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가타 요시히로의 한일 풍경] 월드컵 순수하게 즐긴 순 없을까 …맹목적 '국뽕' 밀어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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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가타 요시히로 준교수
입력 2022-12-14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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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가타 요시히로 후쿠오카대학 인문학부 동아시아지역언어학과 준교수]

4년에 한 번 열리는 세계적인 축제, 올림픽보다 많은 사람들을 매료시킨다고도 하는 월드컵이 카타르에서 절정을 이루고 있다. 나는 한국에 있을 때 축구를 비롯해 국제적인 스포츠 경기가 있을 때마다 한국과 일본, 어느 쪽을 응원하느냐는 질문을 자주 받았다. 하지만 나는 특히 축구는 멋진 경기를 보고 싶다는 순수한 마음이 강하기 때문에 월드컵 같은 대회에서는 한국과 일본 어느 쪽도 아닌 매력적인 축구를 보여주는 나라에 대한 관심이 더 컸다. 물론 한국이나 일본이 멋진 경기를 보여주면서 좋은 성적을 남긴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아직까지 내가 가장 응원하는 팀은 이탈리아다. 나는 초등학교 때부터 취미로 축구를 해왔는데 포지션이 수비수여서 ‘카테나치오(catenaccio)’라고 불리는 빗장수비를 자랑하는 이탈리아 축구를 좋아한다. 그러나 이탈리아는 유럽 예선에서 뜻하지 않은 패배로 카타르 대회에 출전하지 못해 나로서는 매우 유감이다.
 
축구라고 하면 역시 한·일이 공동 개최한 2002년 월드컵이 떠오른다. 한국 대표팀의 예상을 뛰어넘는 맹활약으로 축구팬들 사이에서는 한·일 공동 개최였다는 사회적·정치적 의미가 퇴색된 것 같기도 하지만, 그래도 국제적인 큰 행사를 한·일이 공동으로 개최한 데 대한 의미는 크다. 그로부터 4년 전인 1998년에는 한·일 간에 ‘21세기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 즉 김대중·오부치 파트너십 선언이 채택되었고, 한국에서는 일본 대중문화가 점차 개방되었다. 또한 일본에서 ‘겨울연가’와 ‘욘사마’ 인기에 힘입어 한류 붐이 시작된 것이 2003년이다. 2002년 한·일 월드컵은 그런 한·일 양국 간 우호적 분위기의 상징이었고, 이후 양국 간 거리는 분명 좁혀지게 되었다.

2002년 당시 나는 일본에서 회사원이었는데 월드컵 기간 동안 총 3차례, 모두 합쳐 보름 정도 휴가를 내고 월드컵을 관전하기 위해 한국을 찾았다. 당시 한국은 사전예약 문화가 지금만큼 정착되지 않았던 덕에 한국전을 제외하면 비교적 경기 티켓을 구하기가 수월했다. 나는 일본에서 열리는 경기의 관전은 포기하고 항공권과 묶어서 판매하던 티켓을 입수해서 전주, 부산, 서울을 방문해 몇 개 경기를 직접 관람했다.

한국이 승부차기 끝에 스페인을 꺾고 4강에 극적으로 올라간 8강전은 잠실구장 전광판을 통해 많은 사람들과 함께 관전했다. 주장 홍명보가 골을 넣고 승리를 확정 지은 순간, 옆에 있던 누군지도 모르는 한국인과 얼싸안고 기뻐했던 기억이 난다. 그날 밤, 폭죽을 날리며 그야말로 축제 분위기였던 종로 거리를 누볐던 것도 잊을 수 없는 추억으로 남아 있다. 한국은 아쉽게도 준결승전에서 독일에 패했지만, 그 덕분에 내가 가지고 있던 3·4위전 티켓으로 상암 경기장에서 ‘붉은 악마, Be the Reds!’ 티셔츠를 입고 터키와 맞붙게 된 한국 경기를 직접 볼 수 있었다.

나 개인적인 체험도 그렇지만, 2002년 월드컵이 한·일 관계가 새로운 시대로 나아가는 데 있어 하나의 상징적 사건이 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한·일이 공동으로 하나의 일을 이루는, 대등한 관계를 구축해 나가는 시대의 개막이었을지도 모른다.
 
한편 2002년은 일본 사회에서 한국 또는 한국인에 대한 인식에 또 다른 큰 전환점을 가져오기도 했다. 2002년 9월 17일 고이즈미 준이치로 당시 일본 총리가 평양을 방문해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첫 북·일 정상회담이 성사되었고, 한반도 평화를 위한 북·일 평양선언을 발표했다. 그리고 북한은 과거 일본인을 납치한 사실을 인정했고 그 피해에 대해 사과했으며, 그다음 달에는 납치 피해자 5명이 일본으로 송환되었다. 이를 계기로 일본에서는 격렬한 ‘북한 때리기’가 시작되었고, 북핵 문제와 더불어 2010년대 들어 ‘혐한’ 붐의 바탕이 되기도 했다.

이 납치 문제는 여전히 귀국하지 못한 피해자들이 남아 있을 뿐 아니라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는 피해자들에 대한 정확한 정보도 제공되지 않고 있어 일본 사회가 북한에 대해 악감정을 갖는 것이 이해될 수도 있다. 그러나 납치 문제를 둘러싼 비난의 화살은 북한 정부뿐만 아니라 재일 코리안, 그리고 한국으로도 향했다. 북한의 국가 범죄에 대한 분노와 한반도에 뿌리를 둔 자들에 대한 혐오가 뒤섞여 헤이트스피치(hate speech·혐오 발언)로 이어진 것이다. 이후 일본에서는 이른바 ‘혐한 시위’와 ‘혐한 서적 열풍’이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되었다.

