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호이의 사람들] 황석희 번역가가 말하는 번역가이기 때문에 생기는 궁금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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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이 객원기자
입력 2022-10-01 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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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을 뛰어 넘는 초월적인 번역을 통해 번역의 신으로 불리는 황석희 번역가. 그는 번역을 위해 많은 용어들을 수집하곤 한다. 그 결과 ‘1917’ ‘보헤미안 랩소디’ 등 많은 영화들에서 원작의 개성과 한국어 말맛을 동시에 갈리는 번역가로 불리며 ‘믿고 보는’이라는 수식어를 얻었다.

17년차 번역가임에도 불구하고 여유를 부리거나 느슨해지지 않고 번역을 위해서라면 용어들을 찾고 인터넷 게시판과 SNS를 통해 팬들과 소통을 하며 더 나은 번역가가 되기 위해 노력한다. 그와 함께 황석희 번역가가 번역가로 살면서 생기는 궁금증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사진= 황석희 번역가 제공/ 황석희 번역가 ]


 
Q. 번역을 위해 많은 용어들을 수집하잖아요, 수집의 중요성을 느꼈던 순간이 언제였는지 궁금해요. 그리고 용어 수집 외에 요즘 수집 하고 있는 건 무엇인가요?

A. 전문적인 영역을 다루는 영화를 번역할 땐 용어 수집이 아주 중요해요. 그 직업인들이 영화를 봤을 때 어설프다고 생각하지 않게 해주고 싶거든요. 신세경 씨 주연으로 영화 번역가가 주인공이었던 드라마 <런온>의 자문을 할 때도 그런 생각이 컸어요.

감독님도 배우님도 그런 생각에 저를 먼저 찾아주신 거였고 저도 작품 내에서 제 직업을 다루는 용어들이 어설프지 않길 바랐어요. 제가 번역하는 작품의 자막도 남들이 보기에 그랬으면 좋겠고요.
 
Q. 직업병이 있나요? 그리고 그 직업병이 일상생활을 하면서 어떤 영향을 주나요?

A. 영어를 듣는 걸 좋아하지 않아요. 전에는 평소에도 영어 컨텐츠를 늘 재생해놓고 살았는데 지금은 음악 외엔 잘 들으려 하지 않아요. 그냥 흘려듣는 건데도 일처럼 느껴지거든요.
 
Q. 내가 번역가이기 때문에 생기는 궁금증들이 있을까요?

A. 다른 번역가들의 사고 과정이 궁금하죠. 저런 번역은 어떤 사고로 만든걸까? 평소 뭘 보는걸까? 우연히 나온 자막일까? 아니면 계산된 걸까? 등등. 아무래도 만날 기회가 별로 없다 보니까 다른 분들의 번역 방식이 궁금할 때가 많아요.

좋은 자막을 볼 때면 더욱 그렇죠. 저 자막을 만들어낸 발상, 그 발상을 한 뇌를 빼오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부러워요.
 
Q. 번역을 하면서 가장 어렵고 힘들 때는 언제인가요? 

A. 워라벨 같은 게 전혀 없는, 일만 하는 삶이라 심신이 늘 피곤해요. 체력이 부족할 때가 가장 힘들죠. 마감할 것들은 많은데 갑자기 몸이라도 아프면 걱정이 배가 되고요. 우린 병가 같은 걸 낼 수 있는 입장이 아니거든요. 당장 제 일정이 밀리면 그 뒤로 일정이 다 밀려요.

프로모션, 마케팅, 심의, 배급 등등. 그걸 개인이 감당할 순 없으니까 어떻게든 따라가려고 애쓰고 있어요. 괴롭지만 나를 번역하게 하는 건 생업이라는 이유가 제일 크죠. 다른 그 어떤 직업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생업이라는 건 인간이 사회에서 제 기능을 지속하게 해주는 너무나도 당연한 행위니까요. 번역에 어떤 소명이 있어서 괴로움 속에서도 버티며 한글자, 한글자 번역해내는 아티스트 같은 타입은 아니에요.
 
번역가로서 노력의 보상을 느끼는 순간은 위에 말했던 것처럼 영화가 잘됐을 때 가장 보람 차고 관객 중에 소수라도 내가 자막에서 표현하고자 했던 것들, 의도했던 것들을 찾아내 즐기는 걸 봤을 때 가장 뿌듯하고 감사해요. 힘들어도 그렇게 번역하길 잘했다 싶고.
 
