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녕대군 증손의 재실 몽한각과 장전마을
 
양녕대군의 증손 이서(李緖·1484~?)는 중종 2년(1507년)에 견성군 이돈을 왕으로 추대하려는 역모에 연루되는 바람에 담양에서 유배 생활을 했다. 그는 14년 만에 해배(解配)된 뒤에도 한양에 올라가지 않고 담양에 눌러 살았다.
1803년 후손인 담양부사 이동야, 창평현령 이훈휘 등은 선조 이서를 기려 재실 몽한각(夢漢閣)을 세웠다. 몽한각은 이서가 유배 시절 지은 시 ‘술회(述懷)’의 시구 '分明今夜夢(분명금야몽)'에서 ‘몽’을, ‘飛渡漢江波(비도한강파)'에서 ‘한’자를 따왔다.
 
斗縣雲山壯(작은 고을에 운산은 웅장한데)
寒窓歲月多(찬바람 부니 세월은 많이 흘렀구나)
分明今夜夢(오늘 밤 꿈에는 꼭)
飛渡漢江波(한강물 날아서 건너고 싶어)
 
운산은 담양군 대덕면 운산리에 있다. 1900년대 초까지 호랑이가 출현했을 정도로 크고 깊은 산이다. 2002년 담양향토문화연구회에서 펴낸 《담양설화》 대덕면 편에는 운산에 사는 삼형제가 화승총을 쏘고 격투를 해 호랑이를 잡았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두현(斗縣)은 작은 고을이란 뜻이다. 깊은 산골짜기에 있으니 고을이 클 리 없다. 멀리 타향 남도의 산골마을에서 귀양살이하는 왕족이 계절의 바뀜을 보면서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고 꿈에라도 일가친척과 친구들이 사는 고향 땅 한양으로 가고 싶은 그리움을 드러낸 시다.
 

양녕대군 증손 이서의 재실 몽한각 [사진=황호택]

견성군은 역모 주동자들이 “성품이 어질어 왕으로 추대할 만하다”고 거론했다는 이유로 억울하게 휘말렸다. 중종은 아버지(성종)가 같은 이복 형제인 견성군을 살려주려고 했으나 신하들의 중론에 밀려 강원도 간성으로 유배 보냈다가 사사(賜死)했다. 성공하면 군왕이고 실패하면 역적이다. 연산군을 폐위하고 중종을 세운 신하들로서는 죽느냐 죽이느냐의 싸움이었다.  
조선왕조에서 왕족의 삶은 때로 살얼음을 밟는 것처럼 위태로운 신세였다. 이서는 유배가 풀리자 귀경(歸京)의 뜻을 접고 추월산 자락 담양의 전원생활을 예찬하는 ‘낙지가(樂志歌)’를 지었다.
그의 문집 '몽한영고(夢漢零稿)'에 전하는 4‧4조의 가사(歌辭) 낙지가는 ‘호남 천리 53주 각 고을의 산들 중 담양의 추월산이 으뜸’이라고 추켜세우며 담양에 초가삼간 짓고 안빈낙도(安貧樂道)하겠다는 다짐과 자기 위로의 내용을 담았다.
태종실록에 따르면 이서의 증조부 양녕대군은 왕실과 왕세자의 체통을 손상시키는 스캔들을 여러 차례 일으켰다. 폐(廢)세자에 이른 결정적인 계기는 잘못을 꾸짖는 부왕에게 ‘전하의 시녀는 다 궁중에 들이시면서···저의 여러 첩(妾)을 내보내어 곡성(哭聲)이 사방에 이르고 원망이 나라 안에 가득 찹니다'라고 대드는 편지를 썼다가 태종의 불 같은 노여움을 산 것이었다.  
 

창평 몽한각에서 도난당했다가 11년 만에 되찾은 숭례문 목판. 양녕대군의 글씨. [사진=황호택]

조선시대에 왕조실록은 험한 산중의 사고(史庫)에 들어 있어 아무나 들춰보기 어려웠지만 숭례문(崇禮門‧지금의 남대문)은 한양 도성을 상징하는 건축물로 성벽 한복판에 우뚝 서 있었다. 이서의 후손들은 양녕대군이 숭례문 편액을 쓴 명필이라는 데 큰 자부심을 가졌다. 편액에 낙관이 없어 논란이 있기는 하지만 양녕대군이 썼다는 것이 다수설이다. 후손들은 1827년 숭례문 편액과 양녕대군의 사당인 지덕사(至德祠)에 보관하던 양녕대군의 초서(草書) 작품 후적벽부(後赤壁賦)를 중각(重刻)해 담양 몽한각에 보관했다. 그러던 중 2008년 9월 도난당했다가 2019년 문화재 절도범들이 경찰에 체포돼 되찾았다.
이서는 담양 땅에서 눈을 감으면서 "과거 보지 말고 부귀영화를 탐하지 말라"는 유언을 후손들에게 남겼다. 낙지가에도 권력에 기웃거리지 말고 안분자족(安分自足)하라는 뜻이 담겨 있다.
 
