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혼의 재발견-나주 정신] (8)항일 의병장 김태원 "앉아서 죽을 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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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현 조선대 미래연합대교수
입력 2023-11-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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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생 김율과 함께 최후까지 일본군에 맞서 싸워

  • '호남 제일의 의로운 가문' 나주 광주 함평에 유적

 
죽봉 김태원
죽봉 김태원

1187m 무등산(無等山) 정상에서 서쪽을 내려다보면 어등산(魚登山, 338m)이 야트막하다. 물고기가 산에 오른다는 뜻이다. 곁에 황룡강(黃龍江)이 흐르고 있다. 어등산은 품이 넓어 계곡이 아흔아홉 개나 된다고 한다. 죽봉 김태원(1870~1908)은 ‘어등산 호랑이’였다. 그에게 붙잡힌 왜장 요시다(吉田)는 “내가 군대를 이끌고 12개국을 두루 다니며 백전백승(百戰百勝)했는데 여기서 죽게 되는구나.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한 것”이라며 고개를 떨궜다. 김태원 의병단이 출전하고 이룬 첫 승리였다. 우리 의병들이 행군하다가 왜군을 만나면 “김태원 의병이다” 하고 외쳤다. 그러면 이들은 길을 돌아가거나 꽁무니를 뺐다. 신출귀몰할 정도로 전략과 전술이 능했기 때문이다.
 
어등산 박산동에서 최후 맞아
 
어등산 서쪽 골짜기에 박산(博山)마을이 있는데 ‘박산 의병마을’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이곳에서 많은 의병들이 일어났다. 박산마을 충효열의(忠孝烈義)는 한말 호남 의병 정신으로 이어진다. 일본군은 그동안 늘 당하기만 하다가 1908년 4월 의병장 김태원·김율 형제 부대를 토벌하려고 수비대 8개 부대를 편성해 15일간 작전에 돌입한다. 김태원과 함께 의병 활동을 한 아우 김율(1881~1908)은 소지방(지금 광주 송정동)에서 붙잡혀 광주 감옥에 갇혔다. 김태원은 동생을 구출할 계획을 세웠으나 허리 통증이 심해져 광주 박산마을 뒤 어등산으로 피신했다. 여기서 최후를 맞는다. 일본 측 기록인 ‘제2순사대에 관한 편책’(국사편찬위원회 소장)에는 김태원에 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박산동은 광주군 어등산록에 있는 한 마을로 앞에는 황룡강이 흘러서 적의 근거지로 자못 중요한 지점이었다. 수색대는 사면을 포위하며 맹렬한 사격을 했는데 오후 7시까지 적진이 전부 무너져 흩어졌다. 사창 지역 제3수색대가 있던 바위굴에서 비교적 미복을 입은 폭도 1명이 도주하자 곧바로 사격을 해 죽였다. 이번 전투로 김태원 이하 중요한 부장 등 23명이 죽었다.”

왜군에 포위된 김태원은 “나의 죽음은 의병을 일으킨 날 이미 결정됐다. 다만 적을 멸하지 못하고, 장차 왜놈의 칼날에 죽게 되었으니 그것이 한이다”라고 말했다. 부하들에게는 모두 피신하고 나중에 다시 거사할 것을 당부했지만 김해도(金海道) 등 의병 23명은 피신하지 않고 일본군에 대항했다. 순결한 피를 흘리며 모두 쓰러졌다. 1908년 4월 25일이었다.
광주 감옥에 있던 김율은 일본군에게 끌려가 형 김태원의 시신을 확인하고는 통곡했다. 일제는 잔악하게도 그 자리에서 김율을 총살했다. 형이 죽은 다음 날이었다. 김태원의 시신은 수습됐지만 김율의 시신은 찾지 못했다.

두 달 전 김태원은 아우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써서 격려했다.

“국가의 안위가 경각에 달렸거늘 의기남아가 어찌 앉아서 죽기를 기다리겠는가. 온 힘을 다해 충성하는 것이 의(義)에 마땅하다. 또한 백성을 구하는 뜻이다. 명예를 위한 것은 아니라네. 전쟁은 죽으려는 것, 기꺼이 웃음을 머금고 지하에 가는 것이 옳으리라. 무신년 2월 19일 형 준이 쓰다.”
 
