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학노 칼럼] 공공 연구개발도 글로벌 경쟁 …'A학점' 받으려면

기자정보, 기사등록일
이학노 동국대 국제통상학 교수
입력 2023-07-25 14:24
    도구모음
  • 글자크기 설정
이학노 동국대 국제통상학 교수
[이학노 동국대 국제통상학 교수]

 

국제무역의 자유화를 위해 노력하는 WTO(세계무역기구)는 최근 지향점을 잃은 모습이다. 그나마 작동하던 통상 분쟁 해결(Trade Dispute Settlement)마저 멈춰 섰다. 2심 체제(패널-상소심)의 분쟁해결기구가 2020년 11월 이후 상소위원 7자리 모두가 공석이 됨으로써 상소심이 작동하지 않고 있다. WTO의 표류로 가장 큰 타격을 보는 나라는 무역 의존이 큰 한국이지만 원론적으로 말하면 세계 무역에 참여하는 모든 국가들도 피해당사자이다. 하루빨리 WTO의 기능이 정상화되어야 하는 이유이다. 

WTO는 자유무역을 저해하는 덤핑과 보조금 등 불공정 무역에 대해 엄격한 대응조치를 규정하고 있다. 특히 수출을 지원하는 보조금의 수혜 기업에 대해서는 산업피해를 본 수입국이 가장 엄격한 페널티의 하나인 상계관세를 매길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보조금과 달리 연구개발(R&D) 보조금은 GATT 체제에서 페널티를 받지 않았고 1995년 WTO 출범 이후 2004년까지 10년의 유예기간을 두었다. 연구개발이 특별히 대접받았던 이유는 인류문명에 대한 기여와 연구개발 지원이 많았던 미국 등 선진국의 고려가 작용한 때문이다. 연구개발에 대한 예외적 대우는 동 보조금에 대해 상계관세 부과가 가능해진 2005년 이후에도 이어지고 있다. 과문한 탓인지 모르지만 다른 보조금에 대해서는 여러 제소가 있었지만 연구개발 지원에 대해서는 아직 단 한건도 제소되지 않고 있다.  

WTO의 관용적인 자세와 궤를 같이 하여 세계 각국도 연구개발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산업정책을 정부 부서명으로도 사용하고 있는 대표적인 나라는 일본과 한국이지만 서구에서도 산업 육성을 위한 산업정책에 대한 비판적 겉모습과 달리 실제로는 이러저러한 형태의 산업정책을 취해 오고 있었다. 미·중 산업무역 전쟁 이후 미국이 드러내 놓고 산업정책을 취하면서 서구는 물론 세계 각국은 적극적 산업정책을 공개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미국은 반도체 기업의 미국 투자를 장려하기 위해서 반도체법을 만들어 반도체 생산 보조금 지원 등 5년간 총 527억 달러의 예산을 책정했고 EU도 미국과 비슷한 EU 반도체법을 발효하였다. 각국의 산업정책이 그간 관용의 대상이던 연구개발 지원을 넘어 설비투자 등에 대한 공격적 지원까지 확장된 셈이다.

산업정책에 대한 평가는 어떨까. 저명한 국제경제학자인 허프바우어(Gary Hufbauer)는 “미국의 50년 산업정책의 성적(Scoring 50 Years of US Industrial Policy, 1970–2020)”이라는 연구에서 미국의 산업정책이 기술경쟁력 발전에 기여한 정도를 평가하고 있다. 이 연구는 여러 산업정책 중에서 타깃 기업에 대한 보조금 정책은 C학점, 통상정책은 B학점 정도를 매기고 있는 반면 연구개발 지원에 대해서는 A학점 정도를 줌으로써 연구개발 정책에 대해서는 비교적 후한 점수를 주고 있다. 연구개발의 정당성을 떠나 그 중요성을 학문적으로도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세계적 조류가 산업정책을 지향한다고 해서 산업정책의 본질적 문제점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정부가 시장을 대신하여 자원배분을 담당함으로써 비효율과 배분의 불공정성이 초래될 우려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들은 다하는데 우리만 뒷짐 지고 있을 수는 없다. 산업정책 중에서 연구개발 분야는 WTO에서도 관용하는 분야이니 더욱더 그러하다. 