직처(織妻)가 베를 짜니 의복이 걱정 없고
앞 논에 벼 있으니 양식(糧食)인들 염려하랴
 
후손들은 계속 유훈을 지키다가 14대손부터 과거에 응시했다. 몽한각 입구에는 250년, 350년 수령의 소나무 두 그루가 서 있다.
창평면 장전(長田)마을은 풍수지리상 지세가 좋았다. 이서의 11대손 이형정(衡井·1682~1752) 공이 대덕면 매곡에서 분가해 이 마을에 입촌했다. 전주 이씨인 이서의 후손이 장전 이씨라고 불리게 된 배경이다. 이후 그의 후손에서 천석꾼이 여러 명 나왔다고 한다. 이들은 재력을 기반으로 후손들을 교육해 대학생이 드물던 해방 이전에도 장전 마을은 ‘학사촌’이라고 불렸다.
 

장전 이씨 종택 대문에 걸려 있는 '매오당' 당호 편액. [사진=황호택]

장전(長田)은 시골에서 가끔 만나는 평범한 마을 이름이다. 마을 이름은 원래 진밭골이었다. 긴 밭의 사투리가 진 밭이다. 대개 글로 쓸 때는 長田이라고 하고, 말로 할 때는 진밭이라 한다.
마을 맨 위쪽에 있는 장전 이씨 종택은 전라남도 민속문화재 제41호. 사랑채의 대들보에 ‘상지십이년을해(上之十二年乙亥)’라고 상량문이 씌어 있어 고종 12년(1875년)에 건축됐음을 알 수 있다. 사랑채 앞에는 조선시대 정원의 한 형태인 방지원도(方池圓島)가 조성돼 있다. 네모난 연못 안에 동그란 작은 섬이 있고 섬 안에는 매화나무가 심어져 있다. 연못은 방화수 용도로도 쓰였다. 
 

장전 이씨 종택의 사랑채와 방지원도. [사진=황호택]

사랑채는 외부 손님을 받는 공간이다. 안채는 사랑채나 담밖에서 안을 굽어볼 수 없는 구조를 만들어 놓았다. 사랑채에서 안채로 이어지는 중문을 들어서면 곡식을 보관하는 대형 뒤주가 독립건물로 돼 있다. 쌀 40석(石·열 말)이 들어간다. 뒤주 건물은 사랑채에 드나드는 사람들이 안채를 들여다보지 못하도록 차단한다.
필자가 사랑채와 정원을 구경하는 사이에 중문에 매어진 사나운 개가 계속 요란하게 짖어댔다. 한참 있다가 집주인이 나왔다. 명함을 건네고 방문 목적을 설명했다. 그는 ‘다소 얼굴이 풀리더니 우리 집안에 “이과 출신이 많아요”라고 말했다. 이 고택은 세계적인 과학자로 합성섬유 비날론을 개발한 이승기(李昇基·1905~1996)의 생가다. 일제 강점기에 교토(京都)제대에서 박사 학위(화학공학)를 받은 조선인 첫 공학박사다. 1949년 월북해 북한에서 중요 직책을 맡다가 별세한 후에는 애국열사릉에 안장됐다.
 

곡간이 담을 대신하고 뒤주 건물이 중문을 막아서 안채의 프라이버시를 보호했다. [사진=황호택]

이 박사가 월북하는 바람에 장전 이씨 종가는 남쪽에서 어려움을 많이 겪을 수밖에 없었다. 일본에 유학 간 지주의 아들들이 지주, 자본가를 적대시하는 사회주의 물이 들어서 귀국한 것도 세상살이의 아이러니다. 채만식의 소설 '태평천하'에서 윤직원 영감은 일본 유학 간 손자가 사회주의 운동을 하다가 경찰에 체포됐다는 소식을 듣고 "만석꾼의 집 자식이, 세상 망쳐놀 사회주의 부랑당패에 참섭을 하여. 으응. 죽일 놈! 죽일놈!"이라고 한탄한다. 실제로 이런 일이 지주가 많은 호남에서는 적지 않았다. 
집 주인에게 “방지원도에 매화를 심은 뜻이 있느냐”고 묻자 그는 “조부의 호가 매오(梅五)”라고 답하며 대문을 가리켰다. 대문 처마에 매오당(梅五堂)이라는 당호 편액이 걸려 있다. 그는 중문의 사나운 개를 막아서더니 나를 금단의 안채로 들어가게 해주었다. 안채 마루에는 빨래들이 널려 있었다. 그는 뒤주에 관한 이야기를 하다 “우리 집이 700석을 했다”고 답했다. 내가 “부자였네요”라고 말하자 “장전 이씨 중에는 천석꾼이 많았다”고 말했다. 내가 “천석이나 700석이나 큰 차이가 있나요”라고 반문하듯 말하자 그는 “차이가 크다”고 받았다.
튼튼한 재력으로 후손들의 교육을 뒷받침해 장전 이씨 중에 인물이 많이 나왔다는 설명이 이어졌다. 그는 처음 만날 때보다는 훨씬 더 친절해져서 오른쪽 언덕에 있는 집을 가리키며 정치인 김종인씨 외갓집이고, 왼쪽 대숲 앞에 있는 집은 영화감독 임권택씨 외갓집이라고 설명했다. 장전마을의 지세가 좋아서 친손자들은 물론이고 외손자들까지 잘된 모양이다.
 