Q. 번역가로서 주목 받은 번역가 중 한명인데요. 약빤 번역가, 번역계의 황태자 등 별명들이 많은데 이름 앞에 붙었으면 하는 별명이 있나요? 그리고 본인이나 직업에 대한 오해 중에 바로 잡고 싶은 것들이 있을까요?

A. 처음에 목표했던 대로 지금도 여전히 '관객과 가장 가까운 번역가'라는 수식이면 충분해요. 너무 영광이고 기쁘고요. 가장 훌륭한 번역가는 될 수 없어도 관객과 가장 가까운 번역가로 남는다면 더 바랄 게 없어요.
 
반대로 '마블 영화 번역의 신' 이런 별명을 붙이는 분들도 계신데 저런 건 인터뷰 때 기자님들이 그저 호의로 붙여주신 지나친 칭찬들이라 떼고 싶어요. 제가 의도한 바도 아니고 자칭도 아닌데 저런 것들로 흉보는 분들도 계셔서 볼 때마다 마음이 안 좋거든요.

솔직히 마블 사가(MCU)의 영화는 번역해본 적도 없어요. <스파이더맨> 영화들은 디즈니에서 만든 마블의 정사라기보다 한켠 비켜 있는 소니픽쳐스의 영화고요. 신이니 천재니, 세상에... 이런 심각한 오해를 생산할 수 있는 수식들은 가능하면 좀 지우고 싶어요. 볼 때마다 쥐구멍 찾느라 힘들기도 하고요.
 
Q. 황석희의 기준에서 좋은 번역과 번역가들이 원하는 좋은 번역, 대중이 원하는 좋은 번역의 중간점은 어떻게 맞추시나요?

A. 전에는 내가 생각하는 좋은 번역의 기준이 강해서 관객이 싫다 하더라도 제 의향의 번역을 고집하는 성향이었어요. 관객들이 싫어하더라도 몸에 좋은 약을 쓰다고 투정 부리는 것과 비슷하다 생각했었거든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는 그 추가 관객들에게 훨씬 많이 기울었어요.

어쨌건 영화를 소비하는 건 관객들인데 내가 억지로 끌고 갈 필요가 있나 싶은 거죠. 번역가로서 이 선은 절대 넘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부분들은 있지만 그런 것들을 제외하면 관객의 기호에 최대한 맞추는 편이에요.
 
Q. 번역가로서 목표는 무엇이었고, 지금 그 목표를 어는 정도 이뤘나요? 

A. 별다른 목표가 있진 않아요. 지금도 제 능력에 비해 너무 많은 일을, 너무 넓은 범위로 하고 있어서 오히려 범위를 줄여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더 들어요. 목표는 지금처럼 꾸준히 영화 번역하면서 무난하게 활동하고 훗날엔 물러날 때를 잘 알고 큰 상처 없이 연착륙하는 거예요.
 
Q, 자녀가 번역가가 되겠다고 하면 뭐라고 하실 건가요?

A. 딸이 하고 싶다고 하면 응원해줘야죠. 세상에 안 힘든 일은 없잖아요. 뭘 하든 자기가 행복한 일이었으면 좋겠어요. 저희 아내가 더빙 번역가인데 아무한테도 소개 안해줬어요. 황석희가 꽂아줬다는 얘기를 듣기 싫었거든요. 아이가 번역가를 한다고 해도 황석희가 꽂아줬다는 얘기를 듣기 싫어서 아내한테 하는 것과 같을 것 같아요.
 
Q. 번역가를 꿈꾸는 사람들에게 가장 하고 싶은 말이 있나요?

A. 영어공부도 중요하지만 다양한 경험도 하고 예능도 많이 보고 게임도 많이하면서 인풋을 늘리세요. 아는 사람들이 어색하지 않게 번역을 할 수 있거든요. 그리고 내 생각을 정리해서 아웃풋을 늘리는 것도 중요하고요.
 
Q. 톡톡 튀는 아이디어의 영감을 어디서 얻나요?

A. 인터넷의 거의 모든 커뮤니티를 다 돌아다녀요. 거기서 어떤 말들을 하는지 다 봐요. SNS 트렌드랑 방송도 클립으로라도 다 봐야 돼요. 그래야 써먹을 수 있어요. 캐릭터에 따라서 유행어를 쓸 수도 있고요. 하지만 원칙처럼 갖고 있어야 되는 것도 있고요.

