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 만에 무죄로 뒤집힌 '사찰 노예' 사건…상고이유서 살펴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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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소희 기자
입력 2024-01-22 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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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울력' 대가 미지급 혐의로 기소…1·2심 유죄 판단

  • 주지 스님, 사진 연출 정황·치료비 내역 증거 제출

  • 대법 "차별 인정할 증거 없어…금전적 착취 의문"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 설치돼 있는 정의의 여신상 모습 전통 한복 차림에 앉은 자세로 눈은 가리지 않은 채 오른손에는 칼이 아닌 법전을 들고 있는게 특징이다 20231211사진유대길 기자 dbeorlf123ajunewscom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 설치돼 있는 '정의의 여신상' 모습. 전통 한복 차림에 앉은 자세로 눈은 가리지 않은 채 오른손에는 칼이 아닌 법전을 들고 있는게 특징이다. 2023.12.11[사진=유대길 기자 dbeorlf123@ajunews.com]

사찰에서 지적장애인을 스님이라는 허울 아래 30여년 동안 부려먹는 등 노동력을 착취하고, 폭행을 일삼았다는 이른바 '사찰 노예' 사건으로 기소된 주지 스님이 의혹이 제기된 지 5년여 만에 대법원에서 무죄 판단을 받았다.
 
30여년 전 서울 노원구 학림사에 맡겨진 지적장애 3급인 A씨에 대해 이곳의 주지스님 B씨가 불교 수행인 '울력'(여러 사람이 힘을 합해 일함)이라면서 마당 쓸기, 공사, 청소 등을 시켰는데, 제대로 된 급여도, 스님 대접도 없었다는 것이 사건의 주요 내용이다. 

22일 법조계에 따르면 B씨는 장애인차별금지 및 권리구제 등에 관한 법률(장애인차별금지법) 위반으로 기소돼 1심과 2심에서 유죄를 선고받았다.
 
그러나 대법원 2부(주심 천대엽 대법관)는 지난 4일 B씨에 대해 원심이 유죄를 판단한 부분을 모두 깨고, 사건을 다시 심리하라며 서울북부지법으로 돌려보냈다. 

대법원은 "(학림사에 거주했던) 비장애인과 비교해 피해자를 차별적으로 대했다는 점을 인정할 아무런 증거가 없다"며 "'금전적 착취'가 존재하는지에 관해서도 상당한 의문이 든다"고 판시했다.
 
상고심에서 판단이 뒤집힌 데는 B씨 측이 새로 제출한 증거가 주효했다. B씨가 A씨를 30여년간 맡으면서 전담했던 의식주, 의료비, 보험비 등 내역과 A씨가 '노전스님'(법당을 맡은 스님)으로서 학림사의 구성원으로 활동했던 자료들이다.
 
'스님'으로 각종 행사 참여…"오히려 장애인차별금지법 취지 부합"
 
A씨는 1985년 학림사에 맡겨진 이후 2000년경부터 노전스님이 됐다. B씨와 학림사 큰 스님은 A씨에게 법명을 부여하고, 예불 방법과 천수경을 가르쳐 실제 제사와 예불을 주도하도록 했다. 다만 조계종 승려법에 따라 지적장애가 있는 A씨는 정식 승려로 등록되지는 못했다.
  
이와 관련해 2005년 5월 제등 행사부터 2015년 3월 강원 강릉시 강동면 방생 행사까지 A씨가 승복을 입고 다른 스님, 신도들과 나란히 찍은 사진이 다수 증거로 제출됐다. 

B씨의 상고이유서에서는 "피해자는 학림사의 구성원인 스님의 자격으로 승복을 입고 신도들의 존중을 받으며 학림사의 행사에 참여해 왔다"고 적혀 있다. 이에 대해 B씨의 법률 대리인 오영신 법무법인 여의 변호사는 "신도들이 다 흩어진 상황에서 일일이 연락해 찾느라 6개월이 걸렸다"면서 이들 증거를 찾는 과정이 쉽지 않았다고 토로했다. 
 
A씨가 텃밭에서 농사일을 하는 모습으로 보도된 KBS 방송 사진 사진B씨 측 상고이유서
A씨가 텃밭에서 농사일을 하는 모습으로 보도된 KBS 방송 사진 [사진=B씨 측 상고이유서]
B씨 측이 고발인이 제출한 사진에 따르면 피해자에게 농사일로 중노동을 시킨 것처럼 보이지만 매우 작은 텃밭에 불과하다며 제출한 사진 사진B씨 측 상고이유서
B씨 측이 "고발인이 제출한 사진에 따르면 피해자에게 농사일로 중노동을 시킨 것처럼 보이지만 매우 작은 텃밭에 불과하다"며 제출한 사진. [사진=B씨 측 상고이유서]
 
마당 쓸기, 낙엽 쓸기, 눈 치우기, 도로 보수하기, 텃밭 농사일 등 '울력'에 대한 상세한 설명도 포함됐다. 특히 A씨가 노동 착취를 당했다고 언론에 보도된 농사일과 지게일 사진이 연출됐다는 주장도 담겼다. 

상고이유서는 "지게로 땔감을 이동하는 피해자 사진들 모습은 결코 있을 수 없다"며 "군사 지역과 녹지 관리 지역인 서울시 소재의 산에서 나무 땔감을 만드는 것은 명백한 불법"이라고 지적했다. 텃밭 관련 일 역시 주방 담당인 조리사나 여신도 위주로 관리했다고 부연했다.

대법원은 "사찰 내 종교적 사역에 비장애인 스님과 같은 지위에서 참여하도록 한 피고인의 조치가 '장애인의 완전한 사회 참여와 평등권 실현'이라고 하는 장애인차별금지법의 취지에 오히려 부합하는 정황으로 볼 여지가 있다"고 판단했다.
 
"피고인 부담 의식주·의료비·여행비, 미지급 급여액 훨씬 초과"
 
이같은 연출된 사진과 고발은 사찰 운영에 대한 전 사무장의 불만으로 이뤄졌다는 게 오 변호사의 분석이다. 상고이유서에는 "결국에는 피고인을 학림사에서 쫓아내기 위해 전 사무장이 사찰 노예 사건을 만들어낸 것이 이 사건의 경위"라고 명시했다. 대법원은 결국 이 상고를 받아들였다. 
 
오 변호사가 상고심에서 새로 제출한 30여년 동안의 치료비 자료는 피해자인 A씨의 친동생 C씨를 통해 제공받은 것이다. C씨는 2022년 10월 현 사무장에게서 치료비 내역을 전달받는 과정에서 '형이 전 사무장이 시키는 대로 사진 내용을 연출했다는 것을 들었다'고 언급한 것으로 확인됐다. 그는 "이 사건이 벌어지지 않았다면 형은 그냥 집에만 있지 않고 학림사에서 스님으로 있을 것"이라고도 말했다.

그렇게 한 병원에서만 건네받은 A씨 진료 기록은 무려 661쪽에 달했다. 최근 10년 기간만 발급되는 보험공단 요양급여 내역서도 함께 제출했다.

대법원은 "공소사실에 기재된 미지급 급여액이 합계 약 1억3000만원인 반면, 피고인이 피해자를 위해 30여년 동안 부담한 의식주, 의료비, 보험료, 여행비, 성지순례비는 물론 피해자 명의로 매수한 부동산 가액까지 더하면 미지급 급여액을 훨씬 초과한다고 볼 여지가 크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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