장전이씨 종택의 대문을 들어서면 160년 수령의 와송이 앞을 가로막는다. [사진=황호택]

안채는 양쪽 담이 없고 네 칸짜리 곡간 건물이 담을 대신했다. 담 옆으로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이 집의 프라이버시를 침탈 못하게 하는 구조다. 안채는 정면 6칸, 측면 1칸에 앞뒤로 마루가 있는 팔작기와집. 막돌을 1.5m가량 높이로 다소 높게 기단을 쌓아 집주인의 권위를 높였다.
대문 입구에는 집을 지을 때 심었다는 와송(臥松) 한 그루가 있다. 수령 160년.
장전마을 초입에 있는 고래등 같은 영서당(迎瑞堂)은 1835년에 지은 한옥이다. 감사원장과 국무총리 서리를 지낸 이한기의 고조인 이최선(李最善·1825~1883)의 생가. 영서당의 솟을대문은 잠겨 있었다. 필자가 찾았을 때 집에는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담이 높아 사진을 찍기 어려워 낭패라는 생각이 들었으나 마을 안길에서 만난 노인이 자신의 집 옥상으로 안내했다. 영서당의 전체 모습이 잘 나오는 포토 존이었다. 마을의 자랑이니 필자를 도와주는 것이리라.
 

이한기 전 총리서리와 고조인 이최선 공의 생가 영서당. [사진=황호택]

문일정(聞一亭)은 장전마을의 동남쪽 언덕에 있다. 노송 10여 그루가 둘러싸고 있고 아래로는 개울이 흐른다. 정자를 세우기에 안성맞춤인 곳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팔작지붕이다. 중앙에 재실이 있다. 정자 옆에는 양녕대군 15세 손인 이규형(李奎亨)의 묘소가 있다.
이규형은 이곳에서 강학을 했다. 그의 아들 석전 이최선은 1866년 병인양요 때 의병을 일으켰고 성리학자 교육자로 척사위정(斥邪衛正)과 빈민 구제에 앞장섰다. 문일정도 그의 작품이다.
대한민국에서 내로라하는 인물들이 일일이 열거하기 바쁠 정도로 이 마을은 인재의 요람이다. 장전 이씨 종택의 바로 앞집은 서울대 약대의 전신인 조선약학원 출신 전남 약사면허 1호 이정기 박사의 생가. 정원이 잘 가꾸어져 있다. 안주인에게 양해를 구하고 집의 내력에 관해 물으니 “공부를 안 하고 오셨네. 인터넷에 다 나와 있어요”라고 답했다. 전남대 의대학장을 지낸 이진기 박사도 이 마을 출신이다.
 

한말의 성리학자 이최선 공이 세운 정자 문일정. [사진=황호택]

모두 양녕대군의 후손들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양녕대군의 16대손이다. 양녕대군이 폐세자됨으로써 후손에서 왕이 나오지 않았지만 대한민국 최초의 대통령이 나왔으니 역사의 반전이 흥미롭다.
담양에는 양녕대군이 전해준 음식과 관련한 전설이 많다. 담양 한과는 양녕대군을 따라온 궁녀들이 전해준 것이고, 창평 엿도 그렇다는 것이다. 그러나 양녕대군이 궁녀들을 데리고 담양에 내려왔다는 문헌적 근거는 찾아볼 수 없다. 양녕대군은 세자 자리에서 밀려난 뒤 광주 이천 과천 한양 등지로 옮겨 다니며 살았다. 다만 양녕의 증손 이서 집안의 왕족 문화가 담양에 큰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이 이야기가 오랜 세월을 두고 전해지면서 ‘증손’이 생략되고 바로 양녕으로 연결돼 버리지 않았을까 하고 추측해본다.
<황호택 논설고문·카이스트 문술미래전략대학원 겸직교수>
후원=담양군(군수 최형식) 뉴파워프리즈마(회장 최대규)
 
참고문헌

1.이해섭 《담양설화》 담양향토문화연구회, 2002
2.장광호 <담양의 마을(1)-창평 장전마을> 《담양뉴스》 2016.10.25.
3.채만식 <한국문학전집 11> 《태평천하》 문학과 지성사, 2021
4.최상은 《조선인의 삶과 가사문학》 보고사, 2020
5.<태종실록> <중종실록> 《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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