일본 사회의 이러한 변화는 패전 후 처음으로 자신들이 피해자가 될 수 있었던 데 따른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1990년대는 패전 후 경제 발전을 이룬 일본 사회가 과거 침략 전쟁과 식민 지배에 대해 가장 진지하게 마주했던 시기일지도 모른다. 전쟁책임론, 전후보상론 등이 사회적 관심사로 떠올랐고, ‘위안부’ 문제에 대해 ‘고노 담화’ 등 정부 발표를 통해 그 사실과 일본의 관여를 인정하고 사과했다. 물론 식민 지배에 대한 청산이 충분하지 않았고, 이후 일부 우파 세력에 의한 백래시(backlash·반동)로 인해 그런 분위기가 퇴색될 수밖에 없었다. 당시가 과거를 가장 진지하게 마주했던 시기였다고 되돌아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 지금의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어쨌든 일본이 피해자로서 아시아 국가를 당당히 비판할 수 있는 상황에 놓이자 일본 사회는 납치 문제와 핵 문제를 구실로 북한 때리기에 열렬하게 달려들었다.

일본인 납치 문제에 강경한 태도를 보여 일약 주목을 받으며 총리 자리까지 오른 아베 신조가 역사수정주의자였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침략 전쟁 등 과거사 청산 풍조에 대한 백래시 속에서 입지를 다진 아베는 전후 최장 재임 기간을 자랑하는 총리로 이름을 남기게 됐다. 역사수정주의와 과거사 청산에 대한 백래시 영향은 심각하다. 도쿄, 오사카, 교토 등 코리아타운과 재일 코리안들이 다니는 민족학교는 혐한 시위의 표적이 됐다. 시위는 어쩌면 순화된 말이며 그야말로 그것은 위협이자 협박, 언어와 정신적인 폭력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일본 정부는 그러한 폭력을 막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조장하는 정책을 취했다. 납치 문제를 둘러싼 국민 정서를 구실로 고등학교 교육비 무상화 정책 대상에서 조선학교를 제외한 것이다. 유치원부터 대학교까지 모두 합쳐서 현재 일본에 64개 있다는 조선학교가 한국 측 지원이 부족한 가운데 북한에 의존하는 형태로 유지되어 온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민족교육을 보장하지 않는 일본 정부의 정책 속에서 사회적 소수자로 살아남기 위해 지켜온 배움터로서 조선학교는 결코 납치 문제를 책임져야 할 주체가 아니다. 당연히 그곳에 다니는 아이들에게는 민족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고, 그것을 보장하는 것은 일본 정부 몫이다.

차별을 억제하지 않고, 오히려 북한의 국가 범죄와 민족교육을 받으려는 아이들을 동일시하는 조선학교 차별을 정당화하는 일본 정부의 조치는 헤이트크라임(hate crime·증오 범죄)마저 조장할 수 있는 위험한 태도다. 왜 사람들은 국가에 개인을 포개어 혐오하고 공격하는 것일까. 물론 어떤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다해야 할 책임은 있겠지만, 과거 식민 지배 청산의 책임은 분명 일본 정부 또는 사회가 지고 있는 것이지 개인이 그 비난을 떠안는 것은 옳지 않다.

2002년 북·일 정상회담은 2000년 남북 정상회담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한·일 국교 정상화 이전인 1950년대 북한과 일본이 한때 긴밀한 관계를 도모했던 때와 달리 일본이 한국을 외면하고 북·일 관계를 우선하는 일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남북 관계 개선 분위기를 배경으로 일본이 식민 지배에 대한 사죄와 반성을 북한에 표명함으로써 북·일 국교 정상화가 모색된 것이었다. 물론 현실은 그리 쉽지 않았고 동아시아 지역의 평화는 위태롭기만 한 것이 현실이지만 2002년은 한·일과 북·일, 즉 한반도와 일본이 새로운 관계를 구축해 나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 해이기도 했다.
 
국가의 위상을 건 월드컵 경기는 때로 국가 간 마찰을 부르기도 한다. 축구 경기가 스포츠 이상의 무엇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일본 대표팀이 승리해서 외국 친구들에게 축하한다는 말을 들을 때가 있는데, 물론 기분이 나쁜 것은 아니라 고맙게 생각하지만 나는 사실 크게 와닿지 않는다. 스포츠를 통해 조국에 대한 마음을 다지는 경우도 있겠지만 국가와 개인의 거리 또한 사람마다 다른 것이니 무엇이 옳다고 할 문제도 아닐 것이다. 다만, 국가와 개인을 동일시하는 것은 축구 등 스포츠에서 멈췄으면 한다.

월드컵 기간 동안 동료 독어학과 교수는 일본이 독일을 꺾은 다음날 크게 낙담하고 있었다. 그는 일본인이지만 독일 팬이라고 한다. 나도 이탈리아와 일본이 경기한다면 어느 쪽을 응원할지 모르겠다. 한국과 일본 둘 다 이번 대회 16강전에서 이겼다면 8강에서 한·일전이 성사됐을 것이다. 만약 월드컵에서 한·일전을 볼 수 있다면 분명 설레는 일일 것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경기 내용에 따라 어쩌면 여론이 들끓지 않을까 걱정하던 마음이 있었기에 한·일전이 성사되지 않은 것에 안도하기도 했다. 나는 이제 일요일로 다가온 결승전을 마음 편하게, 세계 최고 수준의 축구를 즐길 수 있기를 바라며 기다린다.



오가타 요시히로(緒方義広) 주요 이력
▷후쿠오카대학 인문학부 동아시아지역언어학과 준교수 ▷연세대 정치학박사  ▷전 홍익대 조교수 ▷전 주한 일본대사관 전문조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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