광주 서구 농성동에 세워진 죽봉 김태원 동상
광주 서구 농성동 죽봉 김태원 동상

한말 의병사 선봉에 선 호남 의병
 
우리 민족의 최대 위기,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전반은 일제가 우리나라를 극렬하게 공격한 시기였다. 이때 일제의 침략을 결코 좌시하지 않겠다고 나선 사람들이 의병이었다. 이들은 강고한 민족 성전(聖戰)의 선봉에서 독립운동사를 견인했다. 청일전쟁 이후 경술국치까지 세 차례에 걸친 한말 의병사의 선봉에는 바로 호남 의병들이 있었다.
특히 1907~1908년 후기 의병(정미의병) 단계에서 호남은 의병의 땅이었다. 일제가 자행한 ‘남한폭도대토벌’(1909년 9월 1일~10월 25일.)에서 ‘남한’은 ‘호남’이었고 이때 호남은 죽음과 피의 땅이었다. 의병장 103명과 의병 4138명이 체포되거나 전사했다.
일제는 1906년부터 1909년까지 전남 의병 토벌 기록을 남겼다. ‘전남폭도사’에는 1기(1906년 1월~1907년 12월)에 최익현·고광순·기삼연을, 2기(1908년)에 김태원·김율 형제를, 3기(1909년)에는 전해산·심남일·안규홍 등을 대표적인 폭도나 거괴(巨魁)로 기록돼 있다. 김태원과 김율은 호남창의회맹소 의병장 기삼연이 순국한 뒤 항일 투쟁을 벌였다.
 
의기 남아가 죽기를 기다리겠는가
 
김태원의 본명은 준(準), 호는 죽봉(竹峰)이다. 김율은 청봉(靑峯)이라는 호를 썼다. 전남 나주 문평면 갈마리(渴馬里)에서 김노학의 큰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기상이 원대하고 지략이 훌륭했다. 벼슬은 순릉참봉에 그쳤지만 국운이 기울자 나라를 구하는 일에 목숨을 바치기로 결심했다. 동학에 참여했다가 1895년 을미사변 이후 경기도 의병에 참가했다. 1896년 고종이 아관파천(俄館播遷)하면서 의병들이 싸울 명분을 잃게 돼 해산되자 낙향했다. 아관파천은 고종 황제와 세자가 1896년 2월 11일부터 이듬해 2월 25일까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한 사건이다.
1907년 을사늑약으로 국권을 빼앗기자 1907년 10월 기삼연이 조직한 호남창의회맹소 선봉장을 맡아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동생 김율도 의병에 투신했다. 호남창의회맹소 의병들은 진안, 임실, 순창, 장성, 고창, 남평, 나주, 함평에서 싸웠다. 고창 문수사에서 적을 무찌르고 영광 법성포에서는 왜군의 소굴을 헤집었다. 김태원 의병대는 호남창의회맹소의 진에서 독립해 움직였고, 김율의 의병진도 따로 활동하도록 했다. 정예의 의병진 20~30명으로 게릴라전을 펼치는 전략이었다.
1908년 설날(2월 2일) 담양 무동촌 전투에서 ‘의병 잡는 귀신’으로 불리던 요시다(吉田勝三郞)의 광주수비대를 격파했다. 돌담 좌우에 의병들을 매복시켰다가 일시에 총을 쏘아 요시다를 쓰러뜨리고 목을 벴다. 적들이 두려워 퇴각했다.
1908년 1월 담양 금성산성에서 기삼연의 의병들이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크게 패했다. 김태원은 의병장 기삼연이 붙잡혔다는 소식을 듣고 병사 30명을 이끌고 광주 경양역까지 추격했지만 허사였다. 광주로 기삼연을 호송한 일본군은 광주천 백사장에서 총살해 의병진의 사기를 꺾으려고 했다.
김태원·김율 의병진은 ‘호남의소’로 이름으로 바꿔 꺾이지 않는 반일 투쟁을 벌였다. 일본군뿐만 아니라 친일파, 밀정, 자위단원들을 처단했다. 납세 거부 투쟁을 벌였다. 민폐를 끼치지 않아 주민들에게 지지를 받았다.
 