한국은 연구개발에 매우 적극적인 나라로 꼽히고 있다. OECD에 따르면 한국은 2020년 연구개발/GDP 비율이 4.81%로 이스라엘 다음으로 2위에 랭크되어 있다. 고용 1000명 중 연구개발 인력은 16.6으로 가장 높은 수준이다. 우리 경제발전의 과정은 양적 투입의 증대로 요약된다. 자본을 모아 될성부른 산업들에 투자했고 인재 배출을 늘려 나갔다. 그 결과 우리는 비약적인 발전을 이룰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시대가 변하고 있다. 양적 투입을 늘리면서 만족하는 시대는 지나고 있다. MZ세대가 기성세대를 비판하는 말 중의 하나가 “라떼는 말이야”라고 한다. MZ 세대의 반문처럼 “그때 좀 더 잘했으면 지금 더 좋을 수도 있었는데”를 되새길 필요가 있다. 지나간 성장의 메커니즘을 효율성 관점에서 새롭게 디자인할 필요가 있다. 

연구개발 분야도 마찬가지다. 최근 국가연구개발비 문제로 정부가 대책을 강구하고 있다는 보도가 나온다. 감사원이 조사하고 있고 조만간 기관별 예산 몇 % 삭감 등이 포함된 대책이 나올 것이라고 예상한다. 전문가들은 여러 경로로 연구개발의 문제점과 대안을 제시하여 왔고 국회 예산정책처(“국가R&D사업의 체계 분석”, 2020.10), 국가과학기술연구회 등에서도 대책 마련의 필요성을 제기하였다. 정작 중요한 것은 실행이다. 연구개발 성과를 높이기 위해서는 그동안 전문가들이 제기한 문제점과 대책을 바탕으로 관련 부처와 기관들이 대승적 차원에서 공공 연구개발이 A학점을 받을 수 있도록 제도를 혁신하려는 의지가 필요하다. 

여러 이슈 중에서 두 가지만 제기하고자 한다. 첫째는 중복된 연구를 거르는 장치를 마련하여야 한다. 연구개발 과제가 여러 부처와 기관 간에 중첩될 가능성을 없애야 한다. 예를 들어보자. 연구자가 내연기관 에너지효율 향상이라는 과제를 A기관에 신청하는 한편 다른 B기관에는 제목을 조금 바꾸어 자동차기술 향상을 위한 과제로 신청하면 어떻게 될까. 현재 연구개발을 공모하고 신청, 선정하는 과정에서 여러 연구자와 전문가들이 참여하고 있고 이해관계가 얽히고 있다. 중복성이 체크가 된다면 다행한 일이지만 현실적 한계 때문에 놓치기 쉽다. 중복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여러 기관에 분산 추진되고 있는 연구개발 과제들을 통합적으로 거를 수 있도록, 정부의 규제심사위원회와 같은, 중복심사위원회(Overlapping Review Committee)를 정교하게 운영하는 방안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둘째, 국가 연구개발 사업의 민주화와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활발한 연구개발 결과의 실용화가 이루어져야 한다. 2021년 국가연구개발사업 보고서(KISTEP)에 따르면 정부연구개발사업은 출연연구소 등과 대학이 60%를 넘는 비중을 차지하고 있고 응용과 개발연구의 많은 과제에 돈이 투입되고 있다. 연구과제나 특허의 숫자보다 더 중요한 것은 공적 연구개발의 효과를 높이는 것이다. 연구자들은 장롱특허 대신 써먹을 수 있는 연구결과를 내놓고 중소기업 등 다수의 기업들에 이전되어 활용할 수 있도록 연구개발 선순환 체제를 만들어야 한다.  

국내 총연구개발비의 80% 정도를 민간 기업이 수행하고 있지만 우리나라의 연구개발 역량이 높아지기 위해서는 공적 연구개발의 개선부터 시작하여야 한다. 연구개발 체제의 혁신을 시작으로 우수한 기술 인력이 많이 나올 수 있도록 공학교육과 지식재산권 제도를 정비하여야 하고 외국기업이 R&D 센터를 한국에 세울 수 있도록 외국인투자 유치 정책 등도 고민하여야 한다.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새삼 절실해지는 순간이다. 



 이학노 필진 주요 이력

△서울대 경제학과 △텍사스대 오스틴캠퍼스 경제학 박사 △통상교섭민간자문위원회 위원장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컴패션_PC
0개의 댓글
0 / 300

로그인 후 댓글작성이 가능합니다.
로그인 하시겠습니까?

닫기

댓글을 삭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이미 참여하셨습니다.

닫기

이미 신고 접수한 게시물입니다.

닫기
신고사유
0 / 100
닫기

신고접수가 완료되었습니다. 담당자가 확인후 신속히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닫기

차단해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사용자 차단 시 현재 사용자의 게시물을 보실 수 없습니다.

닫기
실시간 인기
기사 이미지 확대 보기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