달러, 이보다 사양이 좋은 CN-235가 2500만 달러 정도임을 확인할 수 있다.
국가적 자긍심의 원천으로서 현지 언론은 인도네시아 항공 산업에 많은 관심을 드러냈고, 특히 그 수출 현황을 자주 기사화했다. 보도에 따르면, 2022년을 기준으로 286대의 CN-235가 인도네시아뿐 아니라 베네수엘라, 세네갈, 아랍에미리트, 파키스탄, 터키, 네팔, 말레이시아, 태국, 브루나이 그리고 한국에서 운용되고 있었다. 인도네시아 항공회사 홈페이지에서 한국은 단순한 항공기 수입국 정도가 아니라 CN235 기종을 세계에서 가장 많이 도입한 나라로 소개되어 있다.
자국 항공기에 대한 자부심을 언론 보도에서 찾을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도네시아 항공 산업의 전망이 그리 밝은 것은 아니다. 자료를 보면, 설립 후 2020년까지 축적된 손실 규모가 약 18조 루피아(1조5000억여 원)에 이르렀고, 설립 후 단 한 차례 1000만 달러 정도의 이익을 냈을 뿐이다. 막대한 적자는 최근 항공회사 사장의 갑작스러운 해임의 원인이 된 듯하다. 뇌물과 같은 뚜렷한 근거 없이 공기업 사장을 해임하는 일이 극히 이례적임을 고려해보면, 인도네시아 항공 산업에 대한 정부의 부정적 시각이 여기에 투영된 것처럼 보인다.
한 일간지 기사는 인도네시아 항공 산업을 ‘살리기에도 내키지 않고, 죽는 것도 원하지 않는’이라는 현지 속담에 빗대어 설명했다. 계속된 적자에 시달리고, 급속한 경쟁력 제고가 불가능하며, 내수 판매 증가를 위해 필요한 소형 기종이 부재하다는 점이 문제로 지적되었으며, 항공 산업에 대한 정부 지원이 축소되고 정책 지향점이 드론 개발로 전환되고 있다는 설명이 부가되었다. 반면, 항공기 제작 역량을 오랫동안 축적해왔고, 항공 산업이 기술 혁신의 파급력이 큰 전략 산업이며, 소형 항공기에 대한 국내 수요가 꾸준히 확대되고 있다는 점은 이를 쉽게 포기할 수 없게 만드는 요인으로 거론되었다. 여기에 국가적 자긍심과 항공 산업의 긴밀한 관련성을 추가하면, 순수한 경제적 관점만으로 항공 산업을 바라볼 수 없는 인도네시아의 상황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인도네시아가 항공기 생산국이라는 사실을 거의 인지하지 못하는 우리에게도 한국형 전투기(KF-X) 사업에 인도네시아가 긴밀히 연관되어 있음은 잘 알려져 있다. 언론 보도를 정리하면, 인도네시아는 전체 개발비의 20%인 1조7000억원을 투자하고 우리의 기술을 이전받아 현지에서 전투기를 생산하기로 2016년 계약을 체결했다. 하지만, 인도네시아는 이후 자신의 책무를 충족하지 못했다. 2019년까지 약 2000억원을 지급한 후 납부를 멈췄고, 작년과 올해 500억원 정도만을 지불하는 생색을 냈을 뿐이다.
항공기 공동 생산이 국가 간 협약에 기초하기에, 분담금 미납은 국제관례에 어긋날 뿐 아니라 상도의에도 맞지 않는 것으로 비쳤다. 이에 인도네시아에 대한 비판적 태도가 비등해졌고, 인도네시아를 배제한 채 우리의 예산만으로 전투기 사업을 완결짓자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분담금 유예의 배경은 명확하지 않다. 팬데믹으로 인한 예산상의 어려움이 표면적 이유였지만, 인도네시아의 경제회복은 우리보다 훨씬 빠르게 진행되었다. 게다가, 간간이 들려오는 소식에 따르면, 분담금 유예 상황에서도 인도네시아는 미국과 프랑스 전투기 구매를 위한 양해 각서를 체결하기까지 했다. 무언가 일이 부드럽게 진행되고 있지 않음은 확실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도네시아 정부가 우리와의 계약을 파기하려는 것 같지는 않다. 2021년 개최된 KF-21 보라매 출고식에 인도네시아 대통령이 영상 축사를 전달했고, 한국을 방문한 인도네시아 국방부 장관이 조속한 문제 해결을 약속했음은 계약 파기를 의도한다고 판단하기 어렵게 한다.
인도네시아 정부의 행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자국 항공 산업에 대한 ‘살리기에도 내키지 않고, 죽는 것도 원하지 않는’ 상황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발을 빼기를 원치 않는 모습이 우리와의 협약을 바라보는 주도적 태도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갈지자 행보는 우리에게 있어 당혹스러운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를 단순화시켜 이해할 필요는 없다. 또한, 이 문제를 바라볼 때 잊지 않아야 할 측면은 정해진 계약이라도 상황변화에 따라 재협상이 가능하다는 인도네시아식 행동 양식이 외교에도 적용된다는 점이다.
지속적 협의를 중시하는 인도네시아의 전략을 염두에 둘 때, 우리가 먼저 나서서 명확한 행보를 취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한국형 전투기 개발 일정이 구체화할수록 더욱더 애가 타는 측은 인도네시아이기 때문이다. 항공 산업 발전에 대한 관심이 깊고, 항공 산업이 국가적 자긍심으로 자리 잡은 인도네시아에서 전투기 제작은 쉽게 포기할 수 없는 매력적인 사업일 수밖에 없다.
한국항공우주산업(KAI) 홈페이지를 보면, 우리 항공 산업에서 인도네시아가 차지하는 중요한 위상을 확인할 수 있다. 우리가 처음 개발한 국산 훈련기 KT1, 그리고 초음속 고등훈련기 T50의 첫 수출 대상국이 인도네시아였기 때문이다. 우리 항공 산업의 역사와 발을 맞추어 왔다는 사실에 더해 인도네시아가 커다란 시장 잠재력을 가진 곳이라는 사실 역시 간과할 수 없다. 따라서, 지금 우리에게 요구되는 최선의 대응책은 여유를 가지고 다양한 경로를 통해 인도네시아의 참여를 독려하는 방식일 것이다.


필자 주요 이력 
▷서울대 인류학과 (학사·석사 수료) ▷호주국립대학 (박사) ▷강원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전 강원대 사회과학원 원장 ▷전 한국동남아학회 회장 ▷ 인도네시아 팟자드자란 대학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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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개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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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도네시아 태도를 좀 명확히 해야지 맨날 모호하게 입장을 취하는게 답답해요. 그런데 그게 인도네시아 스타일인가…양국 무역 및 금융 거래 뿐 아니라 항공기 사업까지 …내수 항공기 수요도 많고…
    인도네시아는 알면 알수록 혼란스러운 전진을 하는 듯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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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익한 정보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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