사람들은 김태원 의병부대를 ‘참봉진’, 김율 의병부대를 ‘박사진’으로 불렀다. 김율은 성재 기삼연의 문인이었다. 형제 의병진은 연합 전선을 펼치면서 장성 토천 전투에서도 왜군 30여 명을 살상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광주 어등산 한말의병전적지 표지석
광주 어등산 한말의병전적지 표지석
 
김태원 체포에 혈안이 된 일본
 
주로 전남 서남부에서 벌어진 40여 차례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자 일제는 제2특설순사대를 편성해 ‘김태원 체포 군사작전’을 세 차례나 감행했다. 1908년 4월 25일 광주 어등산에서 김태원이 순국했을 때 나이는 38세, 김율은 27세였다. 형제 의병장 뒤를 이어 조경환·전해산·심남일·오성술 등 의병장이 등장해 호남 의병 항쟁을 계승했다.

김태원에게는 부인 낙안 오씨와 어린 아들 김경천, 딸 김채봉이 있었다. 김태원 의병장을 죽인 일본 헌병들이 집에 들이닥치자 오씨는 달궈진 인두로 얼굴과 가슴을 지졌다. 욕을 당할 수 없다는 결기였다. 일본 헌병들은 주재소에 가족들을 데려와 고문했다. 일곱 살 된 어린 아들에게도 전기고문을 가했다.
오씨는 어린 남매를 키운 후 나라가 망했으니 살아 있을 이유가 없다며 1919년 3월 자결했다. 김태원 딸 채봉은 김남순으로 이름을 바꿔 시집갔고 신분이 드러나면 일가친척들이 욕을 당할까 봐 평생 숨기고 살다가 임종 때 그 사실을 알렸다.
김경천의 아들 김갑제는 5·18민주화운동에 헌신하다 언론인으로 활약했다. 광복회 광주전남지부장과 국가보훈위원을 지냈다. 한말호남의병기념사업회를 통해 선조들의 의로운 정신을 현창(顯彰)하고 있다.
후대 역사학자들은 김태원·김율 일가를 호남 제일의 의로운 가문(湖南第一義家)이라 평가했다. 정부는 이들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어등산은 두 형제 외에도 오성술, 이기손, 전해산, 조경환, 김원국‧김원범 형제들이 의병 활동을 벌이던 곳이다. 호남사람들은 이곳을 호남 한말 의병의 성지로 만들어야 한다며 뜻을 모으고 있다.
김태원·김율 형제 의병장의 기억 공간은 많다. 출생지인 나주 문평에는 생가터가 있다. 나주 남산에는 ‘죽봉 김태원 장군 기적비’와 김태원 시를 새긴 시비가 건립됐다. 그리고 광주 농성광장에는 김태원 동상이 서 있다. 동상 앞길 이름은 ‘죽봉로’다. 함평공원에는 오세창의 글을 새긴 ‘김태원 죽봉의사 충혼비’가 세워졌다. 지난해 김태원 의병장 순국 114주년을 맞아 세운 것이다. 광주 광산구는 2009년 조례를 제정해 10월 25일을 ‘어등산 의병의 날’로 정하고 해마다 기념식을 열고 있다. 10월 25일은 남한폭도대토벌 작전이 끝난 날이다.

 
황룡강과 어등산 모습
황룡강과 어등산

 
문병란 시인은 한말 의병에게 ‘불멸의 사랑’이란 시를 바쳤다.
 
‘목숨보다 소중한 내 조국 내 고향
그 향기론 흙 속에 묻혀
날로 고와가는 그 붉은 마음
여기 영원히 썩지 않는 사랑이 있다.’
 
임진난 의병, 한말 의병, 광주민주화운동으로 이어지는 불멸의 의향 정신은 황룡강물처럼 도도하고 어등산처럼 푸르다.
 
*참고서적 : 대한제국기 호남의병 연구(홍영기, 2005), 신 남도의병사(한국학호남진흥원, 2021), 광산 지역의 의병활동과 어등산(광산문화원, 2010)
[백승현 조선대 미래융합대 교수. 박승호 전남취재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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