Q. 황석희의 인생영화는 뭔가요? 그리고 좋아하는 일은 취미로 가지고 있으라고 하잖아요. 번역가가 된 후 영화를 대하는 태도에 있어서 달라진 건 뭔가요?

A. 인생영화는 너무 많고 또 자주 바뀌어요. 최근 몇 년간 가장 좋아했던 건 <플로리다 프로젝트>라는 영화였고요. 번역가가 된 후 영화를 대하는 태도로는 종종 영화를 숙제처럼 여길 때가 생겨요.

딱히 보고 싶지 않은데 일 때문에 억지로 봐야 한다거나 내가 작업하지 않은 영화는 굳이 챙겨보지 않는다거나 하는. 매일 제가 작업하는 영화만 일로 접해도 영화가 질릴 때가 있거든요. 전에는 영화를 소비하는 입장에서 봤다면 지금은 영화를 선보이는 스태프가 된 입장이라 아무래도 관객들처럼 영화를 온전히 즐기기는 어려워요.
 
Q. 번역을 하기 위해서 이것까지 해봤다 하는 게 있나요?

A. 요즘엔 인터넷에 정보가 워낙 많아서 그럴 필요가 없지만 전에는 특정 고유 명사 표기나 역사 관련한 정보들이 궁금할 땐 각국의 대사관에 연락해서 설명을 듣기도 했어요. 저뿐만이 아니라 오래된 번역가들은 종종 하던 일이에요.
 
Q. 인생을 살면서 영화 같은 하루를 살았다고 느꼈던 순간은 언제인가요? 

A. 제 딸을 볼 때면 하루가 영화 같단 생각을 종종 해요. 좀 전에도 엄마와 놀이터에 먼저 놀러나간 아이를 외출하며 만났는데 그네를 타다 말고 내려와서 저 멀리서부터 저를 향해 뛰어와요. 아빠! 하고 크게 외치면서요. 이럴 때면 이것보다 행복하고 영화 같은 순간이 있나 싶죠. 제 삶을 영화로 만들고 싶단 생각은 안 해봤어요. 영화는 늘 기승전결이 있고 갈등이 필요하잖아요. 과욕이지만 제 삶엔 갈등이 없으면 좋겠어요.

너무 어려서부터 너무 많은 갈등이 있어서 트라우마가 된 것들도 많고 아직 치유 중인 것들도 많아요. 저는 그냥 재미없는 영화가 될지언정 '기승'이면 만족해요. 혹은 '기'만 해도 충분해요. 제 엔딩크레딧은 "그래서 그들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라는 뻔하디 뻔한 클리셰였으면 좋겠어요.
 
Q. 번역가로서의 황석희, 사람으로서의 황석희는 어떤 사람인가요?

A. 번역가로서는 치열하고 욕심 많고 과몰입하는 타입이에요. 그래서 무리할 때도 많고 끝도 없이 예민해지기도 해요. 반면에 개인으로서는 허술하고 게으르고 욕심도 없고 외부에 무관심한 자기중심적 한량 타입이고요. 에너지의 90% 이상을 작업할 때만 쏟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곤 해요.
 
Q. 번역가의 커리어에 있어서 가장 중요했던 순간은 언제였나요? 무명시절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이었나요?

A. <웜바디스>라는 영화를 번역했던 순간이 가장 컸고요. 그 작품부터 영화 관계자들 사이에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어요. 포기하지 않을 수 있던 원동력은 이것밖에 없다는 간절함도 있었고 괴로운 생업이긴 해도 좋아하는 일이니까 버틸 수 있던 것 같아요. 그리고 무명시절이라고 부르는 건 지금 케이블티비나 OTT를 번역하는 분들에겐 실례가 될 수도 있는 말일 거예요.

극장 개봉작을 번역하지 않는다고 해서 무명은 아니거든요. 그분들도 그 시장에선 다 유명하세요. 저도 8년 정도 케이블티비 번역을 했지만 사실 그 시장에서 인정받고 잘 활동하고 있는 것도 너무나 대단하신 거라서요. 시장이 다르다 뿐이지 그분들과 저는 똑같은 영상번역가 범위에 속해 있어요. 유명, 무명이 아니라 그저 같은 번역가일뿐이죠.
 
Q. 번역을 하면서 황석희라는 이름과 커리어 속에 채우고 싶은 단어들이 있나요?

A. 성실, 꾸준, 개성, 발전.
 
Q. 마지막으로 삶이라는 영화를 만들어 가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한 말씀 해주세요.

A. 삶은 영화가 아니죠. 영화 속에 필수로 등장하는 감동이나 반전이나 교훈 같은 것들을 만날 기회가 그리 많지 않아요. 그러니까 그런 영화 같은 순간들을 만날 때면 그 단편, 단편을 귀히 여겼으면 좋겠어요. 또 모르잖아요. 삶은 영화가 아니지만 그런 단편들을 고이 모아 장편으로 만들면 훗날 흡족스러운 작